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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실적' vs SK하닉 '실탄'…AI 메모리 패권경쟁 2라운드
[경제일보] AI 반도체 전쟁의 열기가 다시 한국 증시를 흔드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역대급 실적으로 돌아왔고,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대규모 투자 재원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쪽은 실적으로, 다른 한쪽은 자금조달로 AI 메모리 패권전 2라운드의 문을 열었다. 역대급 실적으로 돌아온 삼성의 '반격'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약 171조원, 영업이익 약 89조4000억원의 잠정 실적을 발표했다. 전년 동기 영업이익 4조6800억원과 비교하면 약 19배 수준이다. 이는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D램과 낸드 가격이 뛰고, 고부가 메모리 수요가 폭발한 결과다. 몇 년 전 HBM 경쟁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줬다는 평가를 받았던 삼성전자가 다시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중심으로 돌아왔다는 신호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정했다. 삼성전자가 실적을 발표한 지난 7일 코스피는 4.9% 급락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각각 6.9%, 6.1% 하락했다. 강한 이익이 이미 주가에 반영됐고, AI 메모리 호황이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한 의문이 커진 영향이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과열됐는지, 빅테크의 설비투자가 계속 늘어날지, 메모리 가격 상승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가 새로운 질문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은 단순한 HBM 점유율 싸움을 넘어섰다. 이제 승부처는 '누가 더 빨리 고성능 메모리 생산능력을 늘리느냐', '누가 엔비디아와 빅테크 고객의 장기계약을 더 단단히 묶느냐'. '메모리 사이클이 꺾일 때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로 옮겨갔다. 삼성전자의 무기는 종합 반도체 체력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파운드리, 시스템LSI, 패키징을 모두 가진 세계에서 드문 기업이다. AI 반도체가 복잡해질수록 칩 하나의 성능보다 메모리, 로직, 패키징을 함께 묶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삼성전자는 HBM에서 SK하이닉스에 먼저 밀렸지만, 메모리 전반의 가격 상승과 낸드 회복, 범용 D램 수요 반등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HBM 초반 주도권을 놓쳤다.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 공급망의 신뢰를 먼저 얻은 쪽은 SK하이닉스였다. 삼성전자의 2분기 호실적에도 시장에서 '삼성이 AI 메모리의 가장 중요한 고객에게 가장 중요한 제품을 가장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HBM 선점한 SK, 자본시장서 실탄 확보 SK하이닉스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주식 매각을 시작했고 280억7000만 달러(한화 약 43조원)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 자금은 국내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과 첨단 장비 확보에 쓰일 가능성이 크다. AI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는 시점에 글로벌 투자자 자금을 끌어와 생산능력 확대에 투입하겠다는 전략이다. HBM 선점으로 얻은 시장 신뢰를 자본시장으로 확장하려는 승부수다. SK하이닉스의 강점은 집중력이다. 삼성전자가 메모리와 파운드리, 모바일과 가전까지 거대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기업이라면, SK하이닉스는 메모리 한 분야에서 더 집중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특히 HBM에서는 엔비디아 공급망을 선점하며 'AI 시대 메모리 강자' 이미지를 굳혔다. HBM은 단순히 많이 만드는 제품이 아니다. 고객의 AI 가속기 설계 일정에 맞춰 성능, 발열, 전력 효율, 패키징을 함께 맞춰야 한다. SK하이닉스는 이 고객 맞춤형 대응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SK하이닉스의 대규모 자금 조달은 기회이자 동시에 부담이다. AI 메모리 호황이 길게 이어지면 선제 투자는 격차 확대의 무기가 되지만, 반대로 빅테크의 AI 투자가 둔화하거나 메모리 공급이 한꺼번에 늘어나면 대규모 설비투자는 고정비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호황 이후 겨누는 장기전 두 기업 모두 사이클 방어가 숙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기업들은 다운사이클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장기계약과 '테이크 오어 페이(Take or Pay)' 방식의 계약을 활용하고 있다. 이런 계약이 전체 매출을 모두 방어하는 것은 아닌 만큼 공급과잉이 현실화될 경우 충격을 완전히 막기는 어렵다.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쟁은 '누가 더 많이 버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실적으로 자신이 여전히 '메모리 강자'임을 증명해야 하고, SK하이닉스는 HBM 선점이 일시적 우위가 아니라 장기 경쟁력임을 입증해야 한다. 투자 포인트도 다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전체 체력과 포트폴리오 회복력이 강점이다. 메모리 가격 상승이 D램과 낸드 전반으로 번지면 삼성의 이익 레버리지는 더 커진다. 파운드리와 시스템반도체 부진이 부담이지만, 반대로 이 부문이 회복하면 실적 개선의 추가 여지도 생긴다. SK하이닉스는 HBM과 고성능 D램에 더 집중된 기업이다. AI 서버 수요가 계속 강하면 이 집중력이 더 큰 프리미엄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시장이 더 이상 '좋은 숫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2분기 잠정 실적은 압도적이지만, 주가는 흔들렸다. 이는 투자자들이 이미 AI 호황을 주가에 상당 부분 반영했고, 이제는 다음 국면을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2027년 이후에도 지속될지, 가격 상승이 얼마나 이어질지, 고객의 장기계약이 실제 방어막이 될지가 중요해졌다.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로 보면 두 기업의 경쟁은 축복이자 부담이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동시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면 국내 장비·소재·부품 생태계는 커진다. 용인, 평택, 청주 등 반도체 거점의 산업적 무게도 커진다.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너무 많은 투자가 몰리면 사이클 하강기에 충격도 커진다. 반도체 산업은 국가 전략산업이지만, 동시에 가장 냉정한 사이클 산업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지금은 강하지만, 진짜 승부는 가격이 오를 때가 아니라 가격이 흔들릴 때 드러난다"며 "AI 메모리 2라운드는 생산능력, 고객계약, 자금조달, 사이클 방어력까지 모두 겨루는 장기전"이라고 했다. 이어 "AI는 더 많은 메모리를 요구하고, 시장은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익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승패를 가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주경제 2026년 07월 09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7-09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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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될 반도체, 국가 백년대계로 접근해야 한다
[경제일보] 대한민국 산업의 운명을 좌우할 또 하나의 중대한 선택이 시작됐다. 정부가 삼성과 SK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참여하는 이른바 '호남 반도체 공장+α'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국가 균형발전과 AI 대전환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수도권에 집중된 첨단 산업 구조를 분산하고 지역 경제에 새로운 성장축을 세우겠다는 구상 자체는 국가 미래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 할 만하다. 더욱이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자산인 반도체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국가 산업의 회복력을 높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작지 않다. 그러나 발표 직후 정치권은 또다시 본질보다 정쟁을 앞세우고 있다. 야당은 "직권남용", "선심성 정책"이라며 공세를 강화하고, 여당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맞서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라는 국가 생존 전략이 정치적 유불리의 계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국가 미래를 위한 투자조차 정권에 따라 찬성과 반대를 반복하는 정치 풍토에서는 어느 기업도 장기 투자를 결심하기 어렵다. 반도체 산업은 선거 주기에 맞춰 움직이는 산업이 아니다. 공장 하나를 건설하는 데만 수년이 걸리고, 인력 양성과 공급망 구축에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의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경쟁력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 각국이 국가 차원의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반도체 패권 경쟁에 사활을 거는 상황에서 우리만 정치적 소모전에 시간을 허비할 여유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장 유치라는 화려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반도체 산업은 공장만 세운다고 성공하는 산업이 결코 아니다. 초순수 용수 공급 체계와 안정적인 전력망, 대규모 변전시설, 광역 교통망, 연구개발 인프라, 전문 인력 양성 시스템이 동시에 갖춰져야 비로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반도체 생산은 단 1초의 정전에도 수천억 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산업이다. 용수 공급 역시 단 하루라도 차질이 생기면 생산 라인 전체가 멈춘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공장 유치 실적만 앞세운다면 또 하나의 '반쪽짜리 국가사업'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부가 무엇보다 서둘러야 할 일은 정치적 홍보가 아니라 인프라 구축이다. 전력망 확충 계획은 언제 완성되는지, 산업용 용수는 어떤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인지, 항만과 고속도로, 철도망은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국민 앞에 제시되어야 한다. 인허가 절차 역시 획기적으로 단축해 기업들이 불확실성 없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더 중요한 과제는 상생 생태계다. 정부가 대기업의 반도체 과실을 협력업체와 공유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은 늦었지만 바람직한 방향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경쟁력은 삼성과 SK 같은 대기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재·부품·장비를 공급하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할 때 비로소 산업 생태계가 완성된다. 일본이 오랜 기간 소재 기술을 축적했고 독일이 장비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도 수많은 강소기업이 산업의 뿌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 지역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한다면 단순한 생산기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연구소와 대학, 스타트업, 장비기업, 소재기업이 함께 모여 혁신을 창출하는 산업 생태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청년들이 지역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얻고 정착할 수 있는 교육과 주거, 문화 환경까지 함께 갖춰질 때 비로소 진정한 균형발전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은 이미 수도권 일극 체제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고 균형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경제 논리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국가 경쟁력과 지역 발전이라는 두 목표를 함께 달성하려면 철저한 경제성 분석과 현실적인 실행 계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반대를 위한 반대도, 성과를 위한 과장도 아니다. 국가 미래를 위한 초당적 협력이다. 반도체는 이제 특정 기업의 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이자 경제이며 미래 그 자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국가 전략, 지역과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공급망이 구축될 때 비로소 이번 호남 프로젝트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신화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가 그 길을 열어야지, 그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국가 백년대계를 정쟁의 제물로 삼는 순간, 그 피해는 결국 미래 세대 모두의 몫이 될 뿐이다.
2026-06-29 09: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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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왜 다시 수도권으로만 가는가
대한민국의 산업은 늘 수도권으로 흘렀다. 돈도 사람도 정보도 그랬다. 기업 본사는 서울에 있고 연구소는 판교에 있고 인재는 강남과 여의도와 마포로 모였다. 지방은 공장을 내주고 전기를 보내고 청년을 떠나보냈다. 우리는 그것을 효율이라고 불렀다. 국가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불렀다. 그 질서가 AI 시대에도 반복되고 있다. 정부는 AI 고속도로를 말한다. 데이터센터 지방 분산을 말한다. 지역 AI 경쟁력을 말한다. 말은 맞다. 그러나 국민이 묻는 것은 다르다. AI는 정말 지방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데이터센터 건물만 지방으로 보내고 돈과 인재와 의사결정은 여전히 수도권에 남겨두려는 것인가. AI는 더 이상 화면 속 기술이 아니다. 챗봇이 답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문서를 요약하는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AI는 공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병원과 물류망, 농업과 조선소, 전력망과 국방 시스템으로 들어가고 있다. AI가 현실의 기계와 설비를 움직이기 시작하면 산업의 지리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서울의 머리로 지방의 몸을 움직이는 낡은 방식을 반복하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AI 시대의 심장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심장은 피를 먹고 뛴다. AI 데이터센터가 먹는 것은 전기다. 물이다. 땅이다. 송전망이다. 지역의 수용성이다. 수도권은 이미 꽉 찼다. 부지도 부족하고 전력망도 버겁다. 주민 반발도 커진다. 그래서 데이터센터를 지방으로 보내야 한다고 한다. 이 말도 맞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지방은 또 무엇을 내주는가. 전기를 내주고 땅을 내주고 세제 혜택을 내주고 인허가 속도까지 내준다. 그 대가로 무엇을 받는가. 몇몇 운영 인력인가. 건설 기간의 일시적 경기인가. 기업 홍보자료에 등장하는 지역 상생 문구인가. 이것이 전부라면 AI 데이터센터는 지역의 미래가 아니라 또 하나의 부담 시설이다. 우리는 이미 같은 장면을 봤다. 산업단지는 지역 성장의 상징으로 출발했다. 시간이 지나자 환경 부담과 노동 격차의 현장이 됐다. 발전소와 송전탑은 국가 전력망의 필수 시설이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에게는 희생의 상징이 됐다. 데이터센터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이름은 미래 산업이지만 결국 땅 위에 짓는 시설이다. 전력망에 기대는 산업이다. 주민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인프라다. AI 고속도로라는 말은 듣기 좋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어느 방향으로 뚫리는지가 더 중요하다.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더 빠르게 올라가는 길인가. 수도권 기업이 지방의 전기와 부지를 더 쉽게 쓰는 길인가. 아니면 지역 산업이 스스로 AI를 쓰고 지역 대학이 인재를 길러내고 지역 중소기업이 생산성을 높이는 길인가. 길은 이름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어디로 이어지는지가 본질이다. 피지컬 AI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제조 현장과 AI를 결합하겠다고 한다. 그 방향은 맞다. 한국이 가진 진짜 힘은 챗봇 하나가 아니다. 반도체 공장, 자동차 생산라인, 조선소, 기계 산업, 통신망, 물류 현장이다. AI가 이 현장에 들어갈 때 한국 제조업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미국 빅테크가 장악한 모델 경쟁과는 다른 길이다. 그러나 피지컬 AI가 대기업 공장 안에서만 작동한다면 그것은 국가 전략이 아니다. 대기업 생산라인은 AI로 고도화되는데 협력사는 여전히 사람 구하기 어렵고 장비 바꾸기 어렵고 데이터 쓸 여력이 없다면 산업 전체의 경쟁력은 올라가지 않는다. 대기업의 생산성은 높아지고 중소기업의 격차는 더 벌어지는 AI라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양극화의 새 이름이다. 지방 AI도 마찬가지다. 데이터센터가 지방에 들어와도 핵심 인력은 서울에 있고 운영 판단은 본사에서 하고 수익은 수도권 기업으로 흘러가면 지방은 껍데기만 갖는다. 지역 대학은 여전히 학생을 잃고 지역 청년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지역 기업은 AI 전환 비용 앞에서 멈춰 선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건물만 내려간다고 산업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유치전의 심판이 아니다. 설계자여야 한다. 어느 지역에 어떤 데이터센터를 둘 것인가. 그 전력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지역 대학과 어떤 인재 과정을 만들 것인가. 지역 중소기업은 그 인프라를 어떻게 쓸 것인가. 주민에게는 무엇이 돌아갈 것인가. 전기와 물, 땅과 세금의 계산서는 누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AI 균형발전은 또 다른 구호가 된다. 기업도 답해야 한다. 지방의 전기와 부지를 쓰면서 지역에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지역 대학과 인재를 키울 것인가. 협력사에 AI 도구와 데이터를 나눌 것인가. 지역 스타트업이 인프라를 활용할 길을 열 것인가. 아니면 세제 혜택과 낮은 비용만 취하고 떠날 것인가. AI 시대 기업의 책임은 기부금 몇 줄로 끝나지 않는다. 지역의 자원을 쓰는 만큼 지역의 역량을 키우는 책임도 져야 한다. AI 시대의 가장 큰 착각은 기술이 스스로 균형을 만든다는 믿음이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격차를 줄이기도 하고 키우기도 한다. AI 데이터센터가 수도권 기업의 비용 절감 도구가 되면 지방은 또 뒤처진다. 피지컬 AI가 대기업 공장의 효율화 장치에 그치면 중소기업은 또 밀려난다. AI 고속도로가 지역 산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미래의 길이 아니라 낡은 집중의 새 포장도로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AI는 수도권만의 산업인가. 지방은 또다시 전기와 땅과 청년을 내주는 역할만 해야 하는가. 데이터센터는 지역의 미래인가 아니면 지역이 감당해야 할 새 비용인가. 피지컬 AI는 제조업 전체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몇몇 대기업의 공장 안에서만 작동할 것인가. AI를 모르는 것도 위험하다. 그러나 AI를 너무 좁게 보는 것은 더 위험하다. 챗봇 성능만 보는 나라, 데이터센터를 건물로만 보는 나라, 지방 분산을 입지 문제로만 보는 나라는 AI 시대의 본질을 놓친다. AI는 이미 국토의 문제다. 전력의 문제이고 지역 산업의 문제이며 교육과 일자리의 문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AI 인프라는 지역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건물만 가서는 안 된다. 인재도 가야 한다. 데이터도 가야 한다. 교육도 가야 한다. 산업 효과도 가야 한다. 데이터센터를 짓되 지역과 함께 짓고 피지컬 AI를 키우되 지역 제조 생태계와 함께 키워야 한다. 미래는 기술만으로 오지 않는다. 기술을 어디에 놓고 누구와 나누며 어떤 질서로 운영할 것인지 정할 때 온다. AI 시대의 경쟁은 더 큰 모델을 가진 나라와 작은 모델을 가진 나라의 싸움만이 아니다. 기술의 과실을 어디에 남길 것인지 설계하는 나라와 끝내 설계하지 못한 나라의 싸움이다. AI가 다시 수도권으로만 간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산업은 바뀌었는데 국토의 문법은 그대로인 나라. 기술은 미래를 말하는데 운영 방식은 과거에 갇힌 나라. 그런 나라가 AI 강국이 될 수는 없다.
2026-06-28 11: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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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의 귀환, 에너지 안보와 책임의 균형을 세울 때다
문명이 화려해질수록 인간은 때때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는다. 전기가 그렇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의 불빛을 당연한 듯 여기지만, 그 모든 문명의 밑바닥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라는 가장 오래되고도 근본적인 조건이 놓여 있다. 전기가 흔들리면 산업이 흔들리고, 산업이 흔들리면 국가의 경쟁력과 국민의 삶도 함께 흔들린다. 정부가 경북 영덕에 대형 원전 2기, 부산 기장에 국내 첫 소형모듈원전(SMR) 1기 건설 용지를 확정한 것은 그런 점에서 단순한 발전소 건설 계획이 아니다. 신규 원전 부지 선정이 14년 만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에너지 문제를 얼마나 오랫동안 이념과 공포,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묶어 두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제야 비로소 국가 에너지 전략의 저울추를 현실 쪽으로 돌려놓으려는 늦었지만 필요한 결단이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는 전력의 시대다. AI 데이터센터, 첨단 반도체 공장, 배터리 산업, 클라우드 서비스는 막대한 전기를 먹고 자란다. 데이터가 새로운 석유라면 전기는 그 데이터를 움직이는 혈액이다. 안정적인 전력 없이 AI 강국도, 제조업 강국도, 첨단산업의 미래도 없다. 에너지는 더 이상 단순한 산업 정책이 아니라 안보 그 자체다. 국제 정세가 흔들리고 에너지 공급망이 불안정해질수록 자국 안에서 안정적으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국가 생존의 핵심 조건이 된다. 이번 결정에서 주목할 대목은 지역 주민들의 높은 찬성률이다. 영덕 주민 찬성률이 86%에 달했다는 사실은 과거의 이른바 ‘원전 포비아’를 넘어선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말해 준다. 원전은 한때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막연한 공포만으로 국가의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다. 주민들은 이제 위험과 편익, 지역 경제와 국가적 필요를 함께 따져 보기 시작했다. 이는 감정의 정치에서 상식의 정치로 이동하는 중요한 신호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데서 시작된다”고 했다. 에너지 정책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구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필요한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다. 원전 부지 확정은 그 첫걸음이다. 그러나 첫걸음이 옳다고 해서 모든 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큰 결단일수록 그 뒤에는 더 큰 책임이 따라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문제다. 원전을 짓겠다고 하면서 사용후핵연료의 영구처분장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은 책임 있는 국가 운영이 아니다. 지금의 임시 저장 방식은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오늘의 전기를 쓰기 위해 내일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원전 확대가 진정한 국가 전략이 되려면 영구처분장 마련을 위한 사회적 합의와 법적·제도적 장치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공자는 “군자는 의를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한다”고 했다. 원전의 경제성과 효율성만 앞세우고 폐기물 처리라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의로운 정책이 아니다. 정부는 부지 선정과 발전소 건설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사용후핵연료를 어떻게 안전하게 관리하고 최종 처분할 것인지 국민 앞에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원전 정책의 신뢰는 안전 기술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책임 있는 정보 공개와 장기 계획, 그리고 주민과의 정직한 소통에서 나온다. 또 하나의 원칙은 균형이다. 원전이 필요하다고 해서 신재생에너지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태양광과 풍력, 수소와 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미래 에너지 체계의 중요한 축이다. 원전은 안정적인 기저전원으로서 산업을 떠받치고, 신재생에너지는 탄소중립과 지속 가능성의 길을 넓혀야 한다. 어느 하나만을 절대화하는 순간 에너지 정책은 다시 이념의 함정에 빠진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원전 부지 선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안전성 검증, 주민 지원, 지역 경제와의 상생, 폐기물 처리, 전력망 확충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특히 지역 주민의 높은 찬성률을 단순한 정책 명분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찬성한 주민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신뢰와 보상이 따라야 하고, 우려하는 국민들에게는 과학적이고 정직한 설명이 제공되어야 한다. 에너지는 국가의 기본이다. 기본이 흔들리면 화려한 문명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AI 시대의 대한민국이 세계와 경쟁하려면 안정적인 전력 기반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그 기반은 안전과 책임, 균형이라는 세 기둥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번 원전 부지 확정은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우리는 이제 원전 공포를 넘어 현실을 보아야 한다. 동시에 원전 낙관에 취해 미래 세대의 부담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참된 국정은 오늘의 필요와 내일의 책임을 함께 살피는 데 있다. 정부가 원칙을 지키되 섬세하게 조정하고, 국민이 공포가 아니라 상식으로 판단할 때 대한민국의 에너지 안보는 비로소 단단한 토대 위에 설 것이다.
2026-06-20 10: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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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내걸린 공약 'AI 수도'…전력·물·기업은 어디서 오나
[경제일보]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국 광역단체장 후보들의 공약집에 ‘AI(인공지능)’가 전면에 등장했다.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클러스터, 로봇 수도, 양자산업 도시 등 이름은 다르지만 방향은 비슷하다. 지역을 미래산업 거점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실행계획이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전력망, 용수, 부지, 기업 투자, 인력 공급이 맞물려야 가능한 사업이다. 그러나 일부 공약은 산업 이름만 앞세울 뿐 전력 공급 계획이나 용수 확보 방안, 기업 투자 의향, 중앙정부 협의 절차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전국이 AI 수도 경쟁…핵심은 ‘어떻게’다 이번 선거에서 후보들은 앞다퉈 ‘AI 수도’를 내세우고 있다. 대구는 AI·로봇 수도, 경북은 아시아태평양 AI 수도, 충남은 AI 수도, 울산은 AI 산업도시, 전북 새만금은 피지컬 AI 산업수도 등으로 포장됐다. 지역경제 침체와 청년 유출, 제조업 재편에 대응하기 위한 미래산업 전략이라는 점에서 방향 자체는 타당하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공약 검증의 기준은 구호가 아니라 실행력이다. “AI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겠다”는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AI 수도 공약과 관련해 “어느 부지에 짓는지, 전기는 어디서 공급받는지, 냉각수는 어떻게 확보하는지, 어떤 기업이 투자 의향을 보였는지, 지역 인력은 어떻게 양성할 것인지가 함께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책 공약은 유권자에게 비교 가능한 정보여야 한다”며 “후보가 중앙선관위에 제출한 공약서에 사업명과 기대효과만 있고 재원 조달, 인허가 일정, 정부·기업 협의 단계가 없다면 선거용 청사진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데이터센터 첫 조건은 전력망과 물 AI 데이터센터의 첫 번째 조건은 전력이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기를 필요로 한다. 특히 AI 학습과 추론에 쓰이는 고성능 서버는 전력 소비가 크다. 변전소, 송전선로, 전력계통 접속 가능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데이터센터 공약은 착공 단계에서부터 막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도 데이터센터 수요가 별도 전력 수요로 반영됐다. 그만큼 데이터센터가 국가 전력망에 부담을 주는 산업이라는 뜻이다. 후보가 데이터센터를 말하려면 한국전력, 산업통상자원부, 지자체 전력계통 계획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물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AI 데이터센터는 서버 냉각을 위해 에너지와 냉각 인프라를 필요로 한다. 한 지역개발 전문가는 “지역에 따라 상수도, 공업용수, 재이용수, 해수 활용 가능성이 달라진다. 농업용수나 생활용수와 충돌할 경우 주민 수용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며 “ 때문에 공약에는 냉각 방식, 용수 조달, 폐열 처리, 환경 영향 관리 방안이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로봇 공약도 기업과 인재 없으면 공허 반도체 공장 공약은 더 높은 수준의 검증이 필요하다. 반도체 팹은 △대규모 전력 △초순수 △폐수 처리 △화학물질 관리 △고급 인력 △협력업체 생태계 등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지방자치단체체장 의지만으로 유치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기업의 중장기 투자 계획, 국가첨단전략산업 정책, 세제 지원, 인허가 일정이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검증 기준은 분명하다. 유치 대상 기업이 특정돼 있는지, 투자 의향서나 양해각서가 있는지, 부지와 인허가 일정이 있는지, 전력·용수·폐수 처리 계획이 있는지, 지역 대학과 특성화고를 통한 인력 공급 방안이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로봇 수도, 양자산업 도시 공약도 마찬가지다. 로봇산업은 기업 몇 곳을 유치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제조·물류·의료·돌봄 현장의 수요처, 실증공간, 규제 완화, 유지보수 인력이 필요하다. 양자산업은 대학과 연구기관, 대기업 연구개발 투자, 장기 국책사업과 연결돼야 한다. 산업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 산업 구조와의 적합성이다. 유권자는 ‘AI 계산서’를 봐야 한다 전국 지자체가 AI와 반도체를 미래 먹거리로 내세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 지역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미래산업 공약일수록 더 구체적인 계산서가 필요하다 게 전문가들의 주문이다. 한 정치컨설팅 관계자는 “유권자는 후보에게 다섯 가지 정도를 물어야 한다”며 “전력망 접속 가능성은 확인했는가. 용수와 냉각 방식은 무엇인가. 기업 투자 의향은 문서로 확보했는가. 부지는 인허가가 가능한가. 지역 인재 양성 계획은 있는가 등이다”라고 말했다.
2026-05-30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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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초과이익, 그 몫은 누구에게 있는가
[경제일보]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급한 불을 껐다. 파국 직전 멈춰 선 파업 시계는 잠정합의안이라는 봉투에 담겨 조합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질문은 남았다. 인공지능(AI) 호황의 파도를 탄 반도체 부문이 창출할 거대한 초과이익, 그 잉여는 과연 누구의 몫인가. 노조가 요구했던 ‘영업이익의 15%’라는 숫자는 단순한 임금협상을 넘어 한국 자본주의의 기본 문법을 묻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이재명 대통령조차 이 문제를 피해 가지 않았다. 외신들은 대통령이 노조의 ‘세전 영업이익 배분’ 주장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고 전했다. 노동 친화적 정부의 수장이 특정 기업 노사 문제에 이런 메시지를 낸 것은 가볍지 않다. 반도체는 일반 제조업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한국 수출의 4분의 1을 떠받치는 기둥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심장이다. 정부가 긴급조정권까지 검토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노사 분쟁이 회사 담장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국가 경제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냉정한 판단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고 파업의 위험이 크다고 해서 노동자의 몫을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삼성전자가 막대한 이익을 냈다고 해서 그 전부가 임금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없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기업의 이익은 성격이 있다. 매출에서 온갖 비용을 제하고 남는 금액은 단순한 현금 더미가 아니다. 그 안에는 과거 투자에 대한 회수, 미래를 위한 재투자 재원, 주주가 떠안은 위험에 대한 보상, 국가가 징수할 세금 그리고 구성원에게 돌아갈 성과 보상이 뒤섞여 있다. 이 복잡한 꾸러미를 어느 한쪽이 “이것은 내 몫”이라고 선을 긋는 순간 기업은 생산 조직이 아니라 분배 투쟁의 경기장이 된다. 회사의 비용에는 눈에 보이는 운영비용과 잘 보이지 않는 자본비용이 있다. 임금, 전력비, 협력업체 대금은 장부에 선명히 잡힌다. 그러나 더 무거운 것은 자본비용이다. 반도체 공장 하나에 수십조 원, EUV 장비 한 대에 수천억 원이 들어간다. 오늘 쏟아부은 자본이 내일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메모리 가격은 곤두박질치고 경쟁사는 무섭게 추격한다. 불과 2023년, 삼성전자의 연간 영업이익은 6조 원대까지 추락했다. 호황기의 초과이익만 보려면 이 혹독했던 적자의 기억도 함께 봐야 한다. 2023년의 손실은 누가 떠안았나. 임금을 받은 노동자는 월급을 토해내지 않았다. 협력업체도, 채권자도 약속된 돈을 받았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것은 주주였다. 주가는 이익 전망을 따라 흔들리고 자기자본은 손실을 흡수한다. 이것이 주식회사의 기본 원리다. 주주가 마지막에 남는 것을 가져가는 ‘잔여청구권’을 갖는 이유는 모든 것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맞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의 기여는 부정할 수 없다. 삼성전자 반도체의 초격차는 엔지니어들의 밤샘 노동 위에 세워졌다. 그들에게 충분하고 투명한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 노조가 “성과급 산정 기준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성과주의를 말하려면 성과의 계산법부터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영구적 권리처럼 임금으로 고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영업이익은 주주의 돈이기 전에 회사의 미래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HBM, 차세대 D램, 파운드리 미세공정. 이 모든 것은 오늘의 이익을 내일의 기술에 쏟아부어야만 유지되는 살얼음판 경쟁이다. 오늘의 초과이익을 모두 현금으로 나눠버리면 내일의 연구개발은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 반도체 산업에서 투자를 멈춘 기업의 운명은 죽음뿐이다. 유럽의 사례는 서늘한 경고다. 유럽은 오랫동안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모범을 자처했다. 노동자 보호, 사회적 합의의 이름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AI와 반도체의 시대에 유럽은 주도권을 잃었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EU 경쟁력 보고서에서 투자 부족과 생산성 둔화를 통렬하게 지적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본진에서 나온 자기반성이었다. 한국은 유럽을 닮을 여유가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밀리면 그 충격은 주주 몇 명의 손실로 끝나지 않는다. 협력업체, 수출, 세수, 청년 일자리까지 국가 경제 전체가 휘청인다. 그래서 삼성의 이익 논쟁은 임금협상인 동시에 산업정책이다. 노동자에게 더 많은 성과 보상이 필요하다면 길은 있다. 현금 성과급만이 답은 아니다. 회사의 장기 가치 상승에 참여하는 주식 보상이야말로 노동자와 주주의 이해를 맞추는 진정한 공동체의 길이다. 위험은 주주에게만 남기고 이익은 매년 영업이익 비율로 먼저 떼어가자는 구조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손실 없는 잔여청구권이며 세상에 그런 권리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삼성전자 노사가 잠정합의에 이른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투표가 끝나도 논쟁은 끝나지 않는다. AI가 만들어낼 거대한 초과이익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앞으로 더 거세질 것이다. 그때마다 분노와 구호로 답하면 산업은 버티지 못한다. 상식은 단순하다. 노동은 존중받아야 하고 위험을 건 자본도 존중받아야 한다. 국가는 세금으로 기업은 미래 투자로 각자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느 하나를 절대화하면 나머지는 무너진다. 삼성의 초과이익은 모두의 땀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청구할 수는 없다. 그것이 주식회사의 질서다. 그 질서가 무너지면 나눌 이익 자체가 사라진다.
2026-05-21 14: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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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심장'서 벌어지는 경제 재건 경쟁
[경제일보] 대구시장 선거가 이번 지방선거의 핵심 승부처로 떠오르고 있다. 대구는 오랫동안 보수 정당의 강세 지역으로 분류돼 왔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와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가 오차범위 안팎의 접전을 벌이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의힘은 지난 4월 26일 추 후보를 대구시장 후보로 확정했고, 이로써 김 후보와의 본선 대진이 완성됐다. 주호영 국회부의장과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무소속 출마를 접으면서 보수 표심 분산 가능성도 상당 부분 정리됐다. 이번 선거의 표면은 정당 대결이지만, 본질은 경제다. 대구 시민이 묻는 질문은 단순하다. ‘누가 대구 경제를 다시 움직일 수 있는가’, ‘누가 청년을 붙잡을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가’, ‘누가 신공항, 행정통합, 미래산업, 민생경제를 구호가 아니라 실행계획으로 바꿀 수 있는가’ 등이다. 지난 2024년 국가데이터처의 지역소득 잠정 자료에서도 대구는 제조업과 건설업 부진 등으로 실질 지역내총생산이 전년보다 0.8% 감소한 지역으로 나타났다. 대구 경제의 체감 위기가 이번 선거의 중심 의제가 된 이유다. 현재 여론은 혼전이다. SBS가 입소스에 의뢰한 여론조사(SBS 의뢰, 입소스 수행, 2026년 5월 1~3일, 대구 거주 만 18세 이상 유권자 801명 대상, 무선 전화면접조사, 성·연령·지역 할당 후 무선 가상번호 추출, 응답률 12.6%,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5%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또는 SBS 홈페이지 참조)에서 김 후보는 41%, 추 후보는 36%의 지지율을 보였다. 두 후보의 격차는 5%포인트로 오차범위 안이며, 부동층은 21%였다. 중도층에서는 ‘김부겸 54%·추경호 23%’로 김 후보가 우세했지만, 정권 지원론 41%, 정권 견제론 44%로 선거 구도 자체는 팽팽했다. 차기 대구시장의 최우선 과제로는 일자리와 서민경제 지원이 50%로 가장 높았고, 미래산업 육성 19%, 대구경북 신공항 건설 14% 순이었다. 대구MBC가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대구MBC 의뢰, 에이스리서치 수행, 2026년 5월 2~3일, 대구 거주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4명 대상, ARS 조사, 응답률 6.1%,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는 ‘김부겸 45.9%·추경호 42.4%’로 나타났다. 격차는 3.5%포인트로 역시 오차범위 안이다. 특히 4월 중순 1차 조사에서 14.1%포인트였던 두 후보 격차가 국민의힘 후보 확정 뒤 크게 줄었다는 점은 보수층 결집이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같은 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9.5%, 민주당 31.1%로 국민의힘이 앞섰고, 최우선 현안은 일자리 창출 51.9%, 신공항 이전 15.2%, AI 등 미래 신산업 육성 13.9%였다. 다만, 여론조사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읽을 필요가 있다. 실제 KBS대구·한국리서치 전화면접 조사(KBS대구총국 의뢰, 한국리서치 조사, 2026년 4월 27~29일, 대구 거주 만 18세 이상 시민 800명 대상, 휴대전화 가상번호를 활용한 면접원 전화면접조사 방식, 응답률 20.5%,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5%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는 ‘김부겸 38.4%·추경호 31.2%’였지만, 매일신문·한길리서치 ARS 조사에서는 ‘추경호 46.1%·김부겸 42.6%’로 결과가 엇갈린 바 있다. 같은 지역, 비슷한 시기의 조사라도 전화면접과 ARS, 재질문 여부, 응답률, 표본 구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구 판세는 ‘김부겸 우세’나 ‘추경호 역전’으로 단정하기보다 김 후보의 개인 경쟁력과 추 후보의 보수 결집력이 충돌하는 초접전 구도로 보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인물’은 합격점·‘간판’은 약점…GRDP 150조·일자리 10만개 ‘현실성’ 관건 김 후보의 강점은 대구에서 축적한 정치적 확장성이다. 그는 민주당 후보이지만 대구 유권자에게 완전히 낯선 인물이 아니다. 또한 김 후보는 행정안전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경험, 여당과 중앙정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자신의 핵심 자산으로 내세우고 있다. 약점도 분명하다. 대구에서 민주당 간판은 여전히 무겁다. SBS 조사에서 정당 구도는 정권 지원론보다 정권 견제론이 근소하게 높았고, 대구MBC 조사에서도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오차범위 밖에서 앞섰다. 김 후보 개인 지지율이 민주당 지지율보다 높다는 것은 강점이지만, 동시에 민주당에 대한 지역 불신을 후보 개인이 계속 돌파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회는 산업 전환 공약에 있다. 김 후보는 ‘대구 산업 대전환’을 1호 공약으로 내세우며 경제 재도약, 민생경제 활성화, 균형발전을 3대 비전으로 제시했다. 김 후보는 오는 2035년까지 대구 GRDP를 150조원 규모로 키우고, 양질의 일자리 10만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또 대구를 ‘남부권 판교’, 양자산업과 AI 로봇 수도, AX 도시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제시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김 후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공약의 현실성 검증이다. GRDP 150조원, 일자리 10만개, AI·양자·로봇 수도라는 목표는 크다. 하지만 대구 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큰 단어보다 실행 경로다. 어느 산업단지에 어떤 기업을 유치할 것인지, 청년 임금은 얼마나 높일 것인지, 신공항과 산업단지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따라붙지 않으면 미래산업 공약은 추상론으로 흐를 수 있다. ◆‘경제 해결사’ 자임…공천 피로감·‘12·3 계엄 수사’ 암초 추 후보의 강점은 경제관료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고, 대구 달성에서 3선을 한 현역 정치인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추 후보는 대구 경제를 살릴 적임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대구 주력 산업을 AI와 미래 모빌리티 등 첨단산업으로 전환하고 반도체 클러스터와 국가대표 창업도시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추 후보의 약점은 공천 과정의 피로감과 보수 정당에 대한 책임론이다. 국민의힘 후보 확정 전까지 대구 공천을 둘러싼 갈등이 노출됐고, 추 후보 본인도 후보 확정 전 당내 혼선과 민심 이반을 인정하는 취지의 설명한 바 있다. 대구가 보수의 강세 지역이라는 사실은 추 후보에게 기반이지만, ‘어차피 보수’라는 인식은 오히려 유권자의 피로감을 키울 수 있다. 기회는 보수 결집과 경제 프레임이다. 이에 추 후보는 대구 경제 회복과 청년 유출 방지를 위해 첨단산업 육성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유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추 후보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중도층 열세다. SBS 조사에서 중도층만 놓고 보면 ‘김부겸 54%·추경호 23%’였다. 대구 선거에서 국민의힘 지지층 결집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보수층을 결집하면서도 중도층에 ‘경제를 맡길 수 있는 후보’라는 신뢰를 줄 필요가 있다. 또한 12·3 비상계엄 관련 수사와 정치적 공방이 선거 쟁점으로 커질 경우, 경제 메시지가 흐려질 위험도 있다. ◆‘이념’보다 ‘일자리’…중도층·보수 결집 강도 핵심 변수 김 후보의 히든카드는 여당 후보의 실행력이다. 그는 중앙정부와의 협력, 대구·경북 행정통합, 신공항, 기업은행 이전, AI 산업전환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으려 한다. 대구 시민에게 ‘이번에는 예산과 권한을 가져올 수 있다’는 신뢰를 주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반면, 추 후보의 히든카드는 경제부총리 경험과 보수 결집이다. 그는 경제를 아는 후보, 기업을 유치할 후보, 대구 산업구조를 바꿀 후보라는 이미지를 전면에 세우고 있다. 특히 반도체 공장 유치, AI·미래 모빌리티 전환, 창업도시 구상은 대구의 청년 유출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대구 선거의 승부처를 크게 ‘일자리’, ‘중도층’, ‘보수 결집 강도’ 세 가지로 전망하고 있다. SBS, 대구MBC 등의 여론조사에서는 모두 일자리와 서민경제가 최우선 과제로 꼽였고, 김 후보와 추 후보는 각각 ‘중도 우위 유지’, ‘중도 열세 회복’의 숙제를 안고 있다. 아울러 대구라는 지역의 특성상 보수 결집의 강도는 두 후보의 희비가 가르는 여전히 막강한 변수다. 다만, 대구는 이번 선거에서 이념만 묻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대구 시민은 이미 오래 기다렸다. 청년은 떠났고, 제조업은 늙었고, 신공항은 아직 체감되지 않는다고들 한다”며 “선거 과정에서 김 후보의 경우 ‘중앙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시장’임을 증명해야 하고, 추 후보는 ‘경제를 실제로 살릴 수 있는 시장’임을 각각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2026-05-09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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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공장은 선거 현수막 위에 지어지지 않는다
[경제일보] 선거철만 되면 기이한 신기루가 피어오른다. 삽을 뜰 부지도, 흘려보낼 물도, 끌어올 전기도 없는데 현수막 위엔 어느 날 갑자기 ‘삼성 반도체 유치’라는 거창한 활자가 박힌다. 기업의 의사조차 묻지 않은 일방적인 구애이자 선언이다. 말은 깃털처럼 가볍고 공장은 태산처럼 무겁다. 표는 오늘 당장 필요하겠지만, 반도체 팹(Fab)은 10년 뒤의 미래를 내다보고 짓는 국가적 명운이 걸린 유기체다. 최근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들이 다투어 내놓는 반도체 공약은 위험천만하다. 대구와 광주, 전남 등지에서 들려오는 ‘10조원 규모 시설 유치’ 소식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현장은 비명에 가깝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용인과 평택을 축으로 수백조원대 투자를 확정하고 초격차를 위한 속도전에 돌입한 상태다. 기업의 경영 논리와 정치의 선거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가 산업을 말하는 것은 마땅한 책무다. 수도권 쏠림과 지역 소멸의 절벽 앞에서 반도체라는 전략 자산을 지역의 미래와 연결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권장돼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의 천박함에 있다. 정치가 기업을 부르는 것과, 기업의 이름을 빌려 표를 구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다. 반도체 공장은 축구장 몇 개 넓이의 땅에 콘크리트 건물을 세운다고 돌아가는 단순 시설이 아니다. 전력과 용수, 도로와 폐수 처리, 송전망과 협력사 생태계, 그리고 고도로 훈련된 인재와 교육·의료·주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인공 도시’다. 팹 하나를 짓는다는 것은 도시의 거대한 혈관계를 새로 이식하는 일과 같다. 하지만 선거판에서는 이 복잡한 산업 생태계가 한 줄의 시원한 구호로 증발해 버린다. “우리 지역에 삼성을 가져오겠다”는 호언장담 뒤에 실질적인 책임은 어디에도 없다. 정부 자료가 증명하는 숫자의 무게를 보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완공되는 2053년까지 필요한 전력은 10GW(기가와트) 이상이다. 하루에 쓰이는 물만 133만 톤에 달한다. 인구 300만 인천시민이 쓰는 물의 양을 반도체 공장 하나가 삼키는 꼴이다. 송전선로 하나를 까는 데만 수조 원의 예산과 주민 설득이라는 고차방정식이 필요하다. 이 엄중한 숫자 앞에서 정치인의 ‘공장 유치’라는 말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10GW의 전력은 말로 끌어올 수 없고, 100만 톤의 물은 현수막 사이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산업정책에는 정교한 지도가 있고, 냉정한 숫자가 있으며, 명확한 비용 분담과 책임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반면, 선거용 공약에는 오직 ‘이름’만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단어인 ‘삼성’,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합해 환상을 팔 뿐이다. 하지만 자본은 애향심이나 표심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고객과 납기, 수율과 원가, 전력의 안정성이라는 차가운 계산기 위에서만 투자의 발길을 옮긴다. 그 계산기에서 숫자 하나만 어긋나도 수십조의 투자는 멈춰 선다. 지방의 절박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수도권의 비대화가 지역의 골목을 비워내고 있는 현실은 뼈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기업의 투자 결정을 선거용 땔감으로 쓰는 행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지역 발전을 원한다면 기업의 이름보다 ‘조건’을 먼저 내밀어야 한다. 송전망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용수는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대학은 어떤 인재를 키워낼 것인가. 이 치열한 고민이 빠진 유치는 공약(公約)이 아니라 공염불에 불과하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정명(正名)’을 말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일이 성취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정치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정명이다. 기업의 독립적 의사결정을 마치 지자체가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이름부터 틀렸다. ‘유치’라고 부르기 전에 ‘조성’이라 해야 하고, ‘공장’을 약속하기 전에 ‘인프라’를 약속해야 한다. ‘삼성’을 외치기 전에 ‘전기’를 말하는 것이 순리다. 정치권의 무책임한 한마디는 기업에겐 치명적인 ‘리스크’가 된다. 외국 투자자들은 투자처가 바뀌느냐고 묻고, 협력사는 짐을 싸야 하느냐며 동요한다. 기업이 사실무근이라 밝히면 정치권과 각을 세우는 꼴이 되고, 침묵하면 거짓 공약을 묵인하는 셈이 된다. 기업 관계자들이 쏟아지는 문의 전화에 본업을 망칠 지경이라는 토로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이제 원칙을 세울 때가 됐다. 첫째, 특정 기업명을 적시한 공약은 반드시 사전 협의 여부를 공개해야 한다. 둘째, 대규모 산업 공약에는 전력·용수·재원 계획 등 구체적인 데이터가 첨부돼야 한다. 셋째, 선거관리 기구가 이러한 경제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가전략산업의 위상을 빌린 공약이라면, 그에 걸맞은 무게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부와 정치는 인프라를 닦고 규제를 걷어내는 조력자여야 하며, 기업은 그 토대 위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를 결정하는 주체여야 한다. 이 경계가 허물어질 때 산업정책은 계획경제의 아류가 되고, 선거 공약은 경영에 대한 오만한 월권이 된다. 반도체는 대한민국이 세계와 ‘맞짱’ 뜰 수 있는 마지막 성벽이다. 이 성벽은 정치 구호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엔지니어의 밤샘과 장비의 정밀도,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고독한 결단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결정체다. 그 숭고한 성벽을 선거판의 배경 그림으로 소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무례한 일이다. 정치가 할 일은 삼성을 현수막에 올리는 것이 아니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이 땅에 더 깊고 안전하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전력과 물, 그리고 사람의 길을 여는 것이다. 반도체 공장은 표밭이 아니라 국가의 심장이다. 선거가 끝나고 후보가 떠나도 송전탑은 서 있어야 하며, 구호가 사라져도 엔지니어는 출근해야 한다. 정치권에 묻는다. 진정 반도체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기업의 이름부터 내려놓고 전력망 도면부터 펼쳐라. 그것이 산업을 대하는 정당한 ‘상식’이다.
2026-05-08 13: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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