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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임위원장 독식론, '승자의 저주'를 부르는 오만한 발상
[경제일보] 국회 후반기 원 구성을 앞두고 정치권에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집권 여당의 수장 격인 정청래 대표가 상임위원장 자리를 여당이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으면서다. 과거 그의 정치적 궤적과 거침없는 행보를 돌이켜볼 때, 이는 단순한 협상용 엄포나 기싸움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압승’이라는 성적표를 손에 쥔 여당이 의회 권력의 고삐를 완전히 틀어쥐고 국정 운영의 속도전을 벌이겠다는 노골적인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물론 여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금의 야당 행태가 눈엣가시 같을 것이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모습이나, 대안 없는 비판으로 국정의 동력을 깎아 먹는 야당의 현실을 보며 "차라리 우리끼리 책임지고 하겠다"는 유혹에 빠질 법도 하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지리멸렬한 정쟁에 지쳐 "일 좀 하게 다 밀어줘라"는 목소리가 나올 법하다. 하지만 정치란 현실의 감정을 배설하는 장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고도의 이성적 과정이어야 한다. 노자(老子)는 《도덕경》 제9장에서 '금옥만당 막지능수(金玉滿堂 莫之能守)'라 했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해도 이를 능히 지켜낼 수 없다는 뜻이다.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그 힘을 남용하여 모든 것을 독점하려 드는 순간부터 권력은 부패하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의회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상임위원장 배분은 단순히 자리를 나누는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입법부가 행정부를 감시하고, 여야가 서로의 정책적 독주를 막아내기 위해 수십 년간 쌓아온 암묵적인 질서이자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여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한다는 것은 야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봉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이는 정국 운영을 협치(協治)가 아닌 독단(獨斷)으로 끌고 가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아무리 야당이 밉고 믿음이 가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국민의 엄연한 선택을 받은 대의 기관이다. 여당의 정책이 늘 옳을 수는 없으며, 정부의 국정 수행 과정에는 반드시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빈틈을 찾아내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야당의 숙명적 역할이다. 싹을 자르는 식의 원 구성은 결국 여당 스스로 '오류의 수렁'에 빠지게 만드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고전 《서경(書經)》에는 '원수채수(怨豈在明 隔夷怨在)'라는 말이 나온다. 원망은 밝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단절된 막힌 곳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소수파를 무시하고 다수의 힘으로 몰아붙이는 정치는 당장은 시원해 보일지 모르나, 사회 밑바닥에 불만과 갈등의 에너지를 축적시킨다. 응축된 갈등은 결국 폭발하기 마련이고, 그 비용은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정치는 '옳음'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조율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지금 여당에 필요한 것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포용의 리더십'이다. 강한 자가 자신을 낮추고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할 때 진정한 권위가 선다. 야당이 부족해 보일수록 여당은 더욱 인내하며 대화의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상임위원장 자리를 전리품 챙기듯 독식하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기본 상식에 어긋날뿐더러, 훗날 정권이 바뀌었을 때 똑같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명분을 만들어주는 꼴이다. 정청래 대표와 여당 지도부는 부디 '승자의 저주'를 경계해야 한다. 칼자루를 쥐었다고 해서 모든 고기를 혼자 썰어 가져가려 해서는 안 된다. 국회는 여당의 전용 안방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공론장이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타락하고, 비판 없는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야당의 비판이 비록 가시 돋친 독설일지라도, 그것을 국정의 오답을 수정하는 '쓴 약'으로 삼는 대범함이 필요하다. 독단은 짧고 협치는 길다. 눈앞의 효율성을 위해 의회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원성을 훼손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길 바란다. 여당 단독의 질주는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다면, 미운 야당을 끌어안고서라도 함께 가는 가시밭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30년 넘게 이 땅의 정치를 지켜본 필자가 확신하는 정법(正法)이자 상식이다.
2026-03-24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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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억 원의 독배가 된 올림픽 중계권, '승자의 저주'인가
JTBC의 올림픽·월드컵 독점 중계권이 독배가 되어 돌아왔다. 최근 JTBC의 부채비율은 2,100%를 돌파했고, 국제 스포츠 중계권료 미지급으로 인한 소송전까지 불거졌다. 화려했던 ‘단독 중계’의 꿈은 이제 방송사의 존립을 흔드는 시한폭탄이 된 모양새다. 이번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JTBC의 경영 판단 미스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따라가지 못한 구조적 위기와 정책 실패가 결합한 결과다. 첫째, 스포츠 중계권의 가성비가 무너졌다. 글로벌 OTT들의 가세로 중계권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정작 국내 시청자들의 본방 사수 열기는 식었다. MZ세대는 TV 앞에 앉아 3시간씩 경기를 보는 대신 유튜브 요약본과 틱톡 쇼츠를 소비한다. 올림픽 시상대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며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국뽕' 마케팅에 의존해 고점에서 상투를 잡은 레거시 미디어의 비극이다. 둘째, 정부의 낡은 규제 체계가 위기를 키웠다. 지난 12일 한국방송협회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이 지적했듯, 방송사는 OTT 수준의 광고 규제 완화를 10년 넘게 요구해왔다. 하지만 정부는 포지티브 방식의 낡은 틀을 고수하며 골든타임을 실기했다. 수익 기반이 무너진 방송사에 ‘보편적 시청권’이라는 공적 의무만 지우는 것은 가혹한 이분법이다. 셋째, ‘단독 중계’ 모델의 유통기한이 끝났다. 해외에서도 단일 사업자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연합 체제로 회귀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단순 고전적인 방송풀의 개념이 아니라 OTT, IPTV, 포털 등 새로운 미디어가 포함된 '코리아 풀'과 같은 국가 단위의 공동 구매 모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번 올림픽은 특정 방송사의 불운이 아니다.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 전체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의 전조 현상이다. 이제라도 매체 환경에 맞는 유연한 광고 정책과 공동 협상 체계를 재설계해야 한다. 화려한 개막식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방송사의 계산기를 방치한다면, 향후 우리는 그 어떤 국제 대회도 ‘보편적’으로 누리지 못할지 모른다.
2026-02-14 08: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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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원칙·상식의 법대 위에서, 윤석열은 '역사의 죄인'이다
국가가 무너질 때는 전차가 아니라 말과 명령이 먼저 무너진다. 헌정 질서를 지탱하는 것은 군홧발이 아니라 절차이고 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절제이며, 정권의 승리가 아니라 법치의 자존심이다. 그 자존심을 가장 높은 자리에서 먼저 훼손한 사람이 있다면 그 책임은 형법 조문을 넘어 역사에 남는다. 윤석열 전 대통령을 두고 ‘역사의 죄인’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감정의 욕설이 아니다. 국민 공동체가 오랫동안 공유해 온 기본과 원칙, 상식의 언어로 내리는 정치적·도덕적 평가다. 윤 전 대통령은 공수처 체포를 방해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판단한 것은 단순한 충돌이 아니었다. 공권력의 집행을 물리력으로 가로막고 국가 시스템을 개인의 방패처럼 사유화하려 한 행위가 법치에 남긴 상처였다. 이 한 건만으로도 결론은 충분하다. 국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 법의 집행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지연시키고 제도를 자신의 방어막으로 삼는 순간 법치국가의 근간은 흔들린다. 그것은 개인의 범죄를 넘어 공동체의 규범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그래서 그 죄는 무겁다. 더 큰 문제는 이 첫 선고가 ‘예고편’에 가깝다는 점이다. 내달 19일에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 사건의 1심 선고가 예정돼 있다. 이미 결심 공판은 마무리됐고 특검은 사형을 구형한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우리는 판결문이 나오기 전까지 법률적으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역사적 책임의 영역은 다르다. 민주주의에서 지도자는 ‘법정 유죄’ 이전에도 ‘공적 신뢰’에 의해 심판받는다. 국민이 위임한 권한으로 헌정의 뿌리를 흔들었다는 의혹만으로도 지도자는 공동체 앞에 무거운 책임을 진다. 윤 전 대통령 사안의 본질은 단순한 정치적 실책이 아니다. 권력이 통제 장치를 무력화하고 절차를 무시하는 순간, 국가는 ‘법의 국가’에서 ‘사람의 국가’로 전락한다. 법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를 묶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그 권력자가 법을 비틀고 제도를 우회하며 국가 장치를 사병처럼 다뤘다면 그때부터 역사적 책임은 시작된다. 지도자의 일탈은 개인의 타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무원 사회를 왜곡하고 수사·사법 시스템의 신뢰를 갉아먹으며 결국 국민 사이의 공동 규칙을 파괴한다. “어차피 힘 있는 사람은 빠져나간다”는 냉소가 확산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내부에서부터 붕괴한다. 이 사태가 남긴 상처는 개인의 명예나 진영의 승패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쌓아온 ‘상식의 국가’라는 토대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한 산업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권력이 절차를 경시하고 물리력과 지시로 제도를 눌러버리는 순간 우리는 개발도상국적 권력 습성의 가장 낡은 어둠으로 되돌아간다. 그 후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합리화하는 순간 더 큰 재앙이 찾아온다. 역사는 늘 그렇게 경고해 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재판은 재판대로 원칙주의에 따라 끝까지 가야 한다. 여론의 속도나 정치적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법률과 증거, 절차에 의해 결론을 내리는 것 자체가 헌정의 복원이다. 둘째,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이번 사태를 진영 사건으로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편이면 괜찮고, 상대편이면 악”이라는 언어는 민주주의를 다시 찢는다. 법치를 지키는 일은 어느 편의 승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 조건이다. 윤석열을 ‘역사의 죄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특정 인물을 저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는 권력이 헌정 위에 서지 못하도록 못을 박기 위해서다. 우리는 법을 지켜야 하고, 절차를 존중해야 하며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교훈이자 내일의 안전장치다. 죄는 개인이 짓지만 대가는 국민이 치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묻고 반드시 기록하고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법정의 판결이 어떤 결론에 이르든, 역사 앞에서의 책임은 이미 시작됐다.
2026-01-17 20: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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