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4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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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뒤에 숨을 수 없는 공직자의 책임
[경제일보] 말은 가볍게 나가지만 그 말이 도착하는 곳은 가볍지 않다. 특히 공직자의 말은 더 그렇다. 한 개인의 의견처럼 보이지만 국민은 그것을 정부의 태도, 권력의 감수성, 국가의 품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공직자는 말할 자유를 갖되 그 자유보다 먼저 말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이병태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배재고 야구부의 5·18 민주화운동 조롱성 응원 논란과 관련해 이 부위원장은 SNS에 “5·18이 성역이 됐다”, “북한의 모습”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고 이후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며 자신의 입장을 이어갔다. 청와대는 해당 발언이 “혐오와 조롱에 대한 정부의 단호한 거부 기조와 달리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엄중 경고했다. 이후 이 부위원장의 사퇴 의사를 수용했다. 이번 사안을 단순히 한 공직자의 돌출 발언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호돼야 하는냐다. 또 하나는 공직자가 사적 공간에서 한 말도 공적 책임의 대상이 되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뿌리지만 공직자의 언행은 그 뿌리를 흔들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넓게 보장돼야 한다. 불편한 말, 거친 비판, 권력에 대한 조롱까지도 민주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다. 국가가 듣기 싫은 말을 막기 시작하면 자유는 순식간에 허가제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문제 제기 자체를 금기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자유에는 경계가 있다. 타인의 존엄을 훼손하고 역사적 폭력의 피해자를 다시 상처 입히며 특정 지역과 공동체를 조롱하는 행위까지 자유의 이름으로 덮을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타인의 존엄과 인권을 훼손하는 것까지 옹호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문제는 학생들의 미성숙한 응원 구호에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과정에서 어른의 역할은 갈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수습을 돕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부총리급으로 불리는 정부 고위직 인사의 말이 논란을 정치적 전선으로 확장시켰다. 배재고 논란의 본질은 청소년의 잘못된 역사 인식과 공동체 감수성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이냐다. 하지만 이 부위원장의 발언 이후 논란은 징계의 적절성, 표현의 자유, 5·18의 역사적 의미, 정부 인사 검증 문제로 번졌다. 공직자는 시민과 다르다. 시민은 자신의 말에 대해 사회적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공직자의 말은 행정과 정책의 신뢰를 함께 움직인다. 규제합리화위원회는 말 그대로 규제를 합리화하고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한 기구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책무는 기업과 시장, 국민 사이의 신뢰를 조율하는 일이다. 그런 인사가 사회적 상처가 깊은 역사 문제를 두고 절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했다면 시장 친화적 규제 개혁의 메시지조차 불필요한 정치 논란에 묻힐 수밖에 없다. 경제도 결국 신뢰 위에서 굴러간다. 정책은 숫자로 설계되지만 실행은 신뢰로 움직인다. 정부가 규제를 풀겠다고 해도 국민이 그 정부의 판단을 믿지 못하면 정책은 저항에 부딪힌다. 기업이 투자하려 해도 사회적 갈등이 커지면 비용이 늘어난다. 공직자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는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정책 추진력을 갉아먹는 비경제적 비용이다. 규제 합리화라는 좋은 명분도 사회 통합의 감수성을 잃으면 설 자리가 좁아진다. 이번 사퇴는 개인의 낙마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부 인사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전문성은 중요하다. 경제를 알고 시장을 알고 규제의 폐해를 아는 인재는 필요하다. 그러나 고위 공직에 필요한 자격은 전문성만이 아니다. 헌법 가치에 대한 이해, 역사적 상처에 대한 감수성, 공적 언어를 다루는 절제도 전문성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국민 통합을 내세운 정부라면 더 그렇다. 통합 인사는 진영을 넓히는 일이지만 상처를 헤집는 언행까지 감싸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논어 이인편에는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려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는 구절이 있다. 말을 못하라는 뜻이 아니다. 말이 앞서면 책임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경계다. 공직자의 말은 더 그렇다. 많이 말하는 것이 소통은 아니다. 빨리 반응하는 것이 용기는 아니다. 국민의 상처 앞에서 한 박자 늦추고 자기 확신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책임이다. 물론 이번 논란을 빌미로 공직자의 모든 사적 발언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사회로 가서도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위축과 검열을 낳는다. 중요한 것은 금지가 아니라 기준이다. 공직자는 비판할 수 있다. 정책을 두고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존엄을 건드리고 사회적 혐오와 조롱으로 읽힐 수 있는 언어를 선택했다면 그에 따른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도 숙제를 안게 됐다. 청와대는 초기 경고 이후 사퇴 의사를 수용했지만 앞으로는 사후 수습보다 사전 검증이 중요하다. 과거 발언과 SNS 이력만 기계적으로 훑는 수준을 넘어 고위 공직 후보자가 공적 갈등을 다룰 만한 균형감과 언어 감각을 갖췄는지 살펴야 한다. 전문가는 많지만 공직자는 드물다. 전문성을 공공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공직자다. 이병태 부위원장의 사퇴가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공직자의 말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직함을 가진 순간 말은 제도와 연결되고 정부와 연결되며 국민의 기억과 연결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공기다. 그러나 공직자의 언어는 그 공기를 탁하게 하지 않을 책임을 함께 진다. 정치는 갈등을 먹고 살 수 있지만 행정은 신뢰를 먹고 산다. 경제정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시장은 불확실성을 싫어하고 국민은 오만한 권력을 싫어한다. 공직자의 말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말은 한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지만 공직자의 말은 한 정부의 수준을 드러낸다. 이번 논란을 통해 정부가 배워야 할 교훈은 하나다. 인사는 넓게 하되 공직의 기준은 낮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2026-07-07 15: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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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썸, 해커에 2억원 건다…거래소 경쟁, 이제는 '보안과 신뢰'
[경제일보] 빗썸이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최고 수준인 최대 2억원의 버그바운티(취약점 신고 포상제) 포상금을 내걸었다. 상장 종목과 수수료 경쟁에 치중했던 가상자산 거래소 업계가 이제는 보안과 신뢰를 핵심 경쟁력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가상자산은 몇 초 만에 거래되지만 보안 사고로 무너진 신뢰는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빗썸이 버그바운티 포상금을 대폭 올리고 프라이버시센터까지 개편한 배경에는 거래소가 단순 매매 플랫폼을 넘어 금융 인프라 수준의 통제 체계를 요구받고 있다는 현실이 자리한다. 빗썸은 플랫폼 보안 취약점을 선제적으로 발굴하기 위한 버그바운티 프로그램의 최고 포상금을 2억원으로 확대한다고 지난 2일 밝혔다. 버그바운티는 외부 보안 전문가가 서비스 취약점을 찾아 제보하면 심각도에 따라 포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회사 측은 이번 포상 규모가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가운데 최고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금융권의 버그바운티 포상금이 일반적으로 수천만원 수준에 머무는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규모다. 빗썸은 2022년 9월 국내 가상자산사업자(VASP) 가운데 선제적으로 버그바운티를 도입했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기존 프로그램을 강화해 공지된 범위 안에서 블랙박스 침투 테스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취약점 심각도에 따라 포상금을 차등 지급할 계획이다. 외부 공격자가 발견하기 전에 보안 취약점을 먼저 찾아 제거하겠다는 취지다. 더 주목되는 부분은 프라이버시센터 개편이다. 빗썸은 개인정보 처리 현황과 정보보호 활동을 이용자에게 공개하고 외부 취약점 점검 결과와 정보보호 자문위원회 정례 회의 내용도 공유할 계획이다. 거래소 보안이 내부 점검과 비공개 통제 중심에서 외부 검증과 이용자 공개를 결합한 구조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배경에는 급변하는 규제 환경이 있다. 국내 가상자산사업자는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담한다. 지난해 7월 시행된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이후에는 이용자 자산 보호와 이상거래 감시 책임도 한층 강화됐다. 거래소는 고객확인(KYC) 과정에서 개인정보와 금융거래 정보를 대규모로 다룬다. 보안 사고는 단순한 시스템 장애가 아니라 실명계좌 제휴와 감독당국 대응, 시장 평판까지 흔드는 경영 리스크가 됐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보안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와 디파이(DeFi) 플랫폼을 겨냥한 해킹 피해가 잇따르고 있으며, 북한 연계 해킹 조직의 가상자산 탈취 사례도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디지털자산 시장이 제도권 금융에 편입될수록 보안은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빗썸이 보안 투명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향후 스테이블코인과 커스터디, 기관투자자 서비스, 디지털자산 결제 인프라 시장이 커질수록 거래소 보안은 사업 확장의 전제 조건이 된다. 은행과 제휴하고 기관 고객을 유치하려면 보안 체계를 선언이 아니라 숫자와 절차, 검증 결과로 입증해야 한다. 남은 과제는 실효성이다. 최대 2억원이라는 포상금은 상징성이 크지만, 제보 범위와 취약점 등급 기준, 제보자 보호 원칙, 처리 기한, 패치 완료 후 공개 범위가 명확해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프라이버시센터 역시 홍보 페이지에 그친다면 효과는 제한적이다. 개인정보 처리 현황과 자문위원회 권고 사항, 취약점 개선 사례가 정기적으로 공개될 때 비로소 신뢰 자산이 될 수 있다. 빗썸 관계자는 "투자자가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버그바운티 포상금을 국내 최고 수준으로 상향했다"며 "프라이버시센터를 통해 정보보호 현황을 공유하고 개방형 보안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가상자산 거래소의 경쟁은 수수료와 상장 종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단계에 들어섰다. 보안과 개인정보 보호, 이상거래 대응 능력이 거래소의 체급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빗썸의 이번 조치가 일회성 발표를 넘어 실제 제보 건수와 처리 속도, 개선 사례로 이어질 때 시장은 이를 보안 비용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로 가기 위한 신뢰 투자로 평가할 것이다.
2026-07-03 13: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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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美 안보우산…"韓, 동맹 의존 넘어 전략적 자율성 키워야"
[경제일보] 미국의 안보 역할 축소와 중·러 협력 장기화로 한국 외교·안보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미국 중심 안보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동맹에만 의존하기보다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18일 한국경제인협회 한국경제연구원과 한국사회과학회, 민주연구원이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공동 개최한 '세계질서 패러다임 변화와 한국의 과제'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 한국 외교·안보 전략의 재정립 필요성을 제기했다. 美 역할 축소에 커지는 유럽 자강론 윤성욱 충북대 교수는 미국과 유럽 간 안보 균열이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은 이란 핵합의를 외교·안보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성과 중 하나로 평가해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탈퇴하면서 갈등이 본격화됐다"고 했다. 이어 "트럼프 2기 들어서는 미국과 유럽이 디커플링(탈동조화)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기 시작했다"며 "그린란드 병합 발언과 이란 전쟁 등을 거치면서 유럽 내부에서는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안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는 유럽의 독자 안보체제 구축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EU 조약에는 회원국이 공격받을 경우 모든 역량을 동원해 지원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실제로 누가 지휘하고 어떤 군대를 동원할지에 대한 체계는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독일의 재무장과 프랑스의 핵우산 제공 논의도 나오고 있지만 유럽 국가들 간 입장이 달라 단일한 안보 체제를 구축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폴란드와 발트 3국은 미국의 관여 확대를 원하지만 프랑스는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군사동맹 참여 자체에 부정적"이라며 "유럽 차원의 단일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라고 진단했다. 윤 교수는 향후 나토 체제가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미국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며 "미국은 재래식 무기를 중심으로 한 유럽 안보를 유럽에 맡기고 인도·태평양 지역에 역량을 집중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회원국 지위는 유지하되 실제 역할은 줄이는 '기능적 탈퇴(functional withdrawal)' 형태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앞으로 나토의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의 역할 축소와 유럽의 자강 노력"이라고 덧붙였다. 커지는 동맹 비용…"한국 역할 확대 요구 거세질 것" 이어 발표에 나선 공민석 제주대 교수는 미국의 안보전략 변화가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공 교수는 "현재 미국은 중국 견제를 최우선 과제로 둘 것인지, 아니면 미국 본토 방어를 우선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적으로 논쟁하고 있다"며 "다만 어떤 노선을 선택하더라도 동맹국들에 대한 역할과 기여 요구는 계속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능력도 있어야 하고 미국에 기여도 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 미국 편에 서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며 "중국 견제 전략 속에서 동맹국들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한미동맹은 보호는 줄어들고 비용은 커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미국의 전략 변화에 따라 한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와 안보 기여 확대 압박도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공 교수는 주한미군 역할 변화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는 "최근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활용해 주한미군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며 "중국 견제를 우선하든, 미국 본토 방어를 우선하든 한국에 대한 전략적 유연성 요구는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주한미군이 북한만을 상대하기 위한 전력인지, 아니면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를 위한 전략 자산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태평양 지역이 명시돼 있는 만큼 향후 주한미군의 역할과 범위를 둘러싼 논의가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루 위험은 커지고 편승의 이익은 줄어들고 있다"며 "한국은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 안보 협력 등에서 협상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어디까지 참여할 수 있고 어디까지는 어렵다는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 교수는 "장기적으로는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해야 한다"며 "동맹을 유지하되 군사적 의존도를 줄이고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는 방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중러 비공식 동맹 오래 간다"…한국 외교 시험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 역시 한국 외교에 새로운 변수로 제시됐다. 제성훈 한국외대 교수는 "중러 관계는 명확한 상호방위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통적 의미의 동맹으로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연루 위험을 회피하고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실질적 군사협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공식 동맹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 교수는 중러 관계에 대해 "양국은 세계 질서 변화에 대한 열망은 같지만 변화의 방식과 수단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중국은 기존 세계 질서 안에서 자신의 지분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변화에도 만족할 준비가 돼 있지만 러시아는 기존 세계 질서 자체의 해체와 재구성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은 경제력을 활용하지만 러시아는 상당 부분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다"며 "양국의 경제 협력은 상호보완성이 높지만 중국은 협력을 위한 대안이 많고 러시아는 대안이 제한돼 비대칭성이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그는 이 같은 한계에도 중러 협력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제 교수는 "러시아의 대중 의존도 심화가 양국 간 불화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방 제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대중·대러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중러 비공식 동맹은 장기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며 "러시아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더라도 중국과의 관계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고 중국도 미국과의 관계 발전을 위해 러시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 교수는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외교의 핵심 과제로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꼽았다. 그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행기의 혼란 속에서 한국에는 독자적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며 "강대국 간 관계 변화에 종속되지 않고 한국의 가치와 이익에 따라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전략적 자율성 확보가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동맹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에게 의지해야 하며, 동맹은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 교수는 외교 전략의 다변화 필요성도 제기했다. 그는 "미국 및 일본과 안보 협력을 하더라도 이념화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중국 및 러시아와 고위급·실무급 전략대화 채널을 상설화해야 한다"며 "한국의 핵심 이익을 정교하게 분리 관리하는 다각도 외교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미·이란 전쟁과 나토 변화, 한미동맹 재조정, 중러 비공식 동맹 장기화 등 서로 다른 주제가 다뤄졌지만 결론은 하나로 모였다. 기존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국이 동맹에만 기대는 방식으로는 높아지는 안보·경제 부담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되 한국의 선택지를 넓히는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방위비 분담과 주한미군 역할, 대중·대러 관계, 공급망과 경제안보 등 복합 현안이 동시에 얽히는 만큼 한국의 국익을 기준으로 사안별 대응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세미나 참석자들은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 외교가 '동맹 의존'을 넘어 '동맹 활용'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2026-06-18 15: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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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트랩에 투영된 중화(中華)의 서열: 의전(儀典)으로 읽는 중국 외교의 본색
[경제일보] 국가 간 외교에서 의전은 단순한 형식이나 예법을 넘어선다. 그것은 말 없는 언어이자, 자국의 전략적 속내와 상대국에 대한 냉정한 손익계산서를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고도의 정치 행위다. 특히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 믿으며 예의(禮義)와 서열, 그리고 체면(面子)을 극도로 중시해 온 중국 외교에서 공항 영접의 격(格)은 상대국의 전략적 가치를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리트머스 시험지다. 최근 방중한 글로벌 정상들을 맞이한 베이징 서오두(首都) 공항의 풍경은 오늘날 중국이 바라보는 세계 질서의 재편도와 그들의 속내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중 영접을 둘러싸고 외교가 안팎에서 ‘홀대론’과 ‘격하론’ 등 설왕설래가 분분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공항 마중에 전직 상무위원을 역임한 국가부주석(정치국원)을 내보냈다. 언뜻 거물급 인사를 배치한 듯 보이지만, 실권을 쥔 현직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세련되게 포장된 ‘외교적 메시지’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해석은 다른 정상들과의 비교를 통해 확신으로 굳어진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공항 트랩 아래에서 그를 맞이한 이는 중국 외교의 총괄 수장이자 시진핑의 심복인 왕이(王毅)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이었다. 실질적인 대미(對美) 전선에서 동맹 이상의 밀착을 과시하는 러시아에 대해 확실한 예우를 갖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 전승절 행사를 전후해 중국을 찾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영접에는 무려 중국 권력 서열 5위인 차이치(蔡奇) 중앙서기처 서기 겸 상무위원이 직접 공항으로 나갔다. 혈맹이자 지정학적 최전방 보루인 북한에 대해 중국이 부여하는 전략적 무게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서열의 숫자로 명백히 보여준 장면이다. 중국 외교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영접의 변천사’는 그들의 국력 신장 및 대외 전략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과거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냉전의 장막을 걷고 베이징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 체제의 2인자이자 외교 총사령관이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직접 공항에 나가 영접했다. 당시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미국의 손이 절실했던 중국으로서는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극진한 예우이자, 생존을 위한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도광양회(韜光養晦) 시대에도 중국은 서방 강대국 정상들이 방문할 때마다 철저히 격식을 맞추며 몸을 낮췄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다르다. 시진핑 체제 이후 대국외교(大國外交)와 분발유위(奮發有爲)를 표방하며 굴기를 선언한 중국은 이제 미국을 향해 더 이상 저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이번 영접 격은 중국이 미국을 두려워하거나 눈치 보지 않으며, 이제는 겉치레식 환대에 연연하기보다 ‘대등한 G2 관계’로서 냉정하게 국익 대 국익으로 맞서겠다는 오만함과 자신감의 발로다. 반면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반드시 붙잡아야 할 러시아와 북한이라는 전통적 우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서열과 격식을 갖추며 ‘우리 편’을 챙기는 실리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국 역사와 사상의 뿌리인 『도덕경(道德經)』 제61장에는 대국과 소국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대국자는 하류야(大國者 下流也), 천하교(天下之交), 천하지빈(天下之牝)”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아서 천하의 물이 모여드는 곳이자 천하의 어머니와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노자(老子)는 대국일수록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아랫자리에 처해야(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진정으로 천하의 인심을 얻고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세울 수 있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현재 시진핑의 중국이 보여주는 의전 외교는 노자의 이런 현명한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공항 영접 하나에도 치밀하게 서열을 매기고, 상대국의 힘과 이용 가치에 따라 환대와 홀대의 수위를 조절하는 모습은 대국(大國)의 풍모라기보다는 지극히 계산적이고 옹졸한 패권주의의 단면을 드러낼 뿐이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는 혈맹이라며 서열 5위를 내보내고, 견제해야 할 상대에게는 은근한 엇박자의 격을 적용하는 세태는 단기적으로는 외교적 기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주변국들로 하여금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웃에 대해 신뢰보다는 끊임없는 경계심과 피로감을 느끼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는다. 의전의 격을 바꾸어 상대의 기를 꺾는 방식은 일시적인 전술은 될 수 있어도 천하를 아우르는 도(道)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대국 외교란 공항 트랩에 누구를 내보내느냐는 형식적 서열 정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노자의 말대로 스스로를 낮추어 천하의 물을 품어 안는 포용력과 예측 가능한 규범을 보여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영접 인물의 서열로 아군과 적군을 가르고 대국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중국의 영접 외교 변천사는,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외교적 고립감과 조급증을 방증하는 씁쓸한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2026-05-20 10: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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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동북아 격랑(激浪), 안동 한일회담이 전략적 공조의 이정표 되어야
[경제일보] 국제 정세의 지각변동이 가히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가파르다. 중동발(發) 전운이 짙어지며 미·이란 간의 무력 충돌이 세계 경제와 글로벌 공급망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형국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중 정상이 전격적인 회담을 통해 자국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어제의 맹방(盟방)과 동맹이라는 철석같던 신뢰마저 자국의 실리 앞에서는 언제든 형해화(形骸化)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엄중한 현실이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외교 안보 지형 속에서, 우리 정부에 요구되는 책략은 유연하면서도 국익 중심의 단단한 중심추를 잡는 일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에 맞춰 매일 새로운 외교적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할 만큼 다변화된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격랑 속에서 오늘 이재명 대통령이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머리를 맞댄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여섯 번째이자, 셔틀외교의 모멘텀을 이어가는 이번 정상회담에 국내외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안동 회담은 단순한 외교적 연례행사를 넘어, 동북아의 지정학적 위기를 관리하고 한일 간의 ‘전략적 협력 관계’를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엄중한 책무를 안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역사적 앙금으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던 양국이지만, 지금의 복합 위기 상황은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있을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미·중 패권 경쟁의 틈바구니와 중동 전쟁의 여파 속에서 한일 양국이 긴밀하게 공조하지 않는다면, 동북아의 안보 공백과 경제적 타격은 고스란히 양국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정부 발표대로 이번 회담에서 장기화하는 중동 전쟁 관련 현안과 자유 통상 질서 확립, 동북아 안전 보장 및 공급망 위기 타개책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경제와 안보가 분리될 수 없는 ‘경제 안보’의 시대에, 첨단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과 에너지 안보 확보를 위한 한일 간의 전략적 스크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나아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안보 협력의 틀을 더욱 공고히 다져야 한다. 주목할 점은 이번 회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한국의 선비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열린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 부자가 찾았던 외교적 명소에서, 양국 정상이 안동의 전통 불꽃놀이인 ‘선유줄불놀이’를 관람하고 전통 음식을 나누며 신뢰를 쌓는 장면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 양국의 화합을 상징하는 안동소주와 나라현의 사케가 만찬 테이블에 함께 오르듯, 외교적 갈등의 실타래도 이처럼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에서 풀리기 시작하는 법이다. 다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국익을 위한 냉철한 손익계산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일본 정부 역시 이번 회담을 계기로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는 데 보다 전향적이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다. 상호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는 전략적 공조는 모래 위에 세운 성과 같다. 우리 정부 또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하되, 국익의 마지노선을 확실히 지키는 균형 잡힌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전통문화의 온기가 흐르는 안동에서 열리는 이번 정상회담이, 한일 양국이 당면한 글로벌 위기를 함께 돌파하는 실질적이고 전략적인 협력의 대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거친 파고가 몰아치는 국제 사회에서 한일 관계의 안정이 곧 대한민국 안보와 경제의 강력한 방파제가 될 수 있음을, 양국 정상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
2026-05-19 09: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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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기념이 됐지만, 진실과 배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제일보] 5·18민주화운동이 46주년을 맞았지만 오월의 과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가기념일로 자리 잡고 기념식은 매년 열리고 있지만 발포명령자 규명, 행방불명자 확인,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온전한 배상, 왜곡·폄훼 대응, 5·18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가장 큰 미완의 과제는 진상규명이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2024년 종합보고서를 내고 4년여 활동을 마무리했다. 조사위는 민간인 학살과 희생자 사망 경위, 일부 왜곡 주장의 허구성을 확인하는 성과를 냈지만, 핵심 쟁점인 발포명령자와 행방불명자 문제는 끝내 규명하지 못했다. 활동 종료로 추가 조사는 중단됐고, 조사위는 국가 차원의 후속 조치를 권고하는 데 그쳤다. 발포명령자 규명은 5·18 진실의 마지막 퍼즐로 꼽힌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여러 조사와 판결을 통해 확인됐지만, 누가 최종적으로 발포를 명령했는지에 대한 법적·역사적 결론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행방불명자와 암매장 의혹 역시 유족들에게는 ‘끝나지 않은 5월’로 남아 있다. 배상 문제도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올해 1월 5·18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본 원심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1990년대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국가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별도 위자료 청구 길을 연 판단이다. 이번 판결은 기존 보상 체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동안 5·18 피해 보상은 사망·부상·구금 등 물리적 피해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계엄군 폭력과 고문, 가족의 사망과 실종, 오랜 낙인과 침묵이 남긴 정신적 피해는 충분히 평가되지 못했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단순 보상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의 성격을 다시 규정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 왜곡과 폄훼 대응도 여전히 난제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으로 허위사실에 근거해 5·18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폄훼하면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도입됐지만, 실제 적용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법은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규정하지만, 예술·학문·연구·보도 목적 등에 대한 면책 조항이 넓어 실효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북한군 개입설과 희생자 모욕, 유공자 특혜 주장 같은 허위 정보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5·18기념재단 등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댓글 모니터링을 확대하고 삭제 요청에 나서고 있지만, 플랫폼 확산 속도와 익명성을 따라잡기 어렵다. 왜곡은 단순한 표현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2차 가해이자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제도적 보완 요구가 커지고 있다. 헌법 전문 수록 문제도 올해 다시 쟁점이 됐다. 5·18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을 추진해 온 시민사회단체들은 최근 개헌안 국회 의결이 무산된 데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5·18 46주년을 앞두고 국립5·18민주묘지 앞에서는 헌법 전문 수록 표결 불참과 무산 책임을 묻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시민사회는 5·18정신의 헌법 수록이 특정 지역의 요구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헌정사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절차라고 주장했다. 5·18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단순한 상징 논쟁이 아니다. 1980년 광주의 저항을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의 핵심 가치로 명문화하느냐의 문제다.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6월항쟁과 함께 5·18을 헌법 질서 안에 분명히 새겨야 한다는 요구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그러나 정치권의 합의 부족과 개헌 절차의 난맥 속에 매번 문턱을 넘지 못했다. 46주년을 맞은 광주의 과제는 세 갈래로 압축된다. 첫째, 진상규명은 조사위 보고서로 끝낼 수 없다. 발포명령자와 행방불명자, 암매장 의혹 등 남은 쟁점에 대한 국가 차원의 후속 조사와 자료 공개가 필요하다. 둘째, 배상은 금전 지급을 넘어 국가폭력 피해의 실체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보완돼야 한다. 셋째, 왜곡·폄훼 대응과 헌법 전문 수록은 5·18을 현재의 민주주의 가치로 지켜내는 제도적 장치가 돼야 한다. 5·18은 이미 국가기념일이 됐고 광주는 매년 추모의 광장이 된다. 그러나 기념이 제도화됐다고 해서 진실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누가 명령했고, 누가 사라졌으며, 누가 아직도 고통 속에 있는지에 대한 답은 충분하지 않다. 오월이 광장으로 돌아왔다면 이제 국가는 그 광장 앞에서 남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2026-05-18 1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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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정상회담..대만문제로 본 우리의 입장
미·중 정상회담이 끝난 뒤 나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만 관련 발언은 국제정치의 냉혹한 본질을 다시 일깨운 사건이다. “대만 무기 판매를 시진핑 주석과 상세히 논의했다”, “판매 여부는 중국과의 협상에 달려 있다”는 취지의 언급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 질서가 가치와 명분보다 국익과 힘의 논리 위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대한민국은 앞으로 어떤 전략으로 생존할 것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대만 문제를 남의 일처럼 보지 않았다. 중국의 위협 속에 있는 대만의 처지를 북한과 대치한 우리의 현실과 겹쳐 보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며 미국과 안보 협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도 양국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대만해협 위기가 거론될 때마다 한국 사회는 마치 우리의 미래를 들여다보듯 긴장해 왔다. 그러나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그 인식에 균열을 냈다. 미국은 더 이상 대만 문제를 절대적 가치의 문제로만 접근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을 “협상 칩”이라고 표현했고, “중국은 강대국이고 대만은 작은 섬”이라고까지 말했다. 세계 최강국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국제정치의 본질을 압축한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직 영원한 국익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는 늘 그래왔다. 냉전 시절 미국은 중국을 공산주의의 본산으로 규정했지만, 소련 견제를 위해 돌연 중국과 손을 잡았다. 베트남전에서 피를 흘리던 미국은 불과 몇 년 뒤 베이징에서 웃으며 건배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협력자가 되고,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부담이 되는 것이 국제정치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때로 동맹을 영원불변의 운명공동체처럼 여기는 순진함에 빠져 있었다. 이번 회담이 우리에게 충격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만조차 전략적 거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한반도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이다. 미·중 관계가 협력 국면으로 들어가든, 갈등 국면으로 치닫든 한국은 언제든 협상 테이블의 주변부로 밀려날 가능성을 안고 있다. 특히 북핵 문제조차 이번 정상회담에서 부차적 의제로 다뤄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반도의 운명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강대국 계산 속에서 재배치될 수도 있다는 경고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세계 질서가 ‘가치 연대’보다 ‘거래 외교’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조차 비용과 이익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미국의 안보 우산도 더 이상 무조건적 희생이 아니라 철저한 거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이 자국 산업과 국익을 위해 대만 반도체 기업의 미국 이전을 압박하는 모습은 그 단면이다. 동맹도 결국 미국 국익 아래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첫째는 자강(自强)이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한다. 국방력 강화는 물론이고 첨단 기술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배터리, 조선, 원전 같은 전략 산업은 이제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의 핵심 자산이다. 경제력이 곧 외교력이고 군사력인 시대다. 둘째는 외교의 정교함이다. 미국과의 동맹은 여전히 대한민국 안보의 중심축이다. 그러나 동맹에만 모든 운명을 맡기는 사고는 위험하다. 중국과의 경제 관계, 일본과의 안보 협력, 유럽 및 동남아 국가들과의 전략적 연대까지 다층적 외교를 구축해야 한다. 어느 한 나라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셋째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국제정치는 감정이 아니라 힘과 이해관계로 움직인다. 우리는 때로 국제사회를 도덕 교과서처럼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이 살아남는다(柔弱勝剛强)”고 했다.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국가는 결국 도태된다. 또한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했다.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균형 감각이다. 인류 역사의 경전들은 공통된 교훈을 전한다. 스스로 준비하지 않은 국가는 결코 타인의 선의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강대국은 늘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 냉혹한 현실을 직시할 때만 국가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 질서의 변화 속에서 한국이 더 이상 과거의 익숙한 틀에 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역사적 장면이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대한민국은 다가오는 격변의 시대를 스스로 헤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26-05-18 10: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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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다카이치 총리, 19일 안동서 정상회담…한일 셔틀외교 재가동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오는 19일 경북 안동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한일 셔틀외교를 재가동한다. 지난 1월 이 대통령이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인 일본 나라현을 방문한 데 이은 답방 성격으로, 이번에는 이 대통령의 고향인 안동에서 회담이 열린다. 이번 정상회담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여섯 번째 한일 정상회담으로 알려졌다. 양 정상은 19일부터 20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소인수 회담, 확대 정상회담, 공동언론발표, 만찬 등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가장 주목되는 의제는 경제안보다. 양국은 지난 1월 나라현 회담에서 공급망 안정과 경제안보 협력, 첨단산업 연계 강화 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당시 논의가 협력 활성화 수준이었다면, 이번 회담에서는 중동전쟁 장기화와 원유·천연가스 수급 불안까지 맞물리며 경제안보 협력이 보다 핵심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 통항 문제에 대한 한일 간 소통 여부가 관심사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에너지 수송로의 안정성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모두 원유와 LNG 수입 의존도가 높다. 양국 정상이 비공개 회담에서 선박 통항 상황과 에너지 공급망 리스크를 공유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한국 선박 HMM 나무호 손상 사고도 관련 논의 배경으로 꼽힌다. HMM 나무호는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미확인 비행체로 추정되는 물체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고, 현재 잔해 분석이 진행 중이다. 일본 역시 최근 자국 선박의 호르무즈 통항 문제를 관리해온 만큼 양국이 해상 수송로 안전과 위기 대응 공조를 논의할 여지가 있다. 최근 미중 정상회담 결과도 회담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미중은 이번 회담에서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메시지를 냈지만, 대만과 AI·반도체, 공급망 문제에서는 긴장을 남겼다. 일본은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발언 이후 중국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상황인 만큼 관련 동향을 한국과 공유할 필요성이 커졌다. 안보 분야에서는 한미일 협력과 북한 비핵화 문제가 거론될 수 있다. 다만 최근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가 핵심 의제로 부각되지 않았고, 중동과 대만 문제가 국제 안보 현안의 전면에 떠오른 만큼 이번 회담에서도 안보 협력 원칙을 재확인하는 수준의 수위 조절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과거사 문제의 진전 여부도 관전 포인트다. 한일 양국은 지난 1월 회담에서 1942년 일본 야마구치현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유해 발굴을 위한 DNA 감정 추진에 합의한 바 있다. 이번 회담에서 실제 감정 절차 착수나 추가 유해 조사 협력 등 후속 조치가 논의될지 주목된다. 이번 안동 회담은 한일 정상이 서로의 고향을 방문하는 ‘고향 셔틀외교’라는 상징성도 갖는다. 과거사와 안보 현안이 여전히 민감하지만, 정상 간 신뢰를 바탕으로 실용적 협력 의제를 넓혀가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일정으로 풀이된다. 향후 관건은 회담 결과가 선언적 메시지를 넘어 구체적 협력으로 이어질지 여부다. 호르무즈 해협 통항과 에너지 수급, 공급망 안정, 첨단산업 협력, 과거사 후속 조치에서 실질적 성과가 나와야 셔틀외교의 동력이 이어질 수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한일 정상회담과 관련해 “중동 정세를 포함해 지역·글로벌 현안도 당연히 논의될 것”이라며 “양국이 벌써 여러 번 만났기 때문에 깊이 있는 소통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6-05-16 12: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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