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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조 원의 국민연금 대체투자, 이젠 수익보다 책임을 묻는다
[경제일보] 국민연금의 대체투자 규모가 248조 원을 넘어섰다. 이는 국민연금기금 전체 자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규모로, 세계적 수준의 연기금으로 성장한 국민연금의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저금리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속에서 부동산과 인프라, 사모펀드, 사모대출 등 대체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안정적인 장기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외형의 성장에 걸맞은 책임과 투명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거대한 기금은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은 일반 금융회사의 투자자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민이 평생 성실히 납부한 보험료를 바탕으로 조성된 공적 자산이며, 노후를 지탱하는 사회안전망이다. 따라서 기금 운용의 목표는 단순한 수익률 경쟁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장기적 안정성과 공공성, 그리고 사회적 책임이 함께 구현될 때 비로소 국민연금의 존재 이유가 완성된다. 단기 성과를 위해 미래 세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외면하는 투자는 공적 연기금이 지향해야 할 길이 아니다. 문제는 대체투자의 특성상 투자 구조가 복잡하고 정보 공개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장내 주식이나 채권과 달리 사모펀드와 해외 인프라, 부동산 투자 등은 계약 내용과 투자 대상이 외부에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특성은 투자 판단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책임 있는 감시를 어렵게 만든다. 특히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 대한 검증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사후 관리가 미흡할 경우 공적 기금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업이나 기업에 간접적으로 투자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수익만을 기준으로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세계 주요 연기금들은 이미 ESG를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라 장기 투자 위험을 관리하는 핵심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과 노동권 보호, 건전한 지배구조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요소이며, 장기적으로는 투자 수익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결국 책임 투자는 수익성과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안정적인 장기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전략인 셈이다. 국민연금 역시 이제 대체투자 분야에 특화된 ESG 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투자 대상을 선정하는 단계부터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의 건전성을 면밀히 평가하고, 투자 이후에도 정기적인 점검과 사후 평가를 의무화해야 한다. 민간 위탁운용사를 선정할 때에도 ESG 이행 실적과 내부 통제 수준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반영해야 한다. 운용사의 수익률뿐 아니라 책임투자 역량까지 평가하는 체계가 정착될 때 시장 전체의 건전성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투명성이 강화되어야 한다. 투자 기밀을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까지 차단해서는 안 된다. 외부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감시체계를 확대하고, 대체투자의 ESG 위험과 관리 현황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공적 기금일수록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으며, 설명할 수 없는 투자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248조 원이라는 막대한 자산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노후와 미래 세대의 삶이 담긴 소중한 자산이다. 국민연금이 세계적인 연기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규모보다 신뢰가 먼저다. 공공성을 잃은 수익은 오래가지 못하며, 책임 없는 투자는 결국 더 큰 손실로 되돌아온다. 국민연금과 정부는 지금이야말로 대체투자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책임투자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노후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투자이며, 공적 연기금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6-07-09 09: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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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개미, 스페이스X 나흘 만에 3조원 순매수…주가 조정에도 '우주 베팅' 계속
[경제일보] 미국 우주기업 스페이스X에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자금이 단기간에 집중되고 있다. 상장 이후 주가가 급등락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이른바 ‘서학개미’들은 나흘 만에 3조원에 육박하는 순매수에 나섰다. 인공지능(AI)과 위성통신, 우주항공 산업을 묶은 미래 성장 기대가 매수세를 자극했지만, 상장 초기 과열과 차익실현 매물에 따른 변동성 우려도 커지고 있다. 21일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 세이브로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들은 스페이스X 상장 이후 4거래일 동안 총 19억4960만달러, 약 2조9887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최근 거래일인 지난 17일 하루에만 순매수 규모가 1억3667만달러, 약 2095억원에 달했다. 이날 매수 금액은 1억8247만달러였고 매도 금액은 4580만달러에 그쳤다. 스페이스X는 이달 들어 국내 투자자들이 미국 증시에서 가장 많이 사들인 종목에 올랐다. 순매수 2위인 마블테크놀로지 3억955만달러와 비교하면 6배가 넘는 규모다. 보유 규모도 빠르게 불어나면서 기존 서학개미 보유 상위 종목인 인텔을 추월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인텔 보관금액은 20억1389만달러 수준으로, 스페이스X와의 격차가 크게 좁혀졌다. 스페이스X 매수세는 최근 두 달간 위축됐던 해외주식 투자 흐름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서학개미는 지난 4월과 5월 두 달 연속 미국 주식을 순매도했지만, 이달 들어 지난 19일 조회 기준으로 미국 증시에서 8억4626만달러를 순매수했다. 스페이스X 흥행이 3개월 만의 순매수 전환을 이끄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한 셈이다. 다만 주가 흐름은 투자자 기대만큼 일방적이지 않다. 스페이스X는 공모가 135달러로 상장한 뒤 한때 200달러를 넘어섰고 장중 225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이후 차익실현 매물이 출회되며 17일 4.95% 하락한 데 이어 18일에도 3.56% 내린 184.9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상장 직후 급등세가 꺾이며 고점 매수 투자자들의 손실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스페이스X의 장기 성장성에는 이견이 크지 않지만 단기 밸류에이션 부담은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민간 우주발사, 스타링크 위성통신, 국방·항공우주 계약 등 사업 확장성이 크지만, 상장 직후 주가가 빠르게 오른 만큼 실적과 기업가치 간 간극을 확인하는 과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스페이스X 조정은 국내 우주항공 상장지수펀드(ETF) 수익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페이스X 편입 비중이 높은 일부 국내 ETF는 상장 직후 주가 급등 구간에서 물량을 확보한 영향으로 단기 손실폭이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이스X뿐 아니라 로켓랩, AST스페이스모바일 등 기존 우주항공 관련주가 동반 조정을 받은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증권가에서는 스페이스X가 우주 산업의 대표 성장주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상장 초기 ‘포모’ 매수세에 편승한 추격 매수는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적 가시성, 위성통신 사업의 수익성, 국방·우주 계약 확대 여부, 주요 지수 편입 가능성 등이 향후 주가 방향을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스페이스X를 향한 서학개미의 3조원 베팅은 국내 투자자들의 관심이 기존 빅테크를 넘어 우주·AI 인프라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다만 성장 서사가 강할수록 가격 변동성도 커지기 때문에 우주를 향한 기대가 장기 투자 성과로 이어지려면 단기 흥분보다 기업가치와 수익성을 따지는 냉정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2026-06-21 14: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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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1년 이재명 정부, 이제 청사진은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국정 2년 차 화두는 ‘대체불가 대한민국’이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를 넘어 세계가 꼭 필요로 하는 나라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패권 경쟁, 미국발 통상 압박, 중동발 에너지 불안, 저출생과 지역소멸, 부동산 불안, 재정 부담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다. 대통령의 구호가 수사가 아니라 국정의 좌표가 되려면 이제부터는 청사진을 숫자와 실행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 1년을 민주주의 위기, 통상·안보 위기, 민생 위기를 헤쳐온 시간으로 규정했다. 국정 2년 차 목표로는 초격차 산업강국, 글로벌 외교·안보 강국, 규범과 규칙이 지켜지는 정상사회, 국민의 목숨을 살리는 정부를 제시했다.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다. 특히 경제정책의 중심을 첨단산업, 국가투자, 에너지 전환, 지역균형, 민생 안정에 두겠다는 구상은 지금 한국 경제가 피할 수 없는 과제와 맞닿아 있다. 문제는 우선순위다. 모든 것을 동시에 하겠다는 정부는 대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정부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성장의 엔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반도체, AI, 조선, 방산, 배터리, 원전, 전력망, 바이오 등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에 자본과 인재와 규제를 집중해야 한다. 초격차 산업강국은 보조금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세제, 전력과 용수, 인허가 속도, 노동 유연성, 연구개발 인력 공급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이재명 정부는 중도 실용의 길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려면 먼저 성장해야 한다. 기업을 압박해 단기 성과를 끌어내는 방식으로는 미래산업 투자가 지속될 수 없다. 반대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태도도 무책임하다. 정부는 길을 내고, 민간은 달리게 해야 한다. 국가는 전력망과 항만, 데이터센터, 첨단산단,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과감히 투자하되, 민간의 의사결정을 정치 논리로 흔들어서는 안 된다. 민생경제도 마찬가지다. 고물가와 고금리의 상흔은 아직 가계에 남아 있다. 자영업자는 매출보다 비용을 먼저 걱정하고 청년은 일자리보다 주거비에 먼저 눌린다. 이럴 때 정부가 재정을 써야 할 곳은 분명하다. 전 국민을 향한 일회성 지원보다 취약계층, 영세 자영업자, 주거 약자, 저출생 대응, 직업 전환 교육에 정밀하게 써야 한다. 재정은 따뜻해야 하지만 동시에 엄격해야 한다. 빚으로 인기를 사는 정책은 결국 다음 세대의 세금으로 돌아온다. 부동산 정책은 더 냉정해야 한다. 시장을 향해 ‘투기와 전쟁’만 외치면 공급은 얼어붙고, 공급만 외치면 불평등은 커진다. 서울과 수도권의 주거 불안, 지방의 빈집과 소멸 위기는 다른 처방을 요구한다. 핵심은 예측 가능성이다. 세제와 대출, 공급 정책이 정권의 정치 일정에 따라 흔들리면 시장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정부가 시장을 이기려 하기보다 시장이 합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규칙을 세워야 한다. 금융·자본시장 개혁도 국정 2년 차의 중요한 시험대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이려면 말뿐인 밸류업이 아니라 지배구조 개선, 주주권 보호, 불공정거래 엄단, 장기투자 세제 지원이 필요하다. 주가조작과 부동산 범죄를 뿌리 뽑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옳다. 다만 처벌 강화만으로 시장 신뢰가 생기지는 않는다. 예측 가능한 감독, 일관된 법 집행, 기업의 자율과 책임을 함께 세워야 한다. 정치의 정상화도 경제정책의 일부다. 기업은 금리와 환율만 보지 않는다. 정권의 말, 국회의 분위기, 규제기관의 태도, 노사관계의 방향을 함께 본다. 국정이 매일 전쟁처럼 흘러가면 투자는 늦춰진다. 야당과 언론을 설득하지 못하는 경제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대통령이 말한 ‘정상사회’는 법과 원칙이 상대 진영에만 적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내 편에게도 같은 잣대가 적용되는 사회여야 한다. 동양 고전 <논어>에는 “민무신불립”, 곧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취임 1년을 넘긴 정부에 필요한 것도 결국 신뢰다. 국민은 더 이상 거창한 청사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물가가 안정되는지, 집값이 예측 가능한지, 일자리가 생기는지, 기업이 투자하는지,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지를 본다. 국정의 성패는 연설문이 아니라 생활의 체감으로 결정된다. 이재명 정부는 이제 출범기의 명분을 넘어 집권 2년 차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대체불가 대한민국’은 좋은 구호다. 그러나 구호는 출발점일 뿐이다. 초격차 산업은 규제개혁과 인재정책으로, 민생 안정은 정밀한 재정과 물가 관리로, 자본시장 개혁은 공정한 룰과 주주 보호로, 정상사회는 법치와 통합의 실천으로 증명돼야 한다. 대통령에게 남은 4년은 길어 보이지만 국정 시간표로는 짧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말이 아니라 더 정확한 실행이다. 이재명 정부가 성공하려면 성장과 분배, 시장과 국가, 개혁과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대체불가의 잠재력을 이미 갖고 있다. 정부의 책무는 그 잠재력을 정치의 구호로 소비하지 않고 국민의 삶과 기업의 투자, 국가의 경쟁력으로 바꾸는 일이다.
2026-06-10 17: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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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병목 더 과감히 걷어내야"…베트남 기업들이 정부에 던진 과제
베트남 정부가 최근 규제 완화와 행정개혁에 속도를 내면서 기업 활동 환경 개선에 나서고 있다. 법률 제정 방식의 변화와 행정 절차 간소화, 투자 프로젝트 지연을 초래하던 각종 규제 병목 해소 조치가 이어지면서 경제계의 기대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현장 기업들이 체감하는 규제 불확실성은 여전히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모호한 법 규정과 중복 행정, 잦은 제도 변화가 기업 경영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베트남상공회의소(VCCI)는 최근 하노이에서 '2025년 비즈니스 법률 동향 보고서' 발표 세미나를 열고 정부의 제도 개혁 성과와 함께 기업들이 직면한 규제 과제를 집중 분석했다. ◆ 역사상 처음 등장한 '선 규제 완화, 후 법 개정' VCCI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 입법 및 경제정책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공산당 정치국이 발표한 이른바 '4대 전략 결의안'이다. 과학기술·혁신 발전을 위한 결의안 57호, 국제통합 강화를 위한 결의안 59호, 입법·사법 혁신을 위한 결의안 66호, 민간경제 발전을 위한 결의안 68호가 대표적이다. 이들 결의안은 베트남 정부의 행정 철학을 기존의 규제와 통제 중심에서 혁신 촉진과 성장 지원 중심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베트남 경제는 지난해 8.02%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개혁 효과를 일부 입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기업들이 가장 주목하는 변화는 국회가 정부에 부여한 특별 권한이다. 베트남 국회는 결의안 206/2025/QH15를 통해 정부가 긴급한 규제 병목 현상을 신속히 해결할 수 있도록 사실상 '선 규제 완화, 후 법 개정'이 가능한 특례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현행 법률과 일부 충돌하더라도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문제를 우선 해소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으로, 베트남 입법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조치로 평가된다. 이 제도를 통해 장기간 지연됐던 투자 프로젝트 계획 변경 승인, 정부가 이미 보유한 자료를 다시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중복 행정, 국가 핵심 사업에 필요한 자재 채굴 허가 지연 문제 등이 빠르게 해소되기 시작했다. 다만 해당 특례 조치 대부분은 2027년 2월 28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될 예정이어서 정부는 향후 관련 내용을 정식 법률 체계로 편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 역대급 입법 속도…기업들은 "적응할 시간이 부족하다" 베트남 정부의 규제 개혁 의지는 입법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총 89건으로 전년 대비 약 3배 증가하며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최근 2년간 제·개정된 법률은 120건을 넘어섰다. 이는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약 8년 동안 제정된 법률 수를 웃도는 규모다. 기업과 직접 관련된 33개 법안을 분석한 결과 초안 작성에 소요된 평균 기간은 221일로 과거 대비 약 40% 단축됐다. 행정 데이터 활용 확대를 통해 14개 행정 분야에서 760건 이상의 행정 절차가 폐지되거나 간소화되는 성과도 나타났다. 그러나 빠른 입법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VCCI 조사 결과 기업 경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애로사항 가운데 42%는 여전히 '모호하고 불명확한 규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났다. 규제 준수 비용 부담은 36%, 법령 간 중복 및 충돌 문제는 22%를 차지했다. 특히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법 개정 속도에 비해 현장의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난해 약식 절차(Fast-track)를 통해 처리된 법안 비중은 전체의 43%까지 증가했다. 공청회나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법안이 신속하게 통과되면서 기업들은 실제 시행 단계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의무 사항을 인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포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법안 비율도 15.3%로 증가해 기업들이 내부 규정과 업무 프로세스를 정비할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분석됐다. ◆ 기업들 "임시 특례 아닌 상설 제도로 정착돼야" VCCI는 베트남 정부의 정책 방향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과거 사전 허가와 통제 중심 행정에서 사후 감독과 성장 지원 중심 행정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시행 중인 각종 특별 메커니즘과 규제 완화 조치가 단순한 한시적 특례에 머물지 않고 안정적인 법률 체계로 정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업 입장에서는 일시적인 규제 완화보다 예측 가능하고 일관된 법률 환경이 장기 투자 결정에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인 투자기업들은 법률 해석의 일관성과 행정 절차의 안정성을 투자 판단의 핵심 요소로 꼽고 있다. ◆ 한국 기업도 규제 변화 모니터링 강화해야 베트남은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투자처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반도체와 전자, 제조업, 인프라, 에너지 분야를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입법 속도와 제도 변화 규모를 고려하면 베트남 시장에 진출했거나 진출을 검토하는 한국 기업 역시 규제 변화에 대한 대응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투자 환경이 개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법률 개정과 시행령 변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만큼 현지 법률 자문과 컴플라이언스 체계를 보다 정교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베트남 정부가 규제 개혁을 통해 성장 친화적 환경 조성에 나서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기업들이 원하는 것은 속도보다 예측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향후 제도 개혁이 얼마나 안정적인 법률 체계로 연결될지 주목된다.
2026-06-05 18: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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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8000시대…이제 다음을 준비하자
[경제일보] 코스피 8000시대가 열렸다. 숫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시장의 공기는 달라졌다. 5000선 돌파 때는 기대가 앞섰고, 6000선에서는 의심과 환호가 엇갈렸다. 7000선을 지나 8000선을 넘자 이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디까지 오를 것인가’가 아니라 ‘이 상승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가 2026년 5월 26일 종가 기준 사상 처음 8000선을 돌파했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55% 오른 8047.51에 마감했고, 삼성전자는 2.22%, SK하이닉스는 5.72% 상승했다. 다음 날에도 반도체 대형주는 신고가 행진을 이어갔다. 5월 27일 SK하이닉스가 처음으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어섰고, 한국 코스피가 올해 들어 세계 주요 지수 가운데 가장 강한 흐름을 보였다. 이번 랠리의 주역은 단연 반도체다. 인공지능 서버, 고대역폭메모리,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다시 한국 증시의 심장부로 밀어 올렸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수출 엔진이고, 기술 주권의 방파제이며, 자본시장의 가장 강력한 실적 근거다. 주가가 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 유동성 장세와 달리 이번 상승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익 전망 상향과 산업 슈퍼사이클이라는 실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축포 소리 속에서 다음 위험을 키운다. 로이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하고, 기술주가 향후 이익 전망의 대부분을 떠받치는 구조가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한 달간 코스피 상장사의 17%만 주가가 올랐고, 반도체 ‘투톱’ 쏠림이 뚜렷하다. 지수는 8000인데, 체감 수익률은 투자자마다 크게 다르다. 이것이 8000시대의 첫 번째 역설이다. 코스피 8000은 끝이 아니라 시험대다. 시장이 한 단계 더 성숙하려면 주가 상승을 제도 상승으로 연결해야 한다. 주주친화 정책은 선택이 아니라 자본시장 신뢰의 기본 조건이다.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이 지배주주의 지배력 강화에만 쓰이고 일반주주는 의사결정의 주변부에 머문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이름만 바꿔 다시 돌아온다. 주가가 올랐다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가 상승은 개혁을 미룰 이유가 아니라 개혁을 완성할 기회다. 그런 점에서 상법 개정과 자본시장 개혁은 더 속도를 내야 한다. 이미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집중투표제 확대, 감사위원 분리선출,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은 시장의 기대를 키운 핵심 재료였다. 한국의 개정 상법이 새로 취득한 자사주를 일정 기간 내 소각하도록 해 자사주가 지배력 방어 수단으로 활용돼 온 관행을 겨냥했다. 다만 제도는 법전에 적힌 문구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실질적 주주환원으로 이어지는지, 물적분할과 중복상장 과정에서 기존 주주의 이익이 보호되는지, 국민연금과 기관투자자가 수탁자 책임을 제대로 행사하는지, 불공정거래에 대한 처벌이 시장의 공포가 될 만큼 강한지까지 봐야 한다. 자본시장 개혁은 지수를 올리는 이벤트가 아니라 시장의 습관을 바꾸는 일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수익의 다각화다. 반도체가 한국 증시의 앞문을 열었다면, 다음 방은 전력기기, 원전, 조선, 방산, 자동차, 로봇, 바이오, 금융, 콘텐츠, 인프라 기업들이 채워야 한다. AI 시대의 반도체 수요는 전력망과 냉각장치, 데이터센터, 소재·부품·장비, 보안, 클라우드 서비스로 이어진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반도체 주가만의 축제로 끝낼 것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체의 투자 기회로 넓혀야 한다. 금융권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은행 예금과 부동산에 갇혀 있던 가계 자산을 생산적 자본으로 이동시키려면 장기투자 상품, 배당형 상품, 연금계좌, ISA, 퇴직연금의 질을 높여야 한다. 개인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기 급등주를 따라붙는 통로가 아니라 산업 성장의 열매를 장기적으로 나눠 갖는 구조다. 레버리지 ETF와 신용융자가 시장의 불쏘시개가 될 수는 있어도, 국민 자산 형성의 기둥이 될 수는 없다. 특히 빚투의 확산은 경계해야 한다. 최근 한국 증시 랠리가 개인투자자의 신용거래와 레버리지 상품으로 더 가팔라지고 있으며, 증거금 부채가 크게 늘었다. 거래대금이 늘고 계좌가 불어나는 것은 시장의 활력이다. 그러나 빚으로 산 주식은 작은 조정에도 큰 손실을 만든다. 상승장에서는 모두가 용감해 보이지만, 하락장에서는 레버리지가 먼저 무너진다. 정부도 시장의 환호에 취해선 안 된다. 세제 혜택, 배당소득 과세 정비, 장기투자 유인, 불공정거래 근절, 공시 투명성 강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특정 지수 목표를 앞세워 시장을 관리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시장은 방향을 제시받을 수는 있어도 끌려가서는 안 된다. 자본시장 선진화의 핵심은 정부의 손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선명해지고, 기업과 투자자가 그 규칙을 신뢰하는 데 있다. 기업도 달라져야 한다. 주주환원은 주가가 오를 때만 내놓는 시혜가 아니라 자본 조달의 대가다. 배당을 늘리고, 불필요한 자사주는 소각하며, 자본비용보다 낮은 수익률의 투자는 과감히 접어야 한다. 총수 일가의 지배권 방어보다 기업가치 제고가 우선이라는 원칙이 자리 잡아야 한다. 8000시대의 기업은 더 이상 ‘한국 시장이라서 이 정도면 된다’고 말할 수 없다. 글로벌 자금은 한국 기업을 삼성전자·SK하이닉스만으로 보지 않는다. 이사회, 공시, 배당, 승계, 소수주주 보호까지 함께 본다. 고전은 늘 흥분한 시대에 차가운 생명수 역할을 한다. <맹자>에는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번영의 순간에 위험을 생각하는 나라와 기업은 오래 간다. 반대로 좋은 시절이 계속될 것이라 믿는 순간, 시장은 가장 비싼 수업료를 요구한다. 코스피 8000시대에 필요한 태도는 도취가 아니라 절제다. 비관이 아니라 준비다. 한국 증시는 오랫동안 저평가의 늪에 갇혀 있었다. 기업은 돈을 벌어도 주주는 소외됐고, 지배구조는 복잡했으며, 불공정거래 처벌은 약하다는 불신이 컸다. 이제 그 늪에서 빠져나올 기회가 왔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문을 열었고, 자본시장 개혁은 그 문을 닫히지 않게 만드는 경첩이다. 문이 열렸다고 집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코스피 8000은 한국 경제에 주어진 상장이 아니다. 숙제장이다. 첫 줄에는 반도체 경쟁력을 더 키우라고 적혀 있다. 둘째 줄에는 주주친화 정책을 되돌리지 말라고 적혀 있다. 셋째 줄에는 특정 업종 쏠림을 넘어 산업과 수익의 지평을 넓히라고 적혀 있다. 넷째 줄에는 개인투자자의 열기를 장기 자산 형성의 문화로 바꾸라고 적혀 있다. 지금 필요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코스피 8000을 자축하되 8000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음 단계의 한국 자본시장은 더 높은 지수가 아니라 더 깊은 신뢰로 증명돼야 한다. 반도체가 끌어올린 시장을 제도가 떠받치고, 주주가 믿는 기업이 자금을 끌어오며, 국민의 자산이 생산적 투자로 흐를 때 비로소 코스피 8000은 일시적 기록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새 출발선이 될 것이다.
2026-05-28 1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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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노사 성과금 갈등,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
[경제일보]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가까스로 파국을 피했다. 총파업 예고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노사가 2026년 임금협상 잠정 합의안을 도출하면서 반도체 생산 차질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단 멈춰 섰다. 다만 오는 22∼27일 이 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투표라는 절차가 남아 있는 만큼 이를 완전한 종결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이번 잠정 합의는 정부의 적극적 중재 속에 이뤄졌고, 투표가 가결되면 협상이 공식 타결된다. 문제는 합의 그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균열이다. 삼성전자 노사 갈등의 핵심은 성과급이었다. 노조는 성과급 산정 기준과 배분 방식의 제도화를 요구했고 회사는 경영환경과 사업부별 실적, 글로벌 경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돌아왔고, 인공지능(AI) 열풍이 삼성전자의 실적을 밀어올린 것은 사실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매출 133조9000억원, 영업이익 57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반도체(DS)부문은 AI 고부가 제품 판매 확대와 메모리 가격 상승으로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냈고 HBM4와 차세대 저전력 메모리 모듈 양산도 시작했다. 그러나 좋은 실적이 곧 무제한의 성과급 요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성과는 나눠야 한다. 하지만 성과 배분은 기업의 미래 투자, 주주 책임, 협력사 생태계, 국가경제에서의 역할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한 기업이지만 동시에 한국 제조업과 수출, 고용, 자본시장 신뢰를 떠받치는 핵심 축이다. 반도체 라인이 멈추면 한 회사의 손익계산서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 기업, 물류, 전력, 협력업체, 지역경제, 금융시장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일반적인 임단협 갈등과 차원이 다르다. 삼성전자 구성원들이 더 나은 보상과 투명한 성과급 기준을 요구할 권리는 당연하다. 고성과를 낸 조직이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요구의 수준과 방식이다. 성과급이 경영 성과와 연동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기업의 중장기 투자 여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훼손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 산업은 오늘 벌어 내일 나누는 장사가 아니다. 수십조 원의 선행 투자가 필요하고 기술 세대가 바뀔 때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더 우려되는 것은 노노 갈등이다. 성과급 갈등은 같은 회사 안에서도 사업부별 이해관계를 가른다. 반도체 부문이 초과 성과를 냈다고 해서 전사 구성원이 같은 방식으로 나눠야 하는지, 사업부별 기여도와 위험 부담을 어떻게 반영할지, 장기 투자에 필요한 내부 유보를 어느 정도 인정할지에 대한 논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동체의 원칙을 세우는 방향이 아니라 ‘누가 더 가져갈 것인가’의 다툼으로 흐르면 조직 내부 신뢰가 무너진다. 기업의 경쟁력은 기술과 설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구성원 간 신뢰, 경영진에 대한 신뢰, 성과 배분의 예측 가능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 삼성전자의 갈등은 다른 대기업 노사관계에도 파장을 주고 있다. 카카오 노조는 카카오 본사를 포함한 5개 법인에서 파업 찬반 투표가 모두 가결됐다고 밝혔다. 카카오 노조는 경영 쇄신, 책임 경영, 고용 안정, 공정한 성과 보상과 이익 분배 등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성과급 배분 구조가 갈등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카카오 본사가 실제 파업에 나서면 창사 이래 첫 본사 파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상징성이 작지 않다. 노사 갈등의 확산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불안과 맞물려 더 무겁다. 지금 한국경제는 겉으로는 반도체 훈풍을 타고 있지만 속으로는 성장 체력이 빠르게 약해지고 있다. IMF는 올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9%로 전망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100대 지표에서도 2026년 1분기 경제성장률은 1.7%로 제시돼 있다. 단기 경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는 노동공급과 내수 기반을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는 2025년 합계출산율을 0.80명, 출생아 수를 25만4500명으로 집계했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025년 20.3%에서 2072년 47.7%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외 리스크도 크다. IMF는 2026년 세계경제가 중동전쟁의 충격 속에서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고 진단했다. 제한적 충돌을 가정해도 세계 성장률은 2026년 3.1%, 2027년 3.2%로 둔화될 것으로 봤고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기대, 금융 여건 긴축이 세계경제의 회복력을 시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미국의 관세정책과 공급망 재편, 기술 패권 경쟁이 겹치면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제조기업은 비용과 시장 양쪽에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역시 하반기 전망에서 글로벌 관세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등 다양한 리스크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내부의 성과 배분 갈등이 장기화하면 국가경제의 부담은 커진다. 한국경제는 지금 새로운 성장동력을 충분히 발굴하지 못한 채 반도체 의존도를 다시 키우고 있다. AI 반도체 호황은 분명한 기회지만 이것이 영구적 안전판은 아니다. 메모리 가격은 사이클을 탄다. HBM 경쟁은 기술과 수율, 고객 인증에서 매 분기 승부가 갈린다. 중국의 추격, 미국의 규제, 대만의 파운드리 우위, 일본의 소재·장비 부활까지 감안하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호황기일수록 더 냉정해야 한다. 노조도 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노동의 몫을 키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훼손하는 요구는 결국 노동의 기반도 약하게 만든다. 성과급은 권리의 언어만으로 풀 수 없다. 책임의 언어가 함께 있어야 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고성과를 낸 직원들에게 ‘어렵다’는 말만 반복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성과급 산정 기준을 더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업부별 성과와 전사 기여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불투명한 보상 체계는 언제든 불신을 낳고, 불신은 파업보다 더 오래가는 비용을 만든다. 노조와 회사가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 노동은 노동의 권리를 말하고, 경영은 경영의 책임을 말해야 한다. 다만 그 다름이 기업의 존속과 국가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충돌로 가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노사 합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성과급 제도의 투명성, 사업부별 기여도 반영, 장기 투자 재원 확보, 위기 시 고통 분담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성과가 클수록 배분의 원칙은 더 정교해야 한다. 호황일수록 미래 투자와 위험 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국경제는 지금 운 좋게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길목에 서 있다. 그러나 저출산, 잠재성장률 하락, 내수 부진, 대외 불확실성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다.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지금의 성과를 오늘 모두 나눌 것인가, 아니면 내일의 경쟁력을 위해 원칙 있게 나눌 것인가. 성과 배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경제의 기둥을 흔드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노사는 이번 합의를 계기로 ‘더 많이 가져가는 협상’이 아니라 ‘더 오래 살아남는 협상’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삼성전자에도, 노동자에게도, 한국경제에도 이롭다.
2026-05-21 09:0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