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21건
-
-
-
쇳물에 매겨진 '탄소 청구서'…포스코·현대제철, 패러다임이 바뀐다
[경제일보] 철강의 ‘가격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철광석과 유연탄, 전기료, 인건비로 귀결되던 전통적 원가 방정식에 ‘탄소’라는 무거운 청구서가 추가되면서다. 이제 쇳물 1톤을 뽑아낼 때 이산화탄소를 얼마나 뿜어냈는지가 수출 경쟁력은 물론, 글로벌 고객사의 구매 조건과 자본 시장의 평가를 좌우하는 시대가 열렸다. 올해 1월 1일부터 유럽연합(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확정기간이 시작되면서, 철강 등 대상 품목의 내재 배출량은 본격적인 비용 산정 대상이 됐다. EU 수입자는 올해 수입분에 대해 2027년부터 CBAM 인증서를 구매·제출해야 하고, 이 부담은 한국 철강사의 수출 가격과 고객사 구매 조건을 압박하는 새로운 원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의 한복판에는 한국 철강산업을 이끌어온 두 거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서 있다. 현재 이들이 벌이는 진검승부는 과거처럼 ‘누가 고로(高爐)에서 더 많은 쇳물을 쏟아내느냐’, ‘누가 더 싼 값에 강재를 밀어내느냐’의 1차원적 물량전이 아니다. 앞으로의 철강 패권은 누가 더 탄소를 적게 배출하면서도 고품질의 돈 되는 철을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느냐에 달렸다. 이를 위해 고로의 절대강자 포스코는 쇳물을 끓이는 공정 자체를 뜯어고치는 험난한 길을 택했고, 현대제철은 범(汎)현대라는 강력한 ‘캡티브 마켓(내부 시장)’을 지렛대 삼아 전기로와 자동차강판을 결합한 차별화된 전환 경로를 구축하고 있다. “기술의 포스코 vs 공급망의 현대제철”…엇갈린 ‘탈탄소’ 해법 12일 업계에 따르면, 포스코가 꺼내든 승부수는 ‘공정의 근본적 혁신’이다. 기존 고로 기반의 막대한 생산 규모와 고급강 기술력은 유지하되,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저탄소 원료 기술을 동시다발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달 28일 미국 기후기술 기업 일렉트라(Electra)와 맺은 저탄소 철 생산 기술 공동개발 협약이 대표적이다. 일렉트라는 전기화학 반응을 통해 철광석에서 불순물을 솎아내고 고체 철을 얻는 기술을 쥔 기업으로 연산 500톤 규모의 시범공장을 올해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포스코는 자사의 직접환원제철 기술에 일렉트라의 전기화학 기법을 접목해 조기 상업 생산의 길을 닦겠다는 복안이다. 궁극적으로 포스코가 닿고자 하는 종착지는 ‘수소환원제철’이다.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쓰는 차세대 공정으로 고로 대비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기술이다. 다만, 실제 탄소 저감 효과는 수소 생산 방식과 전력의 탄소집약도에 좌우된다. 포스코는 포항제철소 내에 전담 개발센터를 꾸리고 연산 30만 톤급 시험 설비(데모플랜트) 구축에 나섰다. 광양제철소에 신설되는 대형 전기로 역시 탄소 저감 강재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핵심 인프라다. 포스코의 저력은 반세기에 걸쳐 축적된 세계 최고 수준의 일관제철 경험과 폭넓은 글로벌 고객망에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거대한 덩치가 탈탄소 시대엔 가장 무거운 짐이다. 철강 산업의 문법 자체를 갈아엎어야 하는 만큼 천문학적인 자본과 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혁신의 기회비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지난한 궤도 수정에 성공한다면, 포스코는 글로벌 철강업계의 새로운 기술 표준(Standard)으로 군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반면, 현대제철은 ‘공급망의 진화’로 맞불을 놨다. 고로의 역사와 규모 면에서는 포스코에 한발 비켜서 있지만, 이들에겐 현대자동차그룹이라는 가장 확실하고 든든한 우군이 있다. 현대제철이 앞세운 저탄소 철강 브랜드 ‘하이에코스틸(HyECOsteel)‘은 철스크랩과 HBI 등을 전기로에서 녹인 쇳물을 고로 쇳물과 합탕한 뒤 전로 공정을 거쳐 생산하는 전기로-고로 복합프로세스 제품으로 기존 자사 고로재 대비 탄소배출을 20% 이상 줄인 것이 특징이다. 단기적으로는 주력인 자동차강판에 이를 집중 적용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신(新)전기로와 수소환원제철로 외연을 넓히겠다는 전략이다. 현대제철의 구상은 이미 양산 단계에 진입하며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2월부터 탄소저감강판 양산에 돌입했고, 연내 강종 인증 범위를 53종까지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현대차와 기아는 올해부터 탄소저감 철강재를 국내·유럽 생산 차종에 일부 적용하고, 적용 강종과 물량을 점진적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안방선 혈투·해외선 동맹…‘녹색 쇳물’은 공짜가 아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미국 루이지애나 프로젝트에서 드러난 양사의 묘한 역학관계다. 지난해 말 공시와 국내 주요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현대제철·포스코·현대차·기아는 미국 루이지애나 전기로 제철소 프로젝트의 투자 구조를 확정했다. 현대제철은 미국 현지 법인을 통해 총 58억 달러(약 8조원)를 투입, 연산 270만톤 규모의 제철소 건립을 추진 중이다. 현대제철(50%)을 필두로 포스코(20%), 현대차·기아(각 15%)가 한 배를 탔다. 국내 시장에서 이들은 자동차강판과 후판을 두고 치열하게 맞붙는 경쟁자다. 하지만 국경 밖의 사정은 다르다. 높은 관세와 옥죄어오는 탄소 규제, 자국 중심주의라는 거센 파도 앞에서 한국 기업끼리의 소모전은 공멸을 뜻한다. ‘안방에서는 싸우되, 해외에서는 뭉쳐야 산다’는 냉혹한 현실 인식이 탄소 원가전쟁 시대의 새로운 합종연횡을 만들어낸 셈이다. 물론 양사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포스코는 본사 철강 사업에서 환율 상승에 따른 원료비 부담으로 이익이 줄었지만, 해외 철강법인 판매 확대와 원가절감 효과로 철강부문 전체 이익은 개선됐다. 현대제철의 경우 환율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1분기 영업이익이 전분기 대비 크게 감소했다. 탈탄소가 기업의 명운을 건 숭고한 미래 투자라 할지라도 당장 재무제표에 찍히는 막대한 비용의 압박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철강업계의 얄궂은 현실이다. 전기로 비중을 높인다 한들 천문학적인 전력비와 국내 전력망의 높은 탄소배출계수라는 근본적 한계를 풀어내야 하는 숙제도 남는다. 진정한 그린스틸은 그저 ‘값싼 전기’가 아니라 ‘깨끗한 전기’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철강 패권 전쟁은 ‘친환경’이라는 매끄러운 수사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며 “비용과 가격, 품질과 납기, 나아가 국가 제조업의 경쟁력이 통째로 걸린 산업 구조의 대수술”이라고 했다. 이어 “녹색 쇳물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며 “고객사가 저탄소 철강에 기꺼이 프리미엄 지갑을 열 것인지도 미지수다. 철강사의 전환은 단순한 환경 캠페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기술의 판을 엎으려는 포스코와 공급망의 룰을 바꾸려는 현대제철. 승자의 윤곽은 아직 희미하다. 과거 용광로의 온도와 크기로 군림했던 철강업의 잣대는 이제 무용지물이다. 가장 적은 탄소로, 최고 품질의 철을, 가장 경쟁력 있는 가격에 안정적으로 뽑아내는 자만이 새로운 철의 제국을 지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철강 거인들의 사투를 한낱 기업 간 점유율 경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는 결국 한국 제조업의 튼튼한 뼈대가 다가올 10년 뒤에도 굳건히 버텨낼 수 있을지를 묻는 가장 엄중한 시험대다.
2026-05-12 07:57:13
-
-
중동발 '에너지 전시상황', 노사정 대타협으로 국난 극복의 길 열어야
[경제일보]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가스 시설과 유전을 겨냥한 ‘에너지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LNG 공급의 20%를 담당하는 카타르 라스라판 시설이 피격되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면서 글로벌 경제는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혼돈에 빠졌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했고, 원·달러 환율은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500원을 넘어섰다.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대한민국에 지금의 상황은 단순한 경기 침체를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경제 전시 상황’이다. 산업 현장의 비명은 이미 현실이 됐다. 나프타 수급에 비상이 걸린 석유화학업계를 시작으로 자동차, 전자 부품사들까지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하며 계약 이행 불능을 통보하고 있다. 원자재 공급 차질이 실물 경제의 모세혈관까지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우방국을 통해 원유 물량을 확보하고 비상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공급망의 근본적 체질 개선 없이는 이 거대한 파고를 넘기 역부족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대외적 혈투 속에서 벌어지는 대내적 갈등이다. 국가 경제가 백척간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노동계는 총파업을 예고하며 전운을 고조시키고 있다. 물론 ‘해고는 죽음’이라는 노동자들의 절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류의 고전인 『도덕경』에는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품으며, 충기(沖氣)로써 화합한다(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和)”는 가르침이 있다. 서로 대립하는 힘이 충돌만 할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통로를 통해 기운을 섞어 조화를 이루어야 생명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화합의 지혜’다. 이재명 대통령이 제안한 ‘덴마크식 유연 안정성’ 모델은 우리 노동시장이 가야 할 고통스러운, 그러나 필연적인 길이다. 기업은 고용 유연성을 통해 생존의 활로를 찾고, 노동자는 두터운 사회안전망 속에서 재기를 보장받는 ‘사회적 대타협’이 시급하다.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중소기업·비정규직·청년 세대를 아우르는 상생의 구조를 짜야 한다. 국난의 시기다. 나만 살겠다는 ‘각자도생’은 결국 ‘공멸’로 귀결될 뿐이다. 경영진은 투명한 경영과 고통 분담으로 신뢰를 쌓고, 노동계는 극한 투쟁 대신 국가 경제의 기반을 지키는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정부 역시 친노동 혹은 친기업이라는 이분법적 굴레에서 벗어나, 냉철한 원칙과 상식으로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비바람이 거셀수록 뿌리를 깊게 내리는 나무처럼, 이번 위기를 에너지 안보와 노동 개혁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 그것만이 벼랑 끝에 선 민생을 구하고 국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2026-03-20 09:45:32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