검색결과 총 13건
-
-
한일 경제공동체, 늦었다는 자각속에 원칙이 있어야
19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시의는 있다. 이 논의는 결코 이른 구상이 아니다. 오히려 늦었다. 한국과 일본 정상은 오는 5월 19~20일 안동에서 올해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갖는다. 셔틀외교는 복원되고 있지만, 국제질서의 변화는 그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여 왔다. 지금 세계는 더 이상 예전의 세계가 아니다. 교역은 시장의 논리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기술은 무기가 되었고, 공급망은 외교의 수단이 되었으며, 제재는 통상의 언어가 되었다. 미중 정상 간 대화가 이어져도 대만 문제는 여전히 양국 관계의 뇌관으로 남아 있다. 반도체를 둘러싼 통제는 더 노골적이다. 미국 의회에서는 동맹국 기업에까지 대중 수출통제를 사실상 강제하려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고,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다. 이쯤 되면 질서는 이미 바뀐 것이다. 바뀐 질서를 읽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도태된다. 에너지 질서의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IMF는 아시아가 중동발 에너지 충격에 다른 지역보다 더 취약하다고 경고했다. 중동산 연료 의존이 크고, 제조업 비중이 높은 경제구조 탓에 유가와 물류가 흔들리면 성장과 물가가 함께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중동발 에너지 충격의 여파로 4월 도매물가가 3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뛰었다. 국제정세의 급변이 추상적 위험이 아니라 현실의 비용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늦지 않은 깨달음이 아니라, 늦었기 때문에 더 절박한 인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급증에 기대어 거창한 말부터 앞세워서는 안 된다. 한일 경제공동체는 선언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한일 관계는 늘 필요에 의해 가까워졌다가, 역사 앞에서 흔들리기를 반복해 왔다. 그런 만큼 지금 필요한 것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 방파제다. 양국 산업 당국이 올해 3월 공급망 파트너십 약정을 체결하고 정례 산업·통상 정책대화를 출범시킨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공급망 교란이 닥쳤을 때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산업기반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말보다 무겁다. 공동체란 이름보다 먼저 이런 장치가 쌓여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다. 경제가 급하다고 역사를 접어둘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역사 문제를 덮은 채 서두르는 협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지금도 유효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양국은 그 선언에서 과거를 직시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만들자고 했다. 미래지향은 과거 망각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직시 위의 화해, 그 위의 협력이었다. 한일 관계가 다시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순서를 되찾아야 한다. 따라서 이번 안동 회담의 과제는 분명하다. 큰말을 경계하고, 작은 합의를 무겁게 만드는 일이다. 에너지 비상 대응, 핵심광물 확보, 반도체와 첨단산업 협력, 공급망 이상 징후의 조기 공유, 불필요한 통상 충돌의 억제 같은 것들이다. 이런 기초가 쌓여야 비로소 한일 경제협력은 정치의 계절을 덜 타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박수받을 선언문이 아니다. 시장과 산업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협력의 구조다. 맹자는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라 했다. 때를 얻는 것보다 형세를 얻는 것이 낫고, 형세를 얻는 것보다 사람의 화합이 낫다는 뜻이다. 지금 한일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국제질서 변화의 파고를 읽는 냉정함, 늦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솔직함, 그리고 감정이 아니라 원칙 위에서 협력을 설계하는 절제다. 한일 경제공동체는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장밋빛 구호에서 나오지 않는다. 늦었다는 자각에서 출발할 때만, 그 말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2026-05-17 09:27:15
-
-
한·인도 전방위 협력이 긴요하다
[경제일보] 중동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인도 방문 중 밝힌 “호르무즈 해협 자유항해 확보와 공급망 다변화, 그리고 인도와의 긴밀한 협력” 구상은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대한민국이 직면한 생존의 문제이자, 동시에 새로운 도약의 기회다. 세계 질서는 이미 단일 축에서 다극 구조로 이동했다. 에너지와 공급망, 기술과 안보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복합 위기’의 시대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우리 경제의 취약한 지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원유와 천연가스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 의존하는 한국으로서는 해상 교통로의 안정이 곧 국가 안보다. 이 대통령이 인도와의 협력을 통해 해상 안전과 공급망 다변화를 동시에 강조한 것은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도는 이제 단순한 신흥시장이 아니다. 인구와 성장 잠재력, 기술 인프라,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를 종합할 때 인도는 ‘또 하나의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해양 네트워크의 중심에 위치한 인도는 중동 리스크를 완충할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다. 한국과 인도가 함께 해상 질서와 물류망을 안정시키는 것은 단순한 협력을 넘어 공동 생존의 문제다. 경제 측면에서도 협력의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개선은 그 출발점일 뿐이다. 조선과 해운, 방위산업, 금융, 그리고 핵심광물 공급망까지 협력의 범위는 이미 전방위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K9 자주포 사업은 양국 방산 협력의 상징적 사례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무기 수출이 아니라 기술 이전과 생산 협력, 그리고 전략적 신뢰 구축까지 포함된 복합 협력 모델이다. 더 나아가 핵심광물 공급망에서의 협력은 미래 산업의 핵심이다. 인도는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한국은 이를 첨단 산업으로 전환할 기술을 갖고 있다. 양국이 결합할 경우 배터리와 전기차, 반도체 등 전략 산업에서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다. 이는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고 경제안보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한·인도 협력의 진정한 잠재력은 경제를 넘어 문화와 정신의 영역에 있다.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음악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고 인도의 영화 산업, 이른바 ‘볼리우드’ 역시 막대한 내수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양국의 문화 산업이 결합할 경우 새로운 콘텐츠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교류를 넘어 공동 창작과 공동 시장 개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양국은 깊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고대 가야와 인도의 아유타국을 잇는 설화는 단순한 전설을 넘어 문화적 상징으로 작용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서사는 오늘날 양국 협력의 정서적 기반이 된다. 경제와 안보의 협력 위에 문화와 역사라는 토대가 더해질 때 협력은 단기적 이해관계를 넘어 장기적 동반자로 발전할 수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원자력과 우주항공, 인공지능과 디지털 인프라는 미래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영역이다. 한국은 원전 기술과 반도체, 우주 발사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고 인도는 IT 인력과 우주개발 역량에서 강점을 지닌다. 양국이 협력할 경우 단순한 보완을 넘어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 결국 한·인도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세계는 더 이상 한 국가의 힘으로 안정될 수 없는 구조로 변했다. 이 대통령이 강조한 다자주의와 규범 기반 질서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어느 나라도 홀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며 어느 경제도 단일 공급망에 의존해서는 지속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다. CEPA 개선 협상은 속도를 내야 하고 해운·조선 협력은 구체적 프로젝트로 이어져야 하며 방산과 핵심광물 협력은 제도적 기반을 갖춰야 한다. 동시에 문화와 인적 교류를 확대해 협력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 한·인도 관계는 이제 ‘가능성의 단계’를 넘어 ‘실행의 단계’로 들어섰다. 중동의 불안이 오히려 새로운 협력의 계기를 만들고 있다면 그것을 기회로 전환하는 것이 국가 전략의 핵심이다. 바다는 연결되어 있고 시장은 이어져 있으며 미래는 협력하는 자의 것이다.
2026-04-20 17:33:20
-
구윤철 부총리 "환율, 우려보다 안정… 韓 경제에 좋은 사인"
[경제일보]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최근 급등했던 원·달러 환율이 1,460원대까지 안정된 것에 대해 “당초 우려보다 많이 안정됐다”며 한국 경제에 긍정적인 신호라고 평가했다. 17일(현지시간) G20 재무장관 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 중인 구 부총리는 국제유가 하락과 함께 외환시장이 안정을 되찾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구 부총리의 낙관론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의 상선 통행을 전격 허용하면서 나왔다. 이란의 발표 직후, 배럴당 100달러를 훌쩍 넘었던 국제유가는 10% 안팎 급락하며 80~90달러 선으로 내려왔다. 이에 따라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달러의 강세도 한풀 꺾이며 원화 가치가 상승(환율 하락)한 것이다. 구 부총리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경제 기초)을 감안할 때, 시장이 기대하는 수준까지 환율이 갔으면 한다”고 밝혀, 현재의 안정세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이날 오후 예정된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과의 양자 회담에서도 환율 안정화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구 부총리는 이번 G20 회의 기간 동안 국제 사회가 한국 경제에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자산운용사 고위급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에 투자를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한국은 투자 기회가 많은 곳”이라고 전했다. 특히 그는 핵심광물 공급망 재편과 같은 주요 의제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각했다. “매 세션마다 발언하며 실질적인 역할을 많이 했다”고 밝힌 것은, 한국이 중동 리스크와 같은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성장 모멘텀을 유지하고 있음을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어필한 결과로 풀이된다. 시장은 구 부총리의 발언에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중동 정세라는 ‘불확실성’을 주시하고 있다. 미국과 이란 간의 휴전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이 완전히 정상화될 경우, 국제 유가는 하향 안정세를 보일 것이다. 이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춰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가능성을 높이고, 위험자산 선호 심리를 회복시켜 원화 가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휴전이 깨지고 다시 군사적 충돌이 격화될 경우, 유가와 환율은 다시 급등하며 ‘킹달러’ 현상이 재현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 경제는 무역수지 악화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의 공포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 결국 한국 경제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정학적 리스크’와 우리가 가진 ‘경제 기초 체력’ 사이의 줄타기에 달려 있다. 구 부총리가 스콧 베선트 장관과의 회담에서 ‘대미 투자’ 카드를 꺼내 든 것 역시, 한미 동맹을 강화하여 통상 및 금융 분야에서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다. 구 부총리의 이번 발언은 위기 속에서도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견고하다는 자신감을 국제 사회에 피력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단순히 말뿐인 자신감이 아니라, 중동 리스크가 재점화될 경우 정부가 어떤 실효성 있는 ‘컨틴전시 플랜(비상 계획)’을 가동할 수 있을지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뱃길이 열리며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중동의 화약고는 여전히 살아있다. 정부는 이 짧은 안정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와 핵심 산업의 공급망 재편 등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강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26-04-18 13:40:00
-
-
-
-
-
-
-
러트닉 상무장관, 고려아연 美제련소 건설 투자에 "미국의 큰 승리"
[이코노믹데일리]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고려아연이 미국 테네시주에 대규모 제련소를 건설하기로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와 계약한 것에 대해 "미국의 큰 승리"라고 강조했다. 러트닉 장관은 15일(현지시간)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국가 안보를 강화하고 산업 기반을 재건하며 외국 공급망 의존을 끝내는 변혁적인 핵심광물 계약을 체결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오늘 우리는 여기 미국에서 연간 54만 톤(t)의 필수 자재를 생산하는 최첨단 핵심광물 제련소 및 가공 시설을 테네시에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고려아연과 함께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러트닉 장관은 해당 광물이 방어 시스템, 반도체, 인공지능(AI) 퀀텀 컴퓨팅, 자동차, 데이터센터, 첨단 제조업 등 미래에 가장 중요한 기술들을 작동시킨다면서 "갈륨, 게르마늄, 인듐, 안티몬, 구리, 은, 금, 아연과 더 많은 것들이 모두 미국 땅에서 생산돼 전투기와 위성부터 반도체 제조공장과 전력망까지 모든 것을 지원한다"고 언급했다. 러트닉 장관은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며 "2026년부터 미국은 고려아연의 확대된 글로벌 생산에 우선 접근권을 확보해 미국 안보와 제조업을 최우선에 둘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기는 방식"이라며 "여기서 만들고 공급망을 확보하며 훌륭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국을 산업 및 기술 리더로 유지하는 것"이라며 "미국을 위한 또 하나의 거대한 승리를 거둔 트럼프 대통령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덧붙였다. 앞서 고려아연은 한국시간 15일 이사회를 열어 제련소 건설 투자안을 의결했으며, 이후 보도자료에서는 "미 국방부(전쟁부) 및 상무부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에 65만㎡의 대규모 제련소 건설을 위한 공동 투자에 나선다"고 밝혔다. '미국 제련소'(U.S. Smelter)로 이름 붙여진 이번 프로젝트의 예상 투자액은 총 10조9500억원(약 74억3200만 달러) 규모다. 미국 '반도체법'에 따라 미 상무부는 최대 약 3000억원(약 2억1000만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할 예정이다.
2025-12-16 07:56:06
-
제조업 뒤흔드는 '6대 글로벌 규제'...탄소·재생에너지·독성물질 어쩌나
※ '강철부대'는 철강·조선·해운·방산 같은 묵직한 산업 이슈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붉게 달아오른 용광로, 파도를 가르는 조선소, 금속보다 뜨거운 사람들의 땀방울까지. 산업 한복판에서 만나는 이슈를 '강철부대원'처럼 직접 뛰어다니며 생생하게 전해드립니다.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주말, 강철부대와 함께 대한민국 산업의 힘을 느껴보세요! <편집자주> [이코노믹데일리] '6대 글로벌 규제'가 제조업을 뒤흔들고 있다. CBAM(탄소국경조정제도)·IRA(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이니셔티브)·FEOC(외국우려기관 규정)·EU REACH(유럽 화학물질 등록·평가·허가 제도)·TSCA(미국 독성물질관리법) 등의 규제가 2025~2026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되면서 기업 부담이 늘어나게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어서다. 향후 기업들이 규제 관련 '인증·보고'에 시달리게 될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배터리 : IRA·FEOC, '중국산 배제'라는 절대 조건 29일 업계에 따르면 배터리 산업은 IRA와 FEOC 규제가 만드는 구조적 지각변동의 한복판에 있다. IRA는 북미 판매 전기차에 적용되는 세액공제를 중국 등 우려국 배제를 전제로 설계한 법으로,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광물·부품 공급망을 미국·우방국 중심으로 재편하도록 유도하는 성격을 갖는다. FEOC(외국우려기관) 규정은 중국·러시아 등 일부 국가 정부의 지배·통제 아래 있는 기업이 관여한 배터리 부품(2024년 이후)과 핵심광물(2025년 이후)이 들어간 차량을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항으로, 세액공제를 받으려는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중국 의존도를 크게 줄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장치다. 지난 2024년부터 배터리 부품, 2025년부터는 리튬·니켈·코발트 등 핵심광물이 FEOC와 연관될 경우 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양극재·음극재·전해질·바인더 등 세부 소재까지 공급망을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북미 합작공장 증설과 동시에 호주·캐나다·미국 등으로 원료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광물 채굴부터 정제·가공까지 이어지는 전 단계에서 중국 의존도가 여전히 높아 공급망을 재편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 업계의 공통된 고민으로 꼽힌다. 원료 추적 시스템 구축, 북미 인증 대응 인력 운영 등 새로 생긴 규제형 비용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철강 : CBAM 내년 정식 시행…'탄소 할당서'가 새로운 통화 철강업계는 CBAM의 정식 시행을 앞두고 탄소 배출량 산정 체계를 재정비하고 있다. CBAM은 EU 역내로 수입되는 철강·알루미늄 등 고탄소 품목에 대해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배출된 온실가스량을 산정해 EU 배출권거래제(ETS) 가격에 연동한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로, 사실상 '탄소 관세' 역할을 한다. 2026년부터는 수입업자가 제품 1톤당 실제 내재배출량을 국제 기준에 맞춰 신고하고 그에 상응하는 CBAM 인증서를 구매·제출해야 한다. 포스코는 포항·광양 제철소의 탄소 계량 체계를 개편하고 수소환원제철(HyREX) 등 친환경 공정 전환 로드맵을 EU 기준에 맞춰 재정비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전기로 기반 공정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편이지만 슬래그·부생가스 처리 과정에서의 배출량 산정이 새 부담으로 떠오르고 있다. EU ETS 가격이 톤당 80유로(약 11만6000원) 수준일 때 탄소배출량 2톤을 가정한 철강 제품 1톤을 수출하면 약 160유로(약 23만원)의 비용이 발생하는 구조다. 석유·화학 : REACH·TSCA, '전 성분 공개' 시대 석유화학업계는 REACH·TSCA 등 탄소·안전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먼저 REACH는 EU가 모든 화학물질의 등록·평가·허가를 의무화한 제도로 제품에 사용되는 성분의 독성·노출 정보를 상세한 기술문서로 제출해야 하는 강력한 화학 규제다. TSCA는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신규 화학물질의 위해성을 사전 심사하는 제도로 핵심 절차인 PMN(사전제조신고)을 거칠 경우 승인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수 있어 글로벌 제품 출시 일정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 이 같은 규제 강화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화학 기업들도 REACH·TSCA 관련 전담 조직을 보강하거나 물질 데이터베이스(MSDS·독성 DB) 정비 작업을 확대하는 등 내부 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SVHC(고위험성 물질) 리스트 확대와 미국 PMN 심사 강화로 인해 등록·평가에 필요한 문서 준비량이 크게 늘어난 만큼 유럽·미국 규제 대응 인력과 외부 전문기관 활용이 과거보다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전자 : RE100, '탄소 아닌 전력 게임' 전자업종에서는 탄소 절감보다 재생에너지 사용으로 전환하는 흐름이 두드러진다.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겠다는 글로벌 캠페인으로, 국내에서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가입해 목표를 선언했다. 다만 이들 기업 국내 사업장에서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은 여전히 낮아 해외 사업장 대비 'RE100 실질 이행'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지난 2024년 재생에너지 사용량이 1만 GWh를 넘겼지만 전체 전력 대비 재생에너지 비중은 30%대에 머무른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재생에너지 확충 속도가 전력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점도 제약으로 꼽힌다. 대규모 PPA(전력구매계약) 체결을 추진해도 발전 프로젝트 부족, 인허가 지연, 전력망 병목 등으로 실제 조달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글로벌 고객사의 기준 강화도 부담이다. 애플·구글 등 주요 IT 기업들은 협력사 ESG 평가에서 재생에너지 전환율 비중을 높이고 있어 RE100 로드맵 이행 속도가 경쟁력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외부 제약에 더해 산업 자체의 전력 집약적 특성도 국내기업의 RE100 전환 부담을 키우고 있다. 반도체가 초고전력 산업이라는 특성 역시 장애물로 작용한다. 미세공정 전환으로 전력 수요가 꾸준히 증가해 재생에너지 비중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과제가 되고 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규제 대응 속도'가 새 경쟁력 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선은 더 이상 공장에 있지 않다. 규제 문서 한 장이 공장 증설 하나보다 무거워진 시대, '규제의 산업지도'를 읽는 역량이 향후 10년 한국 제조업 경쟁력을 좌우할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제조업의 다음 전선은 공장이 아니라 관청이다. 보고서 한 장이 설비 하나의 가치보다 무거워진 시대. 강철부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이제 '규제의 산업지도'가 펼쳐지고 있다.
2025-11-29 0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