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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만톤 에틸렌이 온다…한국 석유화학 재편의 'X 변수'
[경제일보] S-OIL의 9조원대 '샤힌 프로젝트(Shaheen Project)'가 막바지 공정에 들어갔다. 원유를 정제해 석유제품을 판매하던 정유사가 석유화학 원료까지 직접 생산하는 구조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한 것이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샤힌 프로젝트는 S-OIL이 2022년 11월 이사회에서 최종 투자 결정을 내린 석유화학 2단계 확장 사업이다. 총 투자비는 9조2580억원으로 국내 석유화학 업계 최대 규모다. 완공 시 에틸렌 연산 180만톤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울산·온산 국가산업단지 기존 전체 에틸렌 생산량 176만톤을 웃도는 규모다. 4월 말 기준 EPC(설계·조달·시공) 공정률은 96.9%로, 6월 말 기계적 완공 이후 올해 말 상업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술의 핵심은 TC2C(Thermal Crude to Chemicals)다. 모회사 사우디 아람코가 개발한 원천 기술로, 원유에서 나프타 등 석유화학 원료를 직접 생산한다. 기존 설비 대비 원료 수율이 3~4배 높고, 에너지 강도 지수 기준 업계 상위 25%(1분위) 수준으로 설계됐다. 파일럿 플랜트 단계부터 수년간 검증을 거쳤으며, 샤힌 프로젝트가 세계 최초 상업 적용 사례가 된다. S-OIL이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 배경에는 정유업의 구조적 위기가 있다. 정제마진 변동성이 크고, 전기차 확산으로 장기적인 석유제품 수요 둔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연간 영업이익은 2023년 1조3546억원에서 2024년 4222억원, 2025년 2356억원으로 2년 만에 82% 줄었다. S-OIL 관계자는 "에너지 전환 흐름에 대응하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기 위해 석유화학 사업 확장을 추진해왔다"고 했다. 원가 경쟁력 앞세운 포트폴리오 전환 샤힌 완공 시 전체 매출에서 석유화학 비중은 현재 12%에서 25%로 2배 이상 확대된다. S-OIL은 "'정유사에서 화학사로의 전환'이 아닌 '정유에서 화학으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원가 경쟁력의 핵심은 TC2C와 수직계열화 구조다. 기존 정유시설의 부생가스·중질유 등 저부가가치 원료를 공정에 투입하고, 아람코와의 원유 장기 공급계약을 기반으로 나프타 외부 구매 의존도를 줄인다. 연간 생산 에틸렌 180만톤 가운데 132만톤은 자체 폴리머 설비에서 폴리에틸렌(LLDPE 88만톤·HDPE 44만톤)으로 가공된다. 잔여 약 58만톤과 프로필렌·부타디엔·벤젠 등 기초유분은 울산·온산 산단 내 다운스트림 업체들에 배관으로 공급할 계획이다. 세계 첫 상업 적용에 따른 기술 리스크에 대해 S-OIL 관계자는 "FEED(기본설계)·EPC 단계를 통해 충분한 검증을 마쳤고, 수십 년간 축적한 플랜트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안정적 가동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단기 외부 환경도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올해 1분기 미·이란 충돌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아시아 NCC(납사분해설비) 업체들의 가동률이 최대 20~30%포인트 하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S-OIL은 아람코 계열사 지위를 활용해 정유설비 가동률 90% 수준을 유지했고, 2026년 1분기 연결 영업이익은 1조2311억원으로 반등했다. 경쟁사들이 원료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사이 샤힌 프로젝트의 초기 시장 진입 여건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졌다는 평가다. 공급 과잉·재무 부담은 변수 가장 큰 변수는 업황이다. 중국발 에틸렌 공급 과잉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정부 역시 설비 감축을 중심으로 석유화학 산업 재편을 추진하고 있다. 여수·대산·울산 산단에서는 기업 간 설비 통폐합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 180만톤 신규 설비 진입은 부담 요인이다. 잔여 에틸렌 58만톤의 외부 공급을 두고 대한유화·SK지오센트릭 등과의 공급 경쟁도 불가피하다. 재무 부담도 누적됐다. 부채비율은 2023년 말 138.7%에서 2025년 말 198.8%로 단계적으로 올랐고, 2026년 1분기 말에는 201.7%를 기록했다. 순차입금은 6조660억원, 총차입금은 7조5353억원에 달한다. 아람코가 대여금 6억달러·한도대출 5억3800만달러를 지원하고 있으며, 2023년 산업시설자금대출 1조원, 2025년 샤힌 관련 회사채 6800억원도 조달했다.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수익을 내야 재무 부담 완화가 가능하다. S-OIL 관계자는 "시황의 부침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수십 년을 내다본 투자인 만큼 TC2C 기반 원가 경쟁력으로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샤힌은 2010년대부터 검토해온 투자로, 글로벌 최신 설비와 비교해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울산 지역은 기업별 이해관계가 달라 구조조정 논의가 더디다"며 "S-OIL 입장에서는 아직 가동도 하지 않은 신규 설비를 구조조정 대상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2026-05-26 17: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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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IL, 1분기 영업익 1.2조…정유부문 영업익 1조원 돌파
[경제일보] 중동 전쟁 여파로 인한 글로벌 원유 수급 차질과 원유 가격 급등이 S-OIL의 실적 상승으로 이어졌다. 다만, 이익의 상당 부분이 유가 상승에 따른 재고효과에서 나온 만큼 향후 유가가 하락할 경우 실적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1일 S-OIL은 올해 1분기 매출 8조9427억원, 영업이익 1조2311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매출은 직전 분기 8조7926억원보다 소폭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직전 분기 3719억원에서 세 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 215억원 영업손실을 냈던 것과 비교하면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순이익도 크게 개선됐다. S-OIL의 1분기 순이익은 7210억원으로, 직전 분기 2251억원보다 세 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446억원 순손실을 기록했다. 실적 개선의 핵심은 유가 상승에 따른 재고효과다. S-OIL의 1분기 재고효과는 6434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체 영업이익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 월별로 보면 1월에는 90억원의 재고손실이 발생했지만, 2월 529억원의 이익으로 돌아섰고 3월에는 5995억원까지 확대됐다. 정유사는 원유를 사들인 뒤 일정 기간이 지나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한다. 원유가 이동중에 가격이 오르면 과거에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산 원유가 더 높은 가격의 제품으로 팔리면서 이익이 커지고 이를 래깅효과라고 한다. 반대로 유가가 떨어지면 같은 구조가 손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업 부문별로는 정유부문이 전체 실적을 견인했다. S-OIL의 1분기 정유부문 매출은 7조1013억원, 영업이익은 1조390억원을 기록했다. 전체 영업이익의 대부분이 정유부문에서 발생했다. 석유화학부문도 소폭 흑자로 돌아섰다. 1분기 석유화학부문 매출은 1조1044억원, 영업이익은 255억원을 기록했다. 아로마틱 제품은 중국 다운스트림 설비 가동률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전분기보다 시황이 개선됐다. 다만 3월 이후에는 중동 전쟁에 따른 원료 가격 급등으로 수요가 둔화되며 스프레드가 하락했다. 반면 윤활기유부문은 원가 부담이 실적을 눌렀다. 1분기 윤활기유부문 매출은 7370억원, 영업이익은 1666억원을 기록했다. 수급은 타이트했지만 원재료 가격이 제품 가격보다 더 빠르게 오르면서 스프레드가 축소됐다. 이 영향으로 윤활부문 영업이익은 전분기보다 감소했다. 2분기 전망은 엇갈린다. 정유부문은 고유가로 인한 수요 둔화 우려에도 공급 차질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하면서 견조한 시황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유가가 하락세로 돌아설 경우 1분기 실적을 끌어올렸던 재고효과와 래깅효과가 반대로 손실 요인이 될 수 있다. 석유화학부문은 원료 수급과 가격 변동성이 변수다. 아로마틱은 드라이빙 시즌 진입에 따른 원료 공급 제한과 역내 생산설비 정기보수 등이 시황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윤활부문은 중동 전쟁에 따른 공급 차질로 수급이 타이트해지면서 스프레드 회복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만 원재료 가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얼마나 반영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원유 수급 불확실성 속에서도 S-OIL은 공급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OIL은 모회사인 아람코와의 장기 원유 구매계약, 사우디아라비아 해운·물류기업 바흐리와의 장기 운송계약을 바탕으로 원유 도입을 이어가고 있다. 대규모 석유화학 투자 사업인 샤힌 프로젝트도 막바지 단계에 들어섰다. S-OIL은 "샤힌 프로젝트의 EPC 진행률은 4월 말 기준 96.9%다. 회사는 올해 6월 말 기계적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스팀크래커 주요 설비와 TC2C 가열로 설치는 완료됐고, 고객사로 연결되는 지선 배관 공사도 상반기 중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했다. S-OIL은 올해 말까지 시운전을 거쳐 상업가동 준비를 마칠 계획이다. 샤힌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되면 정유 중심의 수익 구조를 석유화학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중동 전쟁에 따른 유가와 원료 가격 변동성이 실적의 가장 큰 변수로 남아 있다.
2026-05-11 11: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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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에서 탄 것은 배 한 척이 아니다
[경제일보] 지난 4일 저녁, 호르무즈 해협에서 대한민국 선사 HMM이 운항하는 벌크선 ‘나무호’가 폭발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고, 선박은 두바이항으로 예인되며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즉각 이란의 소행이라 단정했고, 우리 외교부는 신중한 태도로 현장 감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긴박한 뉴스들 사이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읽어내야 할 것은 범인의 정체나 파공의 크기가 아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아홉 시간이나 떨어진 저 머나먼 이국의 좁은 바다가 사실은 우리 경제의 심장과 실핏줄로 연결된 ‘대동맥’이라는 서늘한 자각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지도 위에서는 인색하게 그어진 한 줄기 가느다란 물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산업의 눈으로 그곳을 투시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곳은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석유화학 원료와 선박 보험료, 해상 운임과 환율, 그리고 우리네 거실의 전기요금과 시장 바구니 물가가 한데 엉켜 지나가는 거대한 에너지의 통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하루 평균 2000만 배럴의 원유가 이곳을 통과한다. 세계 석유 소비량의 5분의 1이 이 좁은 목구멍을 지나며, 그중 80% 이상의 목적지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제조 국가들이다. ‘호르무즈가 기침을 하면 한국 경제는 독감을 앓는다’는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조 강국’이라는 자부심 아래 눈부신 성장을 일궈왔다.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반도체 공장은 평택과 용인에 위용을 자랑하고, 자동차 공장은 울산과 광주에서 쉼 없이 돌아가며, 거대한 조선소들은 거제와 영암의 바다를 메우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기계 장치들을 돌리는 근원적인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반도체 라인을 움직이는 전기의 연료, 화학 공장의 젖줄인 나프타, 철강 용광로를 달구는 에너지는 모두 저 위태로운 바닷길을 타고 들어온다. 여기서 우리는 뼈아픈 역설을 마주한다. 제조 강국은 필연적으로 ‘수입 강국’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수출품은 화려하게 포장돼 항만을 떠나지만, 한국의 생산 능력은 그보다 훨씬 앞서 항만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원자재의 물결 위에 서 있다. 바닷길이 흔들리면 공장도 흔들린다. HMM 나무호의 화재를 단순히 해운사 한 곳의 불운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약점을 비추는 섬뜩한 조명탄이다. 정부가 이번 사고에 대해 신중을 기하는 것은 타당하다. 안보 위기일수록 국가는 비명보다 사실을 먼저 붙들어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편승해 말을 앞세우면 선박의 화재는 외교적 난제로 번지고, 이는 곧 통상 압력과 에너지 비용 상승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특히 호르무즈 같은 예민한 바다에서는 말 한마디가 보험료가 되고, 그 보험료는 즉시 물류비용과 물가로 전이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해상 리스크를 평소 산업 정책의 본류(Mainstream)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산업 정책을 논할 때 떠올리는 단어들은 대개 세액 공제, 보조금, 규제 완화, 인력 양성 같은 것들이다. 물론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공장이 아무리 훌륭하고 기술이 초격차를 유지한다 한들, 그 공장으로 향하는 항로가 불안하면 모든 공정은 무너진다. 원료는 늦어지고, 에너지는 비싸지며, 제품의 납기는 흔들린다. 진정한 의미의 공급망은 공장 담장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해협과 항만의 안전, 보험 시장의 안정성, 해군력의 투사 범위, 그리고 세련된 외교와 비축 시스템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묶여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한 공급망이라 부를 수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경고하듯 호르무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에너지 병목’이다. 이 숫자의 무게 앞에서 ‘중동 리스크’라는 말은 너무 가볍다. 이것은 정유사나 해운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와 철강이 한배를 탄 공동체의 운명이다. 손자는 손자병법 첫머리에서 “전쟁은 나라의 큰일이며, 생사와 존망이 달린 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오늘날의 산업 국가에 있어 바닷길 또한 그와 같다. 항로는 단순한 물류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생산과 물가와 일자리가 흐르는 혈맥이다. 혈맥이 막히면 장기가 괴사하듯, 항로가 흔들리면 민생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에너지와 핵심 원자재의 비축 체계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비축은 평상시에는 불필요한 비용처럼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국가의 생존 시간을 벌어주는 유일한 장치다. 아울러 특정 지역과 항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조달 다변화 전략을 더 치밀하게 짜야 한다. 원가가 조금 더 들더라도 ‘안전한 대안’을 확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가장 저렴한 비용이다. 마지막으로 해운, 보험, 금융, 국방, 외교를 하나로 묶는 ‘범정부 해상 공급망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산업 정책의 범주에 해군력과 해상 보험 정책이 포함돼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권도 이 사건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정쟁의 소재로 삼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선박이 바다에서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 ‘비상시 대체 항로는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 실질적인 시스템이 없는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 HMM 나무호의 불은 꺼졌지만, 그 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다. 우리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라는 화려한 성적표를 자랑해왔다. 그러나 제조 강국의 진정한 실력은 공장 안의 효율성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위기의 바다를 통과해 원료를 들여오고, 거친 파도를 뚫고 제품을 내보내며, 예기치 못한 비용 충격을 견뎌내는 맷집까지가 진짜 산업 경쟁력이다. 호르무즈에서 탄 것은 선박 한 척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온 ‘안전한 바닷길’이라는 안일한 환상도 함께 그을렸다.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업 정책은 공장 부지를 닦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물과 전기, 사람과 원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오가는 바닷길을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산업 정책의 본질이다. 한국 경제의 목줄이 바다에 걸려 있다면, 그 바다를 지키는 일 또한 엄중한 ‘산업의 이름’으로 명명돼야 마땅하다.
2026-05-07 09: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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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IL, 16년 연속 'DJBIC 월드 기업' 선정
[경제일보] S-OIL이 16년 연속 다우존스 Best-in-Class 지수(DJBIC) ‘월드 기업’에 선정됐다. S-OIL은 지난 30일 개최된 ‘2025년 DJBIC’에서 ‘월드(World)’ 기업으로 이름을 올리며 아시아 지역 정유사로는 최초로 16년 연속 DJBIC 월드 기업에 선정됐다고 6일 밝혔다.. DJBIC는 글로벌 금융정보 제공기관 S&P Global이 매년 전 세계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지속가능성을 평가하는 지수다. 지배구조, 공급망 관리, 환경 성과, 인적자원 개발 등 경제·사회·환경 분야를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기존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지수(DJSI)에서 이름이 바뀐 지표다. 투명한 경영 방침과 ESG 경영 체계가 선정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ESG 리스크 관리, 이해관계자 소통, 탄소경영 고도화 등에서 성과를 인정받았다. S-OIL은 ESG 경영 강화를 위해 2021년부터 최고경영층과 임원으로 구성된 ESG추진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2023년부터는 이사회 산하에 ESG위원회를 설치해 ESG 관련 전략과 정책 방향을 점검하고 있다. S-OIL은 기후변화 대응, 안전 관리, 환경오염물질 관리, 임직원 역량 강화, 사회공헌 활동 확대 등을 지속가능경영의 주요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올해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인 샤힌 프로젝트도 지속가능경영 역량 강화에 기여할 전망이다. 해당 설비는 기존 설비 대비 에너지 효율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S-OIL 관계자는 “글로벌 수준의 경영 투명성과 우수한 ESG 경영 체계를 바탕으로, ESG리스크 관리, 이해관계자 소통, 탄소경영 고도화 분야에서 모범적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16년 연속 DJBIC 월드 기업에 선정되었다”며 “당사는 장기적인 지속가능경영 로드맵을 수립하고 기후변화 대응, 안전 및 환경오염물질 관리, 임직원 역량 강화와 사회공헌 활동 확대 등 핵심과제를 추진해 회사의 ESG경영 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당사는 금년 중 완공을 목표로 샤힌 프로젝트의 건설을 진행 중이며, 해당 설비는 타사 설비 대비 우수한 에너지 효율을 바탕으로 회사의 지속가능경영 역량을 한층 강화시킬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2026-05-06 11: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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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거울, 카네기와 록펠러에 길을 묻다
[경제일보] 역사의 변곡점에서 시대정신은 언제나 두 거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한 명은 시대의 단단한 뼈대를 세우는 자이며 다른 한 명은 그 뼈마디 사이사이에 뜨거운 피를 돌게 하는 자다. 19세기 후반, 증기기관의 포효와 함께 미국이라는 미완의 대륙이 꿈틀거릴 때 역사는 두 사내를 선택했다. 스코틀랜드의 잿빛 가난을 짊어지고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 소년, 앤드류 카네기. 그리고 불우한 유년의 상처를 신앙과 회계장부로 봉합하며 자라난 청년, 존 D. 록펠러. 오늘 우리는 인공지능(AI)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해일 앞에 서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이 거대한 파도는 이제 인류 문명의 모든 해안선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 현기증 나는 전환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화려한 기술의 신기루에 취해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역사의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 150년 전 철과 석유라는 문명의 두 기둥으로 세상을 재편했던 카네기와 록펠러의 삶은, 안개 자욱한 AI 시대의 본질과 승리 법칙을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투영한다. 이것은 낡은 위인전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생존에 관한 준엄한 질문이다. ◆ 미국의 뼈대를 벼려낸 자, 앤드류 카네기 앤드류 카네기의 삶은 아메리칸드림의 원형 그 자체다. 1848년, 13살의 소년은 증기선 뒷간에 숨어 신대륙에 첫발을 디뎠다. 손에 쥔 것이라곤 희망이라는 이름의 누더기뿐이었다. 방직 공장의 실패 감는 소년에서 전보 배달부, 철도 회사 직원을 거치며 그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속성을 뼈에 새겼다. 그가 본 것은 멈추지 않는 미국의 팽창 에너지였다. 서부로, 서부로 뻗어 나가는 철도,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는 마천루, 대륙의 혈맥을 잇는 거대한 교량. 카네기는 이 모든 야망의 근간에 무엇이 꿈틀대고 있는지 보았다. 바로 ‘철(鐵)’이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한 통찰이 번뜩였다. "인프라의 기반을 장악하는 자가 시대를 지배한다." 그는 금광을 찾아 헤매는 투기꾼이 아니었다. 금광으로 가는 길을 깔고 그 길 위를 달릴 기관차를 만들고 금을 캐는 데 쓸 곡괭이를 만드는 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에게 철강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의 미래를 떠받칠 단단한 골격이었다. 그의 철강 제국은 광적인 집념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성채였다. 결정적 계기는 영국에서 목격한 ‘베세머 공정’의 혁명적 잠재력을 꿰뚫어 본 순간 찾아왔다. 펄펄 끓는 쇳물에 공기를 불어넣어 불순물을 태워버리는 이 신기술은 연금술에 가까웠다. 2주가 꼬박 걸리던 강철 생산 시간은 단 15분으로 줄었고 원가는 폭락했다. 남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때 그는 전 재산을 걸고 이 신기술의 심장을 미국으로 가져왔다. 기술의 급소를 정확히 찌르는 자만이 경쟁의 규칙을 파괴하고 새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는 마치 오늘날 AI 기업들이 최신 반도체 공정과 아키텍처에 명운을 거는 모습과 정확히 포개진다. 그의 제국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스스로 호흡하는 유기체였다. 그는 ‘수직 통합’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만의 생태계를 완성했다. 철강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미네소타의 철광석 광산에서부터 펜실베이니아의 석탄 광산, 원료를 실어 나르는 오대호의 증기선과 철도 회사까지. 원료 채굴에서 제품 생산, 운송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자신의 제국 안에 편입시켰다. 외부 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누구도 원가로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을 구축한 것이다. 외부의 기술이나 자원에 의존하는 순간 제국의 고삐를 놓치게 된다는 냉엄한 현실을 그는 간파했다. 이 거대한 제국을 움직이는 피는 ‘원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정교한 실시간 원가 회계 시스템을 도입했다. 매일 아침 그의 책상에는 각 공정에서 발생한 비용이 1센트 단위까지 보고되었다. “이익은 알아서 따라오게 하고 비용을 감시하라”는 그의 말은 카네기 제국의 제1계명이었다. 이 서슬 퍼런 숫자에 대한 집착이 그의 용광로에서 나온 쇠를 세계에서 가장 단단하고 값싼 강철로 만들었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지탱하는 우아하고도 강인한 강철 케이블, 미국 대륙을 동서로 관통한 수만 킬로미터의 철도 레일,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창조한 마천루의 H빔. 그 모든 것이 카네기의 용광로에서 벼려낸 미국의 뼈대였다. 그러나 그는 부를 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다”라는 그의 신념은 더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자산의 90%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여 미국 전역에 1689개의 도서관을 짓고 카네기 홀을 건립했다. 그는 물리적 인프라를 넘어 지식과 문화라는 정신의 인프라까지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 미국의 혈관을 장악한 자, 존 D. 록펠러 카네기가 미국의 단단한 골격을 만들었다면 록펠러는 그 거대한 몸에 검고 뜨거운 피를 돌게 한 인물이다. 그의 무기는 땅속에서 솟아난 검은 황금, 바로 ‘석유’였다. 그의 유년기는 카네기보다 더 어둡고 축축했다. 떠돌이 약장수였던 아버지 밑에서 그는 일찍부터 돈의 비정함과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두 가지였다. 모든 수입과 지출을 1페니까지 기록하는 회계장부의 철저함과 수입의 10분의 1을 반드시 헌금하는 신앙의 경건함. 이 두 원칙이 훗날 그의 무자비한 사업 방식과 숭고한 자선 활동이라는 모순적인 삶의 두 축이 된다. 록펠러의 천재성은 남들이 ‘기름’이라는 노다지에 홀려 땅을 팔 때 그는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보았다는 점이다. 19세기 중반 펜실베이니아에 석유가 터져 나오자 수많은 사람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시추공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록펠러는 그 도박판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석유 채굴은 예측 불가능한 행운의 게임이지만 일단 채굴된 원유를 정제하고 운송하여 판매하는 것은 ‘반드시 돈이 되는 사업’임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석유 산업의 혈관, 즉 정제와 유통망을 장악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무기는 회계장부였다. 그는 카네기를 능가하는 비용 통제의 화신이었다. 원유 1갤런을 운반하는 데 쓰는 나무통 가격을 2.5달러에서 1달러 미만으로 낮추기 위해 직접 통 제조 공장을 세웠다. 통을 밀봉하는 데 쓰던 40개의 땜납을 39개로 줄여보라고 지시한 일화는 그의 경영 철학을 상징한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 작은 차이들이 모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가격 경쟁력의 성벽을 쌓았다. 그는 이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휘둘렀다. 바로 ‘유통망 장악’이었다. 당시 유일한 운송 수단이던 철도 회사와 비밀리에 리베이트 계약을 맺어 경쟁사보다 훨씬 싼 값에 석유를 운송했다. 심지어 경쟁사가 지불하는 운송비의 일부까지 자신에게 흘러 들어오도록 설계했다. 국가의 대동맥과도 같은 철도망을 자신의 사적인 무기로 만든 것이다. 경쟁사들은 이유도 모른 채 피를 말리며 고사해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합류가 아니면 파산’이라는 냉혹한 흡수 전략으로 시장을 평정했다.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과 유통망을 무기로 그는 경쟁 정유사들을 차례로 무릎 꿇렸다. 그는 경쟁사의 장부를 샅샅이 보여주며 스탠더드 오일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거부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한 가격 전쟁을 일으켜 파산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무질서한 경쟁을 ‘죄악’으로 여겼고 독점을 통한 ‘질서’와 ‘안정’이야말로 산업의 발전이라 믿었다. 결국 그는 미국 정유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완성했다. 그의 석유는 등유가 되어 인류의 밤을 밝혔고 가솔린이 되어 자동차 시대를 열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현대 산업을 움직이는 운영 체제(OS) 그 자체였다. 그는 비정한 독점가라는 평생의 멍에를 짊어졌지만 훗날 록펠러 재단을 통해 의학과 교육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하며 부의 의미를 다시 썼다. ◆ AI 시대, 변하지 않는 법칙의 귀환 역사의 거울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카네기의 철과 록펠러의 석유. 이 둘은 2차 산업혁명 시대의 물리적, 에너지적 기반이었다. 오늘날 AI 시대의 철과 석유는 무엇인가. 카네기의 철은 단연코 AI 모델의 두뇌인 ‘반도체’다. 록펠러의 석유는 그 반도체를 깨우는 ‘전력’과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클라우드 인프라’다. 놀랍게도 오늘날 AI 패권 전쟁의 승자들은 150년 전 두 거인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AI 반도체라는 새로운 ‘철’의 생산 방식을 독점하고 있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는 클라우드 서비스라는 ‘석유 유통망’을 장악하고 전 세계 AI 기업들로부터 막대한 ‘통행세’를 거두고 있다. 이들 모두 반도체 설계부터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서비스까지 모든 것을 장악하는 수직 통합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제국을 견고히 쌓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지각 변동 속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뼈대를 만드는 카네기가 될 것인가, 그 뼈대 속을 흐르는 혈액을 공급하는 록펠러가 될 것인가. 혹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인프라 위에서 살아가는 단순한 소비자에 머무를 것인가. 카네기와 록펠러는 웅변한다. 시대의 본질을 꿰뚫고 그 기반이 되는 인프라를 장악해야만 미래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화려한 AI 모델을 가져다 쓰는 수준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만의 반도체를, 우리만의 데이터센터를, 우리만의 AI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기술의 급소를 찌르는 혁신, 외부 의존도를 끊는 수직적 장악력, 상대를 질식시키는 원가 통제. 150년 묵은 이 법칙들은 AI 시대에 더욱 서슬 퍼렇게 귀환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그 운율은 반복된다. 철과 석유의 시대가 남긴 거대한 메아리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준엄한 경고이자 다시없을 기회다. 제2의 카네기, 제2의 록펠러가 될 수 있는 창은 아직 열려 있다. 그 창을 향해 과감히 몸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그저 창밖의 풍경이 변하는 것을 구경만 할 것인가. 선택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2026-04-27 17: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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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석유 최고가격제',세금 쏟아붓는'보편적 혜택' 이대로 좋은가
[경제일보] 정부가 제4차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에 들어갔다. 지난달 중동전쟁 발발 이후 휘몰아친 고유가 파고 속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대로 묶어둔 것은 분명 정책적 성과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대로 최고가격제가 물가를 최대 0.8%포인트 낮추는 ‘방파제’ 역할을 했고, 덕분에 서민들의 급한 불을 끈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행 한 달을 넘기며 4차 고시에 이른 지금, 우리는 이 제도가 품고 있는 위험한 독소와 불합리한 구조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이 정책의 혜택이 과연 누구에게 가고 있느냐는 형평성의 문제다. 현재의 석유 최고가격제는 소득 수준이나 사용 목적과 관계없이 기름을 넣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할인 혜택을 주는 '보편적 복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문제는 그 비용을 고스란히 국민의 혈세로 메우고 있다는 점이다. 1차와 2차 시행 단 4주 만에 정유사 손실 보전액으로 나간 돈이 벌써 1조 원을 넘어섰다. 정부가 확보한 4조 2,000억 원의 예산은 국제 유가 상승폭에 비추어 볼 때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것이 자명하다. 과연 고급 승용차를 몰며 여유로운 소비를 즐기는 계층의 기름값까지 국민 세금으로 보조해 주는 것이 정의로운가. 정작 유가 폭등에 생계를 위협받는 농민, 배달 기사, 화물차 운전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재원이 고소득층의 연료비 절감으로 새어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득 하위 20% 가구의 에너지 지출 비중이 상위 20%보다 3배 이상 높은 현실에서, 타겟팅 되지 않은 보편적 가격 통제는 자원 배분의 왜곡을 심화시킬 뿐이다. 또한, 인위적인 가격 억제는 시장의 ‘가격 신호’를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 소비를 줄이는 것이 경제의 상식이다. 그러나 최고가격제라는 가림막에 가려진 소비자들은 에너지 절약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조차 가격 왜곡에 따른 부작용과 재정 부담을 우려한 것은 이 정책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방증이다. 생산자물가는 30% 넘게 폭등했는데 소비자물가만 2%대에 머무는 이 기형적인 ‘착시 현상’은 결국 언젠가 누군가가 치러야 할 거대한 청구서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제 '긴급 처방'의 단계를 넘어 '정밀 타격'의 단계로 정책 기조를 수정해야 한다. 4차 시행 기간 중이라도 제도의 틀을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 가격 누르기에서 벗어나, 생계형 종사자와 취약계층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에너지 바우처나 유류비 환급 방안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 세금으로 유가를 통제하는 것은 고통의 시간을 잠시 늦추는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안보든 경제든 '정치적 편의주의'가 상식을 앞설 때 시스템은 망가진다. 물가 수치 하나를 방어하기 위해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해치고 형평성을 훼손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4차 고시 이후의 출구 전략을 서둘러 마련하라. 서민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명분이 고소득층의 혜택으로 변질되고 세금 낭비로 이어지는 지금의 구조를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시장 원리를 존중하되 약자를 두텁게 보호하는, 보다 정교하고 정의로운 에너지 정책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2026-04-23 1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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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너머의 시대, 미디어의 새 판 (上)
대한민국은 은(銀)이 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광산에서 캐내는 은의 양은 연간 수 킬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 주요 은 수출국 중 하나다. 연간 약 2,000톤의 은을 생산해 대부분을 해외로 내보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답은 고려아연이라는 기업에 있다. 이 회사는 아연과 납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은을 추출한다. 원광석을 수입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제련 기술로 가공해, 전혀 다른 금속을 만들어 파는 것이다. 은 광산 하나 없이 은 수출국이 된 역설이다. 석유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다. 전량을 수입한다. 그러나 정제유 수출은 반도체, 자동차에 이어 국가 수출 상위권을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세계 최대 수준의 단일 정제 능력을 보유한 정유산업 덕분이다. 원자재를 사다가, 더 정교하게 만들어, 더 비싸게 판다. 이 패턴은 산업에만 있지 않다. 재가공, 문화가 된 생존 전략 K팝을 생각해보자. 한국의 전통 음악에서 출발한 장르가 아니다. 1990년대 미국의 R&B, 팝, 힙합이 원소스였다. 그런데 지금 세계 시장에서 통용되는 K팝은 그것과 전혀 다른 무언가다. 체계적인 트레이닝 시스템, 극도로 완성된 퍼포먼스, 독자적인 팬덤 문화가 더해지면서 원본을 뛰어넘는 새로운 상품이 탄생했다. 치킨도 같은 이야기다. 프라이드치킨은 미국 남부 음식이다. 그러나 양념치킨, 간장치킨, 파닭으로 변주된 한국의 치킨은 지금 전 세계에서 독자적인 음식 문화로 인정받는다. 김밥의 형태가 일본 노리마키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오늘날 누가 기억하는가. 재가공의 완성도가 원본과의 관계를 지워버린 것이다. 종교는 더 흥미로운 사례다. 기독교는 서양 선교사가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메가처치, 새벽기도, 열정적 전도 문화를 만들어내며 서양의 원형과도, 다른 아시아 국가의 형태와도 다른 독자적 종교 문화로 진화했다. 불교 역시 인도에서 출발해 중국을 거쳐 한국에 닿는 동안 한국만의 선불교 문화로 재탄생했다. 우연이 아니다 — 지정학이 만든 DNA 이 패턴들을 하나의 도식으로 묶을 수 있다. 외부의 원소스를 받아들이고, 고도의 가공을 거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보낸다. 은도, 석유도, 음악도, 음식도, 종교도 같은 구조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가. 재가공은 어느 나라도 한다. 그런데 왜 한국의 재가공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게 됐는가. 답은 지정학에 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일본, 그리고 근현대에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생존해왔다. 자원도 없고, 거대한 내수시장도 없으며, 독자적인 기술 원천을 개발할 여유도 부족했다. 재가공의 퀄리티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절박함이 완성도를 만든 것이다. 고려아연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제련 기술을 보유하게 된 것도, 한국 정유사가 세계 최대의 단일 정제 능력을 갖추게 된 것도, K팝이 팝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에서 통하게 된 것도 모두 같은 논리의 반복이다. 그런데, 지금 이 능력이 막히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재가공이라는 생존 전략이 새로운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 물질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콘텐츠와 문화의 영역에서는 점점 좁아지는 통로를 마주하고 있다. 저작권이다. 과거에는 미국 음악을 듣고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치킨 레시피를 변형해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데 누구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저작권 체계는 갈수록 촘촘해지고 있다. 콘텐츠의 재가공은 이제 법적 리스크와 함께 시작된다. 수천 년을 이어온 한국의 재가공 DNA가 20세기에 설계된 법적 프레임 앞에서 멈춰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 프레임 자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텍스트 너머의 시대, 미디어의 새 판 (下)에서 계속
2026-04-18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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