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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正名)' 잃은 노란봉투법, 갈등의 불씨인가 상생의 토대인가
[경제일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입법 취지는 분명하다. 하청·비정규 노동자의 교섭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는 취지 못지않게 ‘작동 방식’이 중요하다. 최근 사기업 현장에서 하청노조와의 첫 분리교섭이 결정되면서, 법이 의도하지 않았던 혼란이 현실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용자와 노동자 모두 “도대체 누구와 교섭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사용자 개념의 확장과 교섭 구조의 불명확성에 있다. 원청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교섭 당사자로 지목될 경우, 법적 책임과 협상 의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는 곧 복수의 교섭 창구, 중첩된 책임, 끝나지 않는 협상의 가능성을 낳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경영 예측 가능성이 크게 훼손되고, 노동조합 역시 협상의 상대가 분산되면서 실질적 성과를 내기 어려워질 수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고 했다. 지금의 혼란은 바로 이 ‘정명(正名)’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누가 사용자이며, 누가 교섭 당사자인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가 먼저 달려나가니, 현장은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법 적용의 경계가 지나치게 넓고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실질적 지배력’이라는 개념은 해석의 여지가 크다. 이는 결국 개별 사업장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그 자체로 법적 불확실성을 키운다. 『도덕경』은 “법이 많을수록 도적이 많아진다(法令滋彰 盜賊多有)”고 경고한다. 규제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혼란과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법의 양이 아니라 법의 명확성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사용자 범위와 교섭 책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원청의 책임을 인정하되, 그 범위를 계약 구조와 지배력의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구분하는 정교한 기준이 필요하다. 둘째,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거나 최소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복수 교섭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조정하는 중립적 기구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셋째, 분쟁 해결 시스템을 선제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는 교섭이 곧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노동위원회 등 공적 조정기구의 전문성과 권한을 확대해, 초기 단계에서 갈등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넷째, 기업과 노동계 모두 책임 있는 태도가 요구된다. 법의 빈틈을 이용해 극단으로 치닫는 전략은 결국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맹자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고 했다. 노동권 보호라는 명분이 지나치면 시장 질서를 해치고, 반대로 기업의 효율성만 강조하면 노동의 존엄이 훼손된다. 지금의 노란봉투법 논란은 이 균형의 문제를 다시 묻고 있다. 앞으로의 방향은 분명하다. 노동권 보호와 산업 경쟁력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설계해야 할 ‘이중의 목표’다. 법은 이상을 선언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입법 이후의 ‘정교한 보완’이 필수적이다. 시행령과 가이드라인을 통해 해석의 폭을 줄이고, 이해당사자 간의 사회적 합의를 지속적으로 축적해 나가야 한다. 결국 제도의 성패는 균형과 신뢰에 달려 있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의 문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노란봉투법이 갈등의 불씨가 아니라 상생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법은 분쟁을 키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 단순한 상식 말이다.
2026-04-11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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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타, 1분기 수주 118억…'AI 경량화' 기술 공급하며 '퀀텀 점프'
[경제일보] AI 경량화 기술 기업 노타(대표 채명수)가 2026년 1분기 수주액 118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111%라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번 성과는 노타의 AI 모델 최적화 플랫폼 ‘넷츠프레소(NetsPresso®)’가 삼성전자, Arm, 퓨리오사AI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까다로운 검증을 통과하며 기술 공급을 본격화한 결과다. 이는 AI 산업의 무게중심이 거대 모델 개발에서 ‘효율적인 운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생성형 AI 모델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이를 구동하는 데 필요한 천문학적인 연산 비용과 전력 소모가 산업계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특히 스마트폰이나 자율주행차와 같은 ‘온디바이스 AI’ 환경에서는 거대한 모델을 그대로 탑재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타의 ‘AI 경량화’ 기술이 빛을 발한다. 노타의 넷츠프레소 플랫폼은 AI 모델의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여 저사양의 엣지 디바이스에서도 AI가 원활하게 구동되도록 돕는다. 이는 막대한 데이터센터 구축 비용을 절감하고 AI 서비스의 응답 속도를 높이는 핵심 기술이다. 노타의 터보퀀트(TurboQuant) 기술이 시장의 주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추론 효율과 메모리 최적화에 대한 시장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노타의 기술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노타의 기술적 가치는 삼성전자, Arm, 퓨리오사AI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과의 연이은 수주 계약으로 증명됐다. 삼성전자와의 계약을 통해 온디바이스 AI 분야의 기술력을 입증한 데 이어 Arm과의 파트너십은 노타가 글로벌 AI 생태계의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Arm은 현재 모바일을 넘어 데이터센터, 자동차, 로보틱스까지 AI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노타의 최적화 기술은 Arm 기반의 다양한 컴퓨팅 환경에서 하드웨어 성능을 극대화하는 ‘소프트웨어 계층’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노타가 단순한 기술 공급사를 넘어 Arm 생태계에 참여하는 모든 개발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솔루션 부문의 성장도 괄목할 만하다. 비전언어모델(VLM) 기반의 영상 분석 솔루션 ‘노타 비전 에이전트(NVA)’는 단순히 객체를 인식하는 수준을 넘어 추론을 통해 영상의 맥락과 상황을 판단한다. 이를 통해 실시간 상황 요약 및 보고까지 가능해져 조선, ITS, 제조 등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활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부품 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고객군에서 기술 검증 이후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증가하는 것은 NVA의 기술적 완성도와 현장 적용성이 이미 시장의 신뢰를 얻었음을 보여준다. 향후 노타는 플랫폼과 솔루션이라는 두 날개를 통해 성장을 가속할 전망이다. 플랫폼 부문에서는 반도체 및 컴퓨팅 환경 전반으로 협력 범위를 넓히고 솔루션 부문에서는 산업별 맞춤형 공급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할 것이다. 채명수 대표는 “확보한 수주를 고객 성과로 연결하고 AI 최적화 시장에서의 기술 리더십을 공고히 하겠다”고 밝혔다. AI 모델의 ‘다이어트’ 기술이 기업의 생존을 결정짓는 시대에, 노타의 행보는 K-소프트웨어 기업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될 것이다. 한편 AI의 미래는 ‘얼마나 더 큰 모델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노타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노타가 AI 반도체 시장의 ‘숨은 강자’를 넘어 글로벌 AI 최적화 시장의 표준을 제시하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2026-04-07 10: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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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도 '소프트웨어' 경쟁…LG엔솔, SDV 시장 진입
[경제일보] 전기차 산업의 경쟁 축이 배터리 성능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기반 서비스로 이동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 소프트웨어를 앞세워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차량용 소프트웨어 플랫폼 'SDVerse'에 배터리 제조사로는 처음으로 합류했다. 완성차, 부품사, 소프트웨어 기업이 참여하는 개방형 플랫폼을 통해 배터리 관련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겠다는 전략이다. SDVerse는 General Motors, Magna International, Wipro 등이 참여한 차량용 소프트웨어 거래 플랫폼으로 자동차 산업의 소프트웨어 전환을 상징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번 참여는 배터리 기업의 역할 변화와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다. 그동안 배터리 업체는 셀과 팩 등 하드웨어 공급에 집중해 왔지만 최근에는 배터리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영역으로 확장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SDV 환경에서는 차량 성능과 안전성, 수명 관리가 소프트웨어에 의해 좌우되면서 배터리 역시 '데이터 기반 자산'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배터리 상태 진단, 수명 예측, 충전 최적화 등은 차량 운영 효율과 직결되는 핵심 기능으로 자리 잡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러한 흐름에 맞춰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을 고도화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공개했다. 배터리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수명을 예측하는 플랫폼부터 안전 진단, 사용자 맞춤 관리 기능까지 포함됐다. 이는 단순 제품 판매를 넘어 서비스 기반 수익 모델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배터리 데이터를 활용한 진단·관리 서비스는 차량 판매 이후에도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전기차 시장 경쟁이 하드웨어 성능 중심에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경쟁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SDV 확산으로 차량 기능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소프트웨어 역량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배터리 기업 역시 단순 공급자를 넘어 차량 성능과 사용자 경험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하고 있다. 배터리 데이터는 차량 운영 전반을 최적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소프트웨어 경쟁은 완성차 업체와 IT 기업, 부품사 등 다양한 플레이어가 동시에 진입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경쟁 강도도 높아질 전망이다. 완성차 업체는 차량 데이터를 직접 확보하고 소프트웨어를 내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글로벌 IT 기업들은 운영체제(OS)와 플랫폼을 기반으로 생태계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프트웨어 표준과 플랫폼을 선점한 기업이 데이터 축적과 서비스 확장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단순 기능 경쟁을 넘어 차량 운영체제, 데이터 플랫폼, 서비스 연계까지 아우르는 '생태계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플랫폼 주도권을 확보한 기업은 완성차와 부품사, 개발자를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수행하며 장기적인 수익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반면 플랫폼 경쟁에서 뒤처질 경우 하드웨어 공급에 머무르며 부가가치 창출이 제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DV 전환이 가속화되는 만큼 배터리 소프트웨어 시장 역시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 하드웨어 중심 사업 모델에서 벗어나 데이터와 서비스를 결합한 새로운 수익 구조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2026-04-03 10: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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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뉴욕서 '볼더' 공개…美 픽업 시장 진입 신호탄
[경제일보] 현대자동차가 북미 시장에서 제품 포트폴리오 확장에 나섰다. 전동화 중심 전략에 더해 바디 온 프레임 기반 픽업트럭 시장 진입을 공식화하며 수익 구조를 다변화하는 시도로 풀이된다. 현대차는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제이콥 재비츠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2026 뉴욕 국제 오토쇼'에서 '볼더(Boulder)' 콘셉트를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해당 모델은 향후 출시를 염두에 둔 중형 픽업트럭의 디자인과 설계 방향을 반영한 콘셉트카로, 현대차 미국 디자인센터 주도로 개발됐다. 현대차는 이번 모델을 통해 바디 온 프레임 구조를 전면에 내세웠다. 기존 모노코크 기반 SUV 중심 라인업에서 벗어나 적재·견인 성능이 중요한 북미 픽업 시장으로 확장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직선 위주의 차체 비례와 높은 지상고, 37인치 머드 터레인 타이어, 견인 고리, 양방향 개폐 테일게이트 등 오프로드 환경에 특화된 요소가 적용됐다. 접근각·이탈각·브레이크오버각 확보와 도하 성능을 고려한 설계도 포함됐다. 실시간 오프로드 가이던스 시스템을 통해 주행 상황을 보조하는 기능을 구현했으며, 야간 식별성을 높이기 위한 반사 소재도 주요 외장 부위에 적용됐다. 적재 및 작업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전동식 하강 테일게이트 윈도우와 코치도어 구조도 반영됐다. 실내는 야외 활동과 작업 환경을 고려한 구성으로 설계됐다. 접이식 트레이 테이블 등 다목적 활용이 가능한 구조를 적용했고, 조작 편의성을 위해 물리 버튼과 노브를 유지했다. 내구성이 요구되는 부위에는 마모 저항이 높은 소재를 적용해 실사용 환경에 대응했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은 바디 온 프레임 차량이 미국 시장에서 갖는 상징성을 언급하며 중형 픽업 시장에서 경쟁을 본격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랜디 파커 북미 권역본부 CEO도 미국 내 판매 증가 흐름을 언급하며 현지 시장 확대 전략을 이어가겠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북미 시장에서 제품군 확대와 함께 전동화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오는 2030년까지 하이브리드 차종을 18종으로 확대하고, 내년에는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를 추가할 계획이다. 전기차 수요 변동성에 대응하는 동시에 수익성 방어를 위한 포트폴리오 조정으로 해석된다. 볼더 공개는 현대차가 그동안 비중이 낮았던 픽업 세그먼트 진입을 공식화한 첫 사례다. 기존에는 크로스오버 형태의 '싼타크루즈'를 통해 일부 수요를 대응해왔지만 정통 바디 온 프레임 픽업은 라인업에 포함되지 않았다. 북미 시장에서 픽업트럭은 높은 평균 판매 단가와 옵션 확장성이 결합된 핵심 수익원으로 평가된다. 포드, GM, 토요타 등 주요 업체가 강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현대차가 해당 시장에 진입할 경우 기존 SUV·전동화 중심 구조에서 수익 기반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아울러 현대차는 뉴욕 오토쇼 전시에서 전기차, 하이브리드, 오프로더, 고성능 차량을 함께 배치하며 파워트레인과 차급을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강조했다. 아이오닉 시리즈와 하이브리드 모델, XRT 오프로드 라인업, N 브랜드 차량을 동시에 전시해 시장 대응 범위를 넓히는 전략을 제시했다.
2026-04-02 11: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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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은 뒷전?" 보령, 우주에 쏟아부은 1000억…주주들은 '한숨'
[경제일보] 보령(대표 김정균)이 우주 사업에 1000억원 넘는 돈을 쏟아붓는 사이, 정작 제약사 본연의 경쟁력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 주주들의 지분은 희석되고 배당은 쪼그라들었다. 투자한 기업에서는 대규모 감원 소식까지 전해졌다. 오너 3세 김정균 보령 대표가 진두지휘하는 '우주 베팅'이 회사의 미래를 밝힐 성장 로켓이 될지, 아니면 주주들의 돈을 우주로 날려보내는 재무 블랙홀이 될지를 두고 시장의 우려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2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보령은 2022년 이후 미국 민간 우주기업 액시엄 스페이스(Axiom Space)에 두 차례에 걸쳐 총 6000만 달러(약 800억원)를 투자해 지분 2.7%를 확보했다. 액시엄 스페이스는 국제우주정거장(ISS)이 2030년 퇴역한 이후를 겨냥해 민간 우주정거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인 회사다. 보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24년 액시엄 스페이스와 합작법인 '브랙스스페이스'를 설립했고, 달 착륙선을 개발하는 인튜이티브 머신스(Intuitive Machines)에도 250억원을 추가로 밀어넣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우주 관련 투자 건수는 총 11건, 누적 금액은 1000억원을 훌쩍 넘는다. 이 모든 투자를 진두지휘한 인물이 오너 3세인 김정균 대표다. 창업주 김승호 회장의 외손자이자 김은선 보령홀딩스 회장의 아들인 김 대표는 2019년 우주센터를 방문한 경험을 계기로 '우주 헬스케어'라는 비전에 꽂혔다고 알려져 있다. 2022년 취임 직후 사명에서 '제약'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액시엄 스페이스 이사회에 직접 이름을 올렸다. 1000억원이 넘는 회사 자금을 우주에 베팅하는 이 결단이 사실상 김 대표 한 사람의 판단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시장의 시선이 따갑다. 그런데 성적표가 초라하다. 2025년 상반기 말 기준, 보령이 보유한 액시엄 스페이스 주식의 취득원가는 약 800억원이지만 공정가치는 713억원에 불과하다. 누적 평가손실만 87억원에 달한다. 비상장 기업인 만큼 향후 기업가치가 더 흔들릴 경우 추가 손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합작법인의 실적은 더 참담하다. 10억원을 출자해 설립한 브랙스스페이스는 2024년 한 해 동안 1307만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10억을 넣어 1년에 1000만원 남짓을 번 셈으로, 업계에서는 본격적인 사업 성과라기보다 연구·기획 단계에서 발생한 일회성 수익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투자 대상 기업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포브스 등 외신에 따르면 액시엄 스페이스는 자금난으로 직원 100여 명을 해고하고 임금도 20% 삭감했으며, 우주정거장 개발 관련 핵심 연구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보령이 800억원을 믿고 맡긴 파트너 기업이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경영진 교체도 이어지면서 투자 회수 시점과 수익성에 대한 가시성은 더욱 흐릿해졌다. 수익 모델에 대한 물음도 여전히 답이 없다. 우주 사업의 수익 경로를 묻는 시장의 질문에 김 대표는 "투자나 인수합병(M&A) 기회를 검토 중"이라며 "성과를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사업 진출 초기에는 "언제 이익이 날지, 이익 규모가 얼마나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믿고 기다려주면 만들어내겠다"고도 했다. 수년이 흐른 지금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구체적인 답은 없다. 글로벌 빅파마들이 연간 수십조원을 연구개발에 투입하면서 우주 연구를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검토하는 것과 달리, 보령의 우주 투자는 기업 전략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화이자나 머크 같은 다국적 제약사들에게 우주 연구는 수십 개의 파이프라인 중 하나일 뿐이지만, 보령에게 우주는 사실상 미래 전략의 핵심 축이 됐다. 매출 규모나 연구개발 역량에서 비교 자체가 어려운 국내 중견 제약사가 우주 헬스케어 시장의 '선도자'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주주들의 부담은 이미 현실이 됐다. 보령은 지난해 11월 김 대표 및 특수관계인이 최대주주로 있는 보령파트너스를 대상으로 1750억원 규모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란 기존 주주가 아닌 특정 대상에게만 새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보령파트너스는 보령 지분 20.85%를 확보하며 2대 주주에 올랐다. 김 대표 측의 경영 지배력은 한층 공고해졌지만, 기존 주주들은 자신의 지분 가치가 저절로 줄어드는 희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우주 사업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김 대표 일가의 지분을 늘려주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주주환원 정책은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다. 최근 3년간 배당수익률은 1%에도 미치지 못했고, 자사주 매입이나 소각 같은 조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1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우주에 쏟아붓는 동안 정작 주주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사실상 없었다는 얘기다. 한 소액주주는 "회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주는 좋은데, 주주한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토로했다. 제약 본업의 성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보령은 지난해 매출 1조원 달성과 영업이익·순이익이 모두 전년 동기보다 늘었지만, 신성장 사업으로 추진 중인 우주 사업에서는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가 없어 우려를 낳고 있다. 카나브 등 기존 제품군이 실적을 받쳐주고 있는 동안, 시장이 기대하는 혁신 신약 파이프라인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도 걸린다. 사명에서 '제약'을 떼어낸 회사가 제약사로서의 핵심 경쟁력은 어떻게 유지하겠다는 건지, 그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다. 업계에서는 김 대표의 판단에 대한 비판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우주 사업은 장기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제약사로서 연구개발 경쟁력을 어떻게 유지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투자 파트너 기업이 직원 감원과 임금 삭감을 단행하는 상황에서 추가 자금 투입까지 검토한다는 건 주주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2019년 휴스턴 우주센터에서 품었다는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 꿈의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은 주주들이다. 보령이 우주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지구에 남겨진 주주들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2026-03-25 16: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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