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2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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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노사 성과금 갈등,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
[경제일보]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가까스로 파국을 피했다. 총파업 예고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노사가 2026년 임금협상 잠정 합의안을 도출하면서 반도체 생산 차질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단 멈춰 섰다. 다만 오는 22∼27일 이 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투표라는 절차가 남아 있는 만큼 이를 완전한 종결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이번 잠정 합의는 정부의 적극적 중재 속에 이뤄졌고, 투표가 가결되면 협상이 공식 타결된다. 문제는 합의 그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균열이다. 삼성전자 노사 갈등의 핵심은 성과급이었다. 노조는 성과급 산정 기준과 배분 방식의 제도화를 요구했고 회사는 경영환경과 사업부별 실적, 글로벌 경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돌아왔고, 인공지능(AI) 열풍이 삼성전자의 실적을 밀어올린 것은 사실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매출 133조9000억원, 영업이익 57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반도체(DS)부문은 AI 고부가 제품 판매 확대와 메모리 가격 상승으로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냈고 HBM4와 차세대 저전력 메모리 모듈 양산도 시작했다. 그러나 좋은 실적이 곧 무제한의 성과급 요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성과는 나눠야 한다. 하지만 성과 배분은 기업의 미래 투자, 주주 책임, 협력사 생태계, 국가경제에서의 역할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한 기업이지만 동시에 한국 제조업과 수출, 고용, 자본시장 신뢰를 떠받치는 핵심 축이다. 반도체 라인이 멈추면 한 회사의 손익계산서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 기업, 물류, 전력, 협력업체, 지역경제, 금융시장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일반적인 임단협 갈등과 차원이 다르다. 삼성전자 구성원들이 더 나은 보상과 투명한 성과급 기준을 요구할 권리는 당연하다. 고성과를 낸 조직이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요구의 수준과 방식이다. 성과급이 경영 성과와 연동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기업의 중장기 투자 여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훼손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 산업은 오늘 벌어 내일 나누는 장사가 아니다. 수십조 원의 선행 투자가 필요하고 기술 세대가 바뀔 때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더 우려되는 것은 노노 갈등이다. 성과급 갈등은 같은 회사 안에서도 사업부별 이해관계를 가른다. 반도체 부문이 초과 성과를 냈다고 해서 전사 구성원이 같은 방식으로 나눠야 하는지, 사업부별 기여도와 위험 부담을 어떻게 반영할지, 장기 투자에 필요한 내부 유보를 어느 정도 인정할지에 대한 논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동체의 원칙을 세우는 방향이 아니라 ‘누가 더 가져갈 것인가’의 다툼으로 흐르면 조직 내부 신뢰가 무너진다. 기업의 경쟁력은 기술과 설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구성원 간 신뢰, 경영진에 대한 신뢰, 성과 배분의 예측 가능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 삼성전자의 갈등은 다른 대기업 노사관계에도 파장을 주고 있다. 카카오 노조는 카카오 본사를 포함한 5개 법인에서 파업 찬반 투표가 모두 가결됐다고 밝혔다. 카카오 노조는 경영 쇄신, 책임 경영, 고용 안정, 공정한 성과 보상과 이익 분배 등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성과급 배분 구조가 갈등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카카오 본사가 실제 파업에 나서면 창사 이래 첫 본사 파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상징성이 작지 않다. 노사 갈등의 확산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불안과 맞물려 더 무겁다. 지금 한국경제는 겉으로는 반도체 훈풍을 타고 있지만 속으로는 성장 체력이 빠르게 약해지고 있다. IMF는 올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9%로 전망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100대 지표에서도 2026년 1분기 경제성장률은 1.7%로 제시돼 있다. 단기 경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는 노동공급과 내수 기반을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는 2025년 합계출산율을 0.80명, 출생아 수를 25만4500명으로 집계했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025년 20.3%에서 2072년 47.7%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외 리스크도 크다. IMF는 2026년 세계경제가 중동전쟁의 충격 속에서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고 진단했다. 제한적 충돌을 가정해도 세계 성장률은 2026년 3.1%, 2027년 3.2%로 둔화될 것으로 봤고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기대, 금융 여건 긴축이 세계경제의 회복력을 시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미국의 관세정책과 공급망 재편, 기술 패권 경쟁이 겹치면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제조기업은 비용과 시장 양쪽에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역시 하반기 전망에서 글로벌 관세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등 다양한 리스크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내부의 성과 배분 갈등이 장기화하면 국가경제의 부담은 커진다. 한국경제는 지금 새로운 성장동력을 충분히 발굴하지 못한 채 반도체 의존도를 다시 키우고 있다. AI 반도체 호황은 분명한 기회지만 이것이 영구적 안전판은 아니다. 메모리 가격은 사이클을 탄다. HBM 경쟁은 기술과 수율, 고객 인증에서 매 분기 승부가 갈린다. 중국의 추격, 미국의 규제, 대만의 파운드리 우위, 일본의 소재·장비 부활까지 감안하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호황기일수록 더 냉정해야 한다. 노조도 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노동의 몫을 키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훼손하는 요구는 결국 노동의 기반도 약하게 만든다. 성과급은 권리의 언어만으로 풀 수 없다. 책임의 언어가 함께 있어야 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고성과를 낸 직원들에게 ‘어렵다’는 말만 반복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성과급 산정 기준을 더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업부별 성과와 전사 기여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불투명한 보상 체계는 언제든 불신을 낳고, 불신은 파업보다 더 오래가는 비용을 만든다. 노조와 회사가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 노동은 노동의 권리를 말하고, 경영은 경영의 책임을 말해야 한다. 다만 그 다름이 기업의 존속과 국가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충돌로 가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노사 합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성과급 제도의 투명성, 사업부별 기여도 반영, 장기 투자 재원 확보, 위기 시 고통 분담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성과가 클수록 배분의 원칙은 더 정교해야 한다. 호황일수록 미래 투자와 위험 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국경제는 지금 운 좋게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길목에 서 있다. 그러나 저출산, 잠재성장률 하락, 내수 부진, 대외 불확실성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다.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지금의 성과를 오늘 모두 나눌 것인가, 아니면 내일의 경쟁력을 위해 원칙 있게 나눌 것인가. 성과 배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경제의 기둥을 흔드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노사는 이번 합의를 계기로 ‘더 많이 가져가는 협상’이 아니라 ‘더 오래 살아남는 협상’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삼성전자에도, 노동자에게도, 한국경제에도 이롭다.
2026-05-21 09: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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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조 가계부채와 금리 폭탄의 전방위 압박, '파국' 막을 골든타임 놓치지 말라
[경제일보] 대한민국 경제가 미증유의 복합 위기, 이른바 ‘퍼펙트 스톰’의 초입에 들어섰다.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 장기화로 국제 유가와 물가가 춤을 추자, 미국 국채 금리가 5%를 돌파하는 등 글로벌 채권 금리가 일제히 치솟고 있다. 국내 금융시장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코스피가 하루 만에 3% 넘게 폭락하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 와중에, 민생 경제의 가장 취약한 고리인 가계부채는 마침내 2000조 원 돌파를 눈앞에 둔 1993조 1000억 원까지 불어났다. 고금리와 물가 상승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주택 구입)’과 ‘빚투(대출로 주식 투자)’의 불길이 꺼지지 않은 결과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부채의 질적 악화다. 정부가 은행권 문턱을 높이자 대출 수요가 제2금융권으로 몰리는 전형적인 ‘풍선 효과’가 확인됐다. 1분기 비은행권 주택 대출은 전 분기보다 배 이상 급증했다. 제1금융권보다 금리가 높고 부실 위험이 큰 저축은행, 상호금융, 새마을금고의 부채가 늘어났다는 것은 가계의 기초체력이 급격히 저하됐음을 뜻한다. 여기에 증권사 신용공여와 마이너스통장을 통한 고위험 레버리지 투자까지 가세했다. 만약 가계부채라는 시한폭탄이 글로벌 긴축 충격과 맞물려 터진다면, 과연 이를 무엇으로 막아낼 것인가.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능가하는 내수 파탄과 시스템 붕괴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경고를 결코 과장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정부와 금융 당국은 구두 경고나 사후약방문식 대처에서 벗어나 즉각적이고 선제적인 차단책을 집행해야 한다. 첫째, 비은행권으로 향하는 우회 대출 통로를 철저히 차단하는 ‘가계부채 총량 관리’의 고삐를 죄어야 한다. 제2금융권의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를 예외 없이 강화하여 갚을 수 있는 능력 범위를 넘어선 대출은 원천 봉쇄해야 한다. 둘째,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인하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명확한 선을 긋고, 필요하다면 추가 인상까지 고려하는 정교한 통화정책의 ‘깜빡이’를 켜 시장의 과열 심리를 진정시켜야 한다. 대출금리가 0.25%포인트만 올라도 가계 이자 부담이 3조 2000억 원 늘어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계 차주들을 위한 선별적 채무조정 및 고정금리 대환대출 프로그램의 확대 등 정밀한 미시적 보완책도 병행되어야 마땅하다. 해외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0년대 초반 북유럽 국가들이나 가계부채 비율이 높았던 네덜란드의 경우, 주택담보대출 비율(LTV)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을 법적으로 엄격히 제한하는 ‘거시건전성 규제’를 선제적으로 도입해 위기를 극복했다. 미국 역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금융소비자보호국(CFPB)을 신설하고 대출 심사의 엄격성을 제도화함으로써 가계 부실이 금융 시스템 전체로 전이되는 것을 막았다. 우리 정부도 이처럼 시장의 자율성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가계와 기업의 자금 조달 리스크를 전방위로 모니터링하고 고위험 금융상품 판매 규율을 선제적으로 강화하는 제도적 제동장치를 구축해야 한다. 정부 스스로의 행보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민생을 돕겠다며 공언한 확장재정 기조와 올해 예정된 110조 원의 적자국채 발행은 오히려 국채 금리를 밀어 올려 시중 금리를 상승시키는 모순을 낳고 있다. 정부는 초과 세수를 활용해 적자국채 발행을 줄이겠다는 명확한 시그널을 시장에 보냄으로써 재정 건전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지금은 가계, 기업, 정부 모두가 대외 긴축 장기화를 염두에 두고 뼈를 깎는 위험 관리에 나설 때다. 가계부채 2000조 원이라는 임계점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가 끊어지고 난 뒤에 움직이면 이미 늦는다. 파국을 막을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2026-05-20 1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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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당금'이라는 위험한 수사(修辭), 정책 사령탑의 가벼움이 시장을 흔든다
[경제일보]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쏘아 올린 ‘인공지능(AI) 국민배당금’ 논의가 우리 경제계와 자본시장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AI와 반도체 산업의 유례없는 호황으로 발생할 최대 70조 원 규모의 초과 세수를 전 국민에게 현금 형태로 환원하자는 제안이다. 국가 정책의 물줄기를 잡는 정책 사령탑이 SNS를 통해 던진 이 화두는 논쟁적인 수준을 넘어 위태롭기까지 하다. 국정 운영의 핵심 참모는 그 입의 무거움이 곧 국가의 신뢰도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 사태는 정책의 본질을 망각한 채 수사적 포퓰리즘에 기대어 시장의 질서를 교란한 전형적인 '메시지 리스크'다. 김 실장의 논리는 AI 시대의 과실이 특정 기업의 노력이 아닌, 수십 년간 축적된 국가적 산업 기반 위에서 피어난 것이니 이를 '구조적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공정의 가치를 담은 듯 보이지만, 이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와 기업가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기업의 이윤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생존을 건 투자와 기술 혁신의 결과물이다. 이를 '국민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환원하려는 움직임은 자칫 기업의 투자 의지를 꺾고 자본의 해외 유출을 가속화할 뿐이다. 실제로 김 실장의 발언 직후 코스피 지수가 5% 이상 급락하며 8,000선을 넘보던 장세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은 시장이 이 제안을 얼마나 심각한 위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정책 결정권자의 '지나친 낙관론'이다. 현재의 반도체 호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거액의 사용처를 미리 정해놓는 것은 재정 운용의 기본 원칙인 '신중함'을 저버린 처사다. 반도체 산업은 사이클의 변동성이 극심하며,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쏟아 붇으며 우리 턱밑까지 추격해 오고 있다. 지금은 초과 이윤을 어떻게 나눠 쓸지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 초격차 유지를 위해 R&D 지원을 확대하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은 핵심 인프라 구축에 재원을 집중 투입해야 할 때다. 또한, 국가재정법은 세계잉여금의 일정 비율을 국채 상환에 우선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랏빚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황에서 미래 세대에게 짐을 넘기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이를 두고 '포퓰리즘적 긴축'이라 비난하며 현금 살포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무책임하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농어촌 기본소득이나 노령연금 강화 등을 언급하는 것은 정책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며, 국가 재정을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정책의 책임 있는 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신중하고 조심해도 과하지 않다. 설익은 아이디어를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던져 시장에 혼란을 초래하고, 외신이 이를 '횡재세'로 오인해 보도하게 만든 뒤 해명에 급급한 모습은 볼썽사납다. 국정의 최고위 경제 참모라면 장밋빛 전망에 취해 대중의 인기를 좇을 것이 아니라, 냉혹한 글로벌 경제 전쟁터에서 우리 기업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실효적 전략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 세금은 정부가 국민에게 베푸는 '시혜적 현금'이 아니다. 국가의 존립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정부는 이제라도 '국민배당금'이라는 선정적인 수사를 거두고, 초과 세수를 국가 경쟁력 강화와 재정 건전화라는 본연의 목적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할지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 신중하지 못한 입이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우(愚)를 다시는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경제 정책 사령탑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격이자 상식이다.
2026-05-13 07: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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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인하 끝나나"…한은 부총재 "인상 전환 고민할 때"
[경제일보] 유상대 한국은행 부총재가 금리 인상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통화정책 기조 전환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이어져 온 금리 인하 사이클이 사실상 종료되고, 물가를 잡기 위한 긴축 국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유 부총재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차 방문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3일(현지시간) 기자간담회를 열고 “금리 인하를 멈추고 인상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고 밝혔다. 현직 금융통화위원이 공개 발언을 통해 금리 인상 가능성을 직접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는 최근 경제 상황 변화가 금리 판단의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동 전쟁 이후에도 한국 경제 성장률은 예상보다 크게 둔화되지 않은 반면, 물가는 전망치를 상회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2.0%, 물가상승률 2.2%를 제시했지만, 현재 흐름은 ‘성장은 방어, 물가는 상방’으로 기울고 있다는 진단이다. 유 부총재는 “반도체 사이클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수출을 중심으로 경기가 개선됐고, 정부 부양책으로 소비 심리도 살아났다”며 “성장률은 당초 예상보다 크게 낮아지지 않을 것 같고, 물가는 오히려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특히 물가에 대해서는 정부의 가격 안정 정책에도 불구하고 상방 압력이 상당하다고 평가했다. 이는 통화정책의 초점이 경기 부양에서 물가 안정으로 다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같은 환경 변화는 금리 경로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유 부총재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금리 인하 사이클보다는 인상 사이클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5월 금융통화위원회까지의 경제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하지만, 금리 인상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특히 금통위원들의 향후 금리 전망을 나타내는 ‘점도표’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유 부총재는 “조건이 많이 바뀐 상황에서는 기존 점도표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며 “확률분포가 전반적으로 상향 조정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사실상 향후 금리 경로가 기존보다 높아질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환율과 대외 변수도 변수로 꼽힌다. 원·달러 환율은 중동 정세 불안 이후 1500원선을 넘나들다 최근 1470~1480원대에서 움직이고 있다. 유 부총재는 “펀더멘털 대비 환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외화 유동성 위기나 급격한 자본 유출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제시한 한국의 잠재성장률 하락 전망에 대해서는 “다소 과한 측면이 있다”며 선을 그었다. 한국은행은 잠재성장률을 여전히 2% 안팎 수준으로 보고 있다. 결국 통화정책의 향방은 ‘물가와 성장의 균형’에서 ‘물가 우선’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흐름이다. 반도체 경기 호조로 성장 여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물가 상승 압력이 예상보다 커지면서 금리 인상 카드가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는 분석이다. 오는 5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실제 금리 인상 여부가 결정되지는 않더라도, 향후 정책 방향을 가늠할 ‘매파적 신호’가 제시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2026-05-04 10: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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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환율·고물가의 갈림길에서 통화정책의 본질을 묻다
신현송 총재의 취임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금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이 그만큼 엄중하기 때문이다. 고환율과 고물가가 동시에 압박하는 이른바 ‘복합 위기’ 국면에서 통화정책의 방향은 곧 경제의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시장의 관심은 기준금리다. 그동안 동결 기조를 유지해 온 기준금리가 과연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인상 혹은 인하라는 방향 전환이 이루어질 것인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금리는 곧 경제에 대한 진단이자 처방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원화 약세는 수입 물가를 자극하며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고 있고, 반대로 금리 인상은 가계부채와 내수 위축이라는 또 다른 부담을 동반한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이 흔들리는 구조다. 이처럼 상충하는 변수 속에서 정책의 균형을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외부 변수는 더욱 복잡하다. 최근 중동 정세, 특히 미·이란 간 군사적 긴장은 국제 유가와 금융시장 전반에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곧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통화정책의 긴축 압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단순히 국내 경제 지표만으로 정책을 설계할 수 없는 환경이다. 더 나아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 역시 결정적인 변수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달러의 위상은 절대적이며, 미국의 금리 방향은 곧 자본 흐름과 환율 변동에 직결된다.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금리 정책을 운용하더라도, 그 효과는 국제 금융 환경 속에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기 처방이 아니라 원칙에 기반한 일관된 정책이다. 통화정책은 시장의 기대를 관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방향성이 흔들리면 불확실성은 증폭되고, 이는 곧 경제 전반의 비용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기준금리의 조정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과 신뢰다. 고전은 이미 이런 상황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논어』에는 “정자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正也)”라는 구절이 있다. 정책이란 결국 바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눈앞의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대응이 아니라, 원칙과 균형에 기반한 판단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오늘의 통화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또한 『손자병법』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지금의 경제 상황에 대입하면, 국내 경제의 체력과 구조적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동시에, 국제 금융 환경과 지정학적 리스크를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신현송 총재가 직면한 과제는 결국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이다. 내부적으로는 물가 안정과 경기 유지라는 상충 목표를 조율해야 하고, 외부적으로는 글로벌 금융 질서 속에서 한국 경제의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 정책의 신뢰를 유지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까지 요구된다. 국민의 기대는 단순하다. 위기를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는 정확한 진단과, 그에 걸맞은 일관된 대응이다. 금리를 올리든, 동결하든, 혹은 내리든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정책이 예측 가능하고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통화정책은 만능이 아니다. 그러나 방향을 잃은 통화정책은 그 자체로 위험이 된다. 지금은 과감함보다 신중함이, 속도보다 균형이 요구되는 시기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다. 흔들리는 환경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중앙은행의 역할이며, 지금 이 순간 국민이 신임 총재에게 기대하는 바다.
2026-04-22 09: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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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중동 전쟁에 환율·물가·경기 모두 불안
[경제일보]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가 한국 경제의 ‘3대 축’인 환율·물가·경기를 동시에 흔들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연 2.50%로 동결한 배경에는, 어느 한쪽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복합 위기 국면에 진입했다는 냉정한 판단이 깔려 있다. 금통위는 10일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금리 동결을 결정했다. 표면적 이유는 “중동 사태의 전개와 파급 효과를 더 지켜볼 필요”였지만, 속내는 더 복잡하다. 물가는 들썩이고, 경기는 식어가며, 금융시장은 요동치는 ‘트리플 불안’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물가 측면에서는 경고등이 다시 켜졌다.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2%로 반등했고, 특히 석유류 가격이 9.9% 급등하며 전체 물가를 끌어올렸다. 기대인플레이션율 역시 2.7%로 상승했다. 중동 긴장이 촉발한 국제유가 상승이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에 전이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은은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기존 전망치(2.2%)를 “상당폭 상회”할 것으로 내다봤다. 사실상 물가 목표(2%)를 재차 이탈할 가능성을 공식화한 셈이다. 문제는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기엔 경기 하방 압력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 회복과 소비 개선 흐름에도 불구하고, 중동 사태 이후 경제심리가 급격히 위축되고 일부 업종에서는 생산 차질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기업 비용을 자극하고, 이는 다시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 한은이 올해 성장률이 2.0%를 밑돌 것으로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환율과 금융시장 역시 변수다. 원·달러 환율은 전쟁 여파 속 달러 강세와 외국인 자금 이탈이 겹치며 한때 1500원 선을 위협했다. 이후 미국·이란 간 일시적 긴장 완화로 다소 진정됐지만, 방향성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환율 상승은 수입물가를 자극해 다시 인플레이션을 밀어 올리는 ‘2차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금리를 성급히 내릴 경우 원화 약세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 여력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결국 금통위는 ‘동결’이라는 선택지를 통해 시간 벌기에 나섰다. 금리를 낮추자니 물가와 환율이 걸리고, 올리자니 경기 침체 리스크가 부담인 상황에서, 현 수준을 유지하며 불확실성 해소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이다. 다만 시장에서는 이번 동결을 단순한 ‘숨 고르기’가 아닌 정책 딜레마의 신호로 해석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중동 변수에 따라 유가가 추가 상승할 경우, 한은은 다시 긴축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 반대로 글로벌 경기 둔화가 본격화되면 완화 전환 요구도 커질 전망이다. 한은의 고민은 명확하다. 물가 안정, 경기 방어, 금융 안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데, 지금은 어느 하나도 확실히 잡히지 않는 국면이다. 결국 향후 통화정책의 방향은 중동 정세, 국제유가, 미 연준의 정책 경로, 그리고 환율 흐름이라는 외생 변수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한국 경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무엇을 먼저 잡을 것인가. 그 답을 찾기 전까지, 금리는 당분간 제자리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2026-04-10 14: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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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가·환율 더블쇼크…항공업계, 감편 넘어 '구조조정 분기점'
[경제일보] 비상경영에 들어간 항공사가 빠르게 늘면서 항공업계가 감편을 넘어 노선 구조조정 분기점에 들어섰다. 유가와 환율이 동시에 상승하면서 비용 부담이 손익 전반을 압박하는 가운데 항공사들은 항공유 관세 면제와 유류할증료 반영 체계 개편 등 정책 지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단기 휴전보다 정책 대응 여부가 향후 공급 축소와 시장 재편 속도를 좌우할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8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항공협회는 전날 대한항공 등 12개 국적 항공사가 참석한 간담회를 열고 항공유 관세 면제, 석유수입부과금 면제, 유류할증료 반영 시기 단축, 슬롯·운수권 회수 유예 등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중동 전쟁 이후 항공유 가격이 약 147% 상승한 데 따른 조치다. 중동 전쟁 이전 국제 항공유 가격은 배럴당 85~90달러 수준이었다. 이후 호르무즈 해협 긴장과 정제 설비 차질이 겹치며 4월 초 약 209달러까지 상승했다. 저점인 85달러 기준으로는 약 145.9%, 90달러 기준으로도 약 132.2% 오른 수준이다. 유럽 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226달러 수준까지 거래되며 전쟁 이전 대비 150% 이상 상승 구간도 나타났다. 원유 가격 상승뿐 아니라 정제능력 차질과 항공유 공급 경색이 동시에 겹치면서다. 국내 항공권 가격에도 시차를 두고 반영되고 있다. 싱가포르 항공유 평균값(MOPS)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유류할증료는 3월 급등분이 5월 발권분에 반영되면서 국내선 기준 편도 3만4100원으로 책정됐다. 전월 7700원 대비 약 4.4배 상승한 수준이다. 환율 상승도 비용 구조를 압박하고 있다. 항공유를 비롯해 항공기 리스료, 정비비, 보험료 등 주요 비용이 달러로 결제되는 구조에서 원·달러 환율 상승이 동시에 반영되고 있다. 대한항공 기준 환율이 10원 상승할 경우 약 550억원 수준의 외화평가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가와 환율이 같은 시기에 상승하면서 비용 부담이 전사적으로 확대되는 흐름이다. 항공업계의 비상경영은 전쟁 이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티웨이항공을 시작으로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진에어,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이 긴축 운영에 들어갔다. 운항 효율화와 비용 절감이 진행되고 있지만 비용 상승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 항공업계의 올해 1분기 실적은 겨울철 해외여행 성수기와 화물수요 강세 등으로 전년 동기 대비 선방한 성적표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2분기 이후부터는 중동 전쟁에 따른 유가 급등과 고환율 등 악재가 고스란히 반영되면서 급격한 실적 악화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의 2분기 매출은 4조265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 증가하지만, 고유가 타격 등에 영업이익은 3248억원으로 18.6%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대한항공의 연간 예상 유류 소모량은 약 3050만배럴로 유가 1달러 상승 시 연간 3050만달러(약 460억원)의 부담이 늘어나는 구조다. 현재 글로벌 항공유 가격이 전쟁 이전보다 100달러 이상 올랐는데, 비슷한 수준의 유가가 연중 지속될 경우 단순 계산으로 연간 손실 규모가 4조5000억원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한항공은 다른 항공사보다 화물 매출 비중(지난해 기준 약 27%)이 높은 만큼 운임이 오르면서 유가 타격이 상대적으로 완화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최근 운임 상승 폭보다 항공유 가격과 환율이 더 빠르게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운송 효율을 높이기도 여의찮다. 제주항공의 경우 2분기 매출은 4016억원으로 20.8% 오르지만, 영업손실 296억원을 낼 것으로 전망됐다. 같은 기간 진에어도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2.2% 늘어난 3740억원에 영업손실 370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관측된다. 정책 지원 여부에 따라 항공사들의 대응 방식은 달라질 전망이다. 항공유 관세(3%)와 리터당 16원의 석유수입부과금이 면제될 경우 연료 단가를 낮출 수 있고, 유류할증료 반영 시기 단축이 이뤄지면 비용과 운임 간 시차를 줄일 수 있다. 슬롯·운수권 회수 유예가 적용되면 감편 과정에서도 노선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지원이 지연될 경우 비용 상승을 자체적으로 흡수해야 한다. 이 경우 LCC를 중심으로 적자 노선 축소와 공급 감소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슬롯 회수까지 이어질 경우 향후 수요 회복 국면에서 재진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는 수요가 아니라 비용이 노선 존폐를 결정하고 있다"며 "정책 지원이 없으면 감편을 넘어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시장 판 자체가 축소되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2026-04-08 16: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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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채무 1300조, 재정의 기초 다시 세우자
[경제일보] 국가 재정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2년 연속 100조 원대 적자, 1300조 원에 달하는 국가 채무. 여기에 중동발 전쟁 여파로 26조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까지 편성했다. 벌써부터 하반기 추가 추경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나라 살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제는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지금의 재정 운용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적자 규모가 아니다. ‘습관화된 적자’와 ‘명분 없는 지출’이 결합돼 있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추경은 불가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출이 철저히 전쟁 대응과 민생 안정에 집중되지 않고, 과거처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누수된다면 이는 재정이 아니라 ‘분배 정치’에 불과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돈을 더 쓰는 기술이 아니라, 돈을 제대로 쓰는 원칙이다. 무엇보다 지출 구조조정이 선행돼야 한다. 모든 부처와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효과가 불분명한 보조금, 선심성 지역 사업, 중복된 정책은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작은 구멍이 큰 배를 가라앉힌다”는 말처럼, 사소해 보이는 비효율이 누적될수록 재정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성역 없는 구조조정 없이는 어떤 재정 건전화도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동시에 재정 규율을 제도화해야 한다. 법으로 정해진 지출 한도와 국가채무 관리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고, 이를 어길 경우 자동으로 지출을 조정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재정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의 기반이다. 선거를 앞두고 지출이 느슨해지고, 위기가 닥치면 빚으로 메우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면 미래 세대는 그 대가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과거 다른 나라들은 위기 앞에서 훨씬 더 냉정했다. 1990년대 재정 위기에 직면했던 캐나다는 대대적인 지출 삭감과 공공부문 개혁을 단행했다. 부처별 예산을 최대 20%까지 줄이고, 불필요한 기능은 과감히 폐지했다. 그 결과 만성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 역시 ‘부채 브레이크’ 제도를 도입해 국가 채무 증가를 헌법적으로 제한했다. 그 원칙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지켜졌고, 재정 신뢰도를 높이는 기반이 됐다. 반면 재정 규율을 놓친 나라들의 말로는 뼈아프다. 남유럽 국가들은 경기 부양을 명분으로 지출을 늘리다 결국 국가 신용 위기를 맞았고, 혹독한 긴축과 사회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 단계까지는 아니라고 안심할 수 없다. 위기는 언제나 ‘아직은 괜찮다’는 안일함에서 시작된다. 결국 해법은 명확하다. 첫째, 전쟁 추경은 철저히 목적 예산으로 한정하고 단 한 푼의 정치적 유입도 차단해야 한다. 둘째, 모든 재정 사업에 대한 전면 재평가를 통해 구조적 지출을 줄여야 한다. 셋째, 법과 제도로 재정 규율을 고정시켜 정치의 개입 여지를 최소화해야 한다. 넷째, 성장 기반 확충을 통해 세입을 늘리는 중장기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성장 없는 긴축은 또 다른 침체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다스림이 어지러운 것은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民之難治 以其上之有為)”라고 했다. 재정이 흔들리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 쓰고 싶은 욕망이 원칙을 앞설 때 국가는 균형을 잃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책이 아니라, 더 단단한 절제다. 재정은 국가의 마지막 보루다. 이 보루가 무너지면 어떤 정책도, 어떤 성장 전략도 의미를 잃는다.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인기 없는 길일지라도 지속 가능한 길이다. 더 늦기 전에, 재정의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한다.
2026-04-07 10: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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