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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단 10년을 5년으로…기업형 첨단도시, 결국 '사람'이 답이다
[경제일보] 정부가 '산단 조성 10년' 시대를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반도체와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를 대한민국 미래 산업의 3대 축으로 육성하기 위해 기업이 원하는 부지를 신속하게 공급하고 공장과 연구시설이 집적된 첨단산업 거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산업계에서는 이번 프로젝트의 성패가 인허가 기간 단축보다 우수 인재의 정착과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 구축 여부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와 AI 산업은 공장만 세운다고 경쟁력이 확보되는 산업이 아니다. 세계적인 연구개발(R&D) 인력과 협력기업, 대학, 병원, 교육·문화시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 혁신이 가능하다. 첨단산업 경쟁의 무게중심이 생산시설 확충에서 인재와 산업 생태계를 갖춘 도시 조성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국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제시하며 기업형 첨단도시 조성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웠다. 정부는 산단 기획부터 공장 가동까지 통상 10년 이상 걸리던 절차를 5년 이하로 단축하고 기업과 인재가 함께 모이는 새로운 산업도시를 조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산단에서 첨단도시로…정부가 바꾸려는 산업 지도 이번 구상의 핵심은 산업단지를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닌 생활권과 결합한 첨단도시로 조성하겠다는 데 있다. 정부는 기업 맞춤형 입지 공급과 함께 주거·교육·문화·의료 시설을 확충하고 정주지까지 30분, 공항과 항만 등 물류 거점까지 1시간 이내 이동할 수 있는 교통망 구축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역 거점 국립대와 연계한 인재 양성 체계도 함께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정부가 이처럼 '도시'를 강조하는 이유는 첨단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 제조업 시대에는 공장을 빠르게 건설하고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것이 경쟁력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생산시설이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연결되고 이를 운영할 고급 인력이 지속적으로 유입돼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실제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 판단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단순한 부지 확보를 넘어 엔지니어가 장기간 근무할 수 있는 주거 환경과 교육 여건, 의료 서비스, 교통 접근성, 협력사와 연구기관이 밀집한 연구개발 기반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다. 최첨단 공장을 구축하더라도 우수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생산성과 연구개발 역량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투자 경쟁력은 공장 자체보다 우수 인력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정주 여건에서 갈린다는 것이 산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TSMC·인텔이 보여준 교훈…공장만으로는 생태계 못 만들어 이 같은 변화는 해외 주요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애리조나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TSMC는 미국 정부의 반도체 육성 정책에 맞춰 대규모 생산시설을 건설하고 있지만 초기에는 반도체 설비를 설치할 숙련 기술인력 부족으로 공장 가동 일정이 연기됐다. 현지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대만 엔지니어를 파견해 교육을 병행하는 등 인력 문제가 사업 추진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대규모 투자만으로 첨단산업 생태계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인텔 역시 미국 오하이오주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단지를 조성하며 '실리콘 하트랜드(Silicon Heartland)' 구축에 나섰지만 시장 환경 변화와 투자 일정 조정, 기반시설 조성 등의 영향으로 당초 계획보다 공장 완공 시점이 늦춰졌다. 업계에서는 대규모 첨단산업 클러스터는 생산시설 건설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재 확보와 협력기업 유치, 도시 기반시설 확충이 함께 이뤄져야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로 보고 있다. 국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평택캠퍼스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상당수 연구개발 인력은 용인과 분당, 수지, 동탄 등 수도권 생활권을 기반으로 근무하고 있다. 연구개발 인력과 협력기업, 대학, 교통망이 이미 집적돼 있다는 점이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꼽힌다. '빠른 산단'보다 '머물고 싶은 도시'가 경쟁력 반면 앞으로 조성될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거점은 생산시설과 함께 새로운 생활권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우수 인력이 장기간 정착하려면 주거·교육·의료·문화 등 생활 인프라가 함께 구축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이번 메가 프로젝트에서 기업형 첨단도시를 별도 축으로 제시한 것은 기존 산업단지 정책과 결이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국가산업단지나 혁신도시 정책이 생산시설 공급이나 공공기관 이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산업과 주거, 연구개발, 교육, 교통을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 협력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혁신 거점을 구축하겠다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다. 다만 정부 구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정주 여건뿐 아니라 산업 기반시설 확보라는 과제도 해결해야 한다. 기업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전력망과 용수 확보, 환경영향평가, 주민 수용성, 교통 인프라 구축 등이 계획대로 이뤄질지가 사업 추진 속도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지역 거점 대학이 반도체와 AI 산업이 요구하는 고급 인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을지도 기업형 첨단도시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다. 산업계에서는 이번 정책이 단순히 산단 조성 기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이 원하는 것은 빠른 인허가가 아니라 연구개발과 생산, 생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라는 것이다. 결국 정부가 제시한 '산단 10년에서 5년'이라는 목표의 진짜 의미는 공장을 더 빨리 짓는 데 있지 않다. AI 시대 국가 경쟁력은 생산시설의 규모보다 우수 인재와 기업이 지속적으로 모여 혁신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을 얼마나 갖추느냐에 달려 있다. 기업형 첨단도시 역시 '빠른 산단'이 아니라 기업과 인재가 머물고 성장하는 혁신 거점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800조원 규모 메가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결국 사람이 모여야 하는 산업인 만큼 주거·교육·의료·문화 등 정주 여건이 전력과 용수 못지않게 중요한 투자 요소"라며 "협력사와 소부장 기업이 함께 집적되고 지역 대학과 연계한 인재 양성 체계가 구축돼야 지속 가능한 반도체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2026-07-10 17: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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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나혼렙·샹프로'로 세계 팬덤 잡는다…IP 전략의 승부수
[경제일보] 넷마블의 하반기 신작 전략은 단순히 게임 출시를 늘리는 데 있지 않다. 핵심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검증된 애니메이션·웹툰 IP를 게임으로 확장하고, 그 팬덤을 실제 이용자로 전환하는 데 있다. '나 혼자만 레벨업: 카르마'와 '샹그릴라 프론티어: 일곱 최강종'은 이러한 전략의 중심에 선 작품이다. 배경에는 글로벌 게임 시장의 변화가 있다. 국내 모바일 MMORPG 시장은 성장세가 둔화됐고, 신작 성패는 이제 해외 시장에서 갈린다. 이용자 확보 비용은 높아졌고 새로운 IP를 처음부터 키우는 데 드는 시간과 위험도 커졌다. 이 때문에 게임업계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확보한 웹툰과 애니메이션 IP를 활용해 초기 이용자를 확보하는 전략에 무게를 두고 있다. 넷마블 역시 이러한 흐름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글로벌 흥행에 성공한 '나 혼자만 레벨업: 어라이즈'는 회사에 중요한 경험을 남겼다. 원작 팬덤이 게임으로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후속 프로젝트인 '카르마' 역시 단순한 후속작이 아니라 IP 생태계를 확장하는 전략적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북미 최대 애니 행사에서 팬덤부터 공략...'샹프로'까지…애니 IP 라인업 확대 넷마블은 신작 '나 혼자만 레벨업: 카르마'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애니메 엑스포 2026'에서 공개했다. 애니메 엑스포는 북미 최대 애니메이션 행사로, 글로벌 애니메이션 팬과 게임 이용자가 동시에 모이는 대표 콘텐츠 이벤트다. 게임쇼보다 팬덤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IP 기반 게임에는 더욱 중요한 무대다. 넷마블은 이번 행사에서 신규 PV 영상과 키아트를 공개하고 성진우와 용제 안타레스, 이형의 헌터, 오리지널 캐릭터 등을 선보였다. 영상 말미에는 오는 9월 공개될 주요 발표도 예고했다. 눈에 띄는 것은 공개 방식이다. 게임 시스템보다 원작 팬들이 반응할 요소를 전면에 배치했다. 안타레스의 영어 성우로 트로이 베이커를 공개했고, 애니메이션에서 성진우 영어 더빙을 맡은 알렉스 리는 무대에서 게임 스토리를 직접 더빙하며 팬들과 호흡했다. 게임 발표라기보다 하나의 팬 이벤트에 가까운 연출이었다. 이는 '나 혼자만 레벨업'이라는 IP의 특성을 반영한 전략이다. 글로벌 팬덤을 먼저 결집시키고 이를 게임 이용자로 연결하는 것이 초기 흥행의 핵심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나 혼자만 레벨업: 카르마'는 모바일 로그라이트 액션 RPG다. 원작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던 '윤회의 잔' 이후 성진우가 차원의 틈에서 보낸 27년의 시간을 게임만의 새로운 이야기로 풀어낸다. 원작의 빈 서사를 확장하는 방식인 만큼 팬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개발사에는 독자적인 콘텐츠를 구축할 여지를 제공한다. 넷마블의 IP 전략은 '나 혼자만 레벨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또 다른 신작 '샹그릴라 프론티어: 일곱 최강종' 역시 글로벌 애니메이션 팬층을 겨냥한 작품이다. 넷마블은 7일 '샹프로의 날' 특별 방송을 통해 신규 PV와 캐릭터 비주얼, 전투 장면을 공개할 예정이다. '샹그릴라 프론티어'는 누적 조회 수 10억회를 기록한 인기 웹소설·애니메이션 IP다. 작품 자체가 VR 게임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게임화 과정에서도 높은 몰입감을 구현하기에 적합한 콘텐츠라는 평가를 받는다. 넷마블넥서스가 개발 중인 이 작품은 다양한 동료와 NPC를 만나 거대 몬스터를 공략하는 액션 RPG다. 한 손으로 즐기는 2인 교체 전투를 앞세워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한 것도 특징이다. 결국 두 작품은 서로 다른 IP를 활용하지만 전략은 같다. 이미 형성된 글로벌 팬덤을 게임으로 연결하고, 애니메이션과 게임 소비를 하나의 콘텐츠 생태계로 묶겠다는 것이다. ◆ 유명한 IP보다 중요한 것은 운영 능력 다만 IP 확보가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는 유명 원작을 활용한 게임들이 잇따라 출시되고 있지만, 원작 해석이 어긋나거나 게임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팬덤의 반발도 빠르게 커진다. 가장 충성도 높은 이용자가 동시에 가장 까다로운 평가자가 되는 구조다. 결국 성패는 게임 완성도에서 갈린다. 원작의 감성과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게임만의 전투 재미와 성장 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출시 이후에는 콘텐츠 업데이트와 과금 체계, 운영 안정성까지 함께 검증받아야 한다. 넷마블이 애니메이션 IP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국내 게임사의 성장 무대가 이미 글로벌 시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제 경쟁력은 유명한 IP를 확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글로벌 팬덤을 얼마나 오래 게임 안에 머물게 하고, 지속 가능한 이용자로 전환할 수 있느냐가 진짜 승부처다. '나 혼자만 레벨업: 카르마'와 '샹그릴라 프론티어'는 그 시험대의 첫 작품들이다. 넷마블의 하반기 성적표 역시 신작 출시 자체보다 글로벌 팬덤을 장기적인 게임 생태계로 연결할 수 있는지에 따라 갈릴 가능성이 크다. IP는 출발점일 뿐이다. 시장이 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게임을 얼마나 오래 서비스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운영 역량이다.
2026-07-09 09: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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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면죄부, 사법정의는 어디에 있었나
[경제일보] 친족상도례라는 말은 어렵다. 한자로 쓰면 더 멀어진다. 그러나 내용은 어렵지 않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족 사이에서 절도, 사기, 횡령, 배임 같은 재산범죄가 벌어졌을 때 국가가 처벌을 삼가거나, 피해자가 고소해야만 처벌 절차로 갈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법은 오래전부터 가족 안의 돈 문제에 형벌권을 들이대는 일을 조심스러워했다. 가정의 평온을 지키고, 가족 사이의 일을 가족 내부에서 해결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그 취지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사이의 사소한 금전 다툼까지 모두 경찰서와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회가 건강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가족이라는 말이 언제나 따뜻한 울타리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신뢰의 이름이지만, 범죄자가 그 신뢰를 이용하면 피해자는 가장 늦게 구조된다. 남이 훔치면 절도이고, 남이 속이면 사기인데, 가족이 훔치고 속이면 “집안일”로 밀려나는 순간이 있었다. 법의 이름으로 그런 일이 가능했다. 친족상도례 논란의 본질은 가족 해체가 아니다. 피해자를 법 밖에 세워 둔 제도의 문제다. 피해자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재판절차에서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가해자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형사책임을 피한다면 사법정의는 출발선에서 멈춘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24년 형법 제328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당시 조항은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동거가족 또는 그 배우자 사이의 권리행사방해죄에 대해 형을 면제하도록 했다. 형법은 절도, 사기, 공갈, 횡령·배임 등 여러 재산범죄에도 제328조를 준용해 왔다. 다시 말해 친족상도례는 권리행사방해죄 한 조항에 머무르지 않고 친족 간 재산범죄 전반에 영향을 미쳐 온 셈이다. 헌재는 해당 조항이 형사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헌재 결정문을 보면 친족상도례가 왜 더 이상 옛 논리로 버틸 수 없게 됐는지 알 수 있다. 청구인 측은 친족상도례가 노인이나 장애인 등 약자를 상대로 한 악질적 재산범죄의 면죄부로 기능한다고 주장했다. 법이 가족 내부의 자율 해결을 기대하는 사이, 현실의 피해자는 고립됐다. 가족 안에서 돈을 빼앗긴 사람은 가족 안에서 침묵을 요구받는다. 가해자는 경찰서 앞에서 가족을 말하고, 법정 앞에서 화해를 말한다. 피해자는 생활비, 주거, 간병, 정서적 의존 때문에 끝까지 싸우기 어렵다. 형사사건 현장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다. 친족 간 재산범죄는 폭행처럼 상처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 통장, 인감, 위임장, 법인카드, 가족회사, 명의신탁, 생활비 계좌 같은 이름 뒤로 숨어 있다. 처음에는 부탁처럼 시작된다. “가족인데 믿어라”, “내가 관리해 주겠다”, “나중에 정산하자”는 말이 이어진다. 피해자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계좌가 비어 있거나, 회사 돈이 빠져나갔거나, 명의가 옮겨져 있다. 그때 가해자는 다시 가족을 앞세운다. “고소까지 할 일이냐”는 말이 나온다. 가족의 이름은 한 번은 범행의 도구가 되고, 또 한 번은 책임 회피의 방패가 된다. 방송인 박수홍 씨 사건이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 씨 친형은 2011년부터 2021년까지 매니지먼트 회사를 운영하면서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았고, 2026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됐다. 이 사건은 법인 자금 횡령이 중심이어서 친족상도례가 그대로 적용된 전형적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대중이 이 사건을 통해 본 것은 가족회사, 가족 간 신뢰, 돈 관리, 내부 감시 부재가 맞물릴 때 재산범죄가 얼마나 오래 숨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항소심은 피해 회사가 가족회사로서 내부 감시체계가 취약했고 형제 관계의 신뢰가 악용됐다는 점을 특별가중 요소로 봤다. 국회도 헌재 결정 이후 움직였다. 2025년 12월 31일 공포된 형법 개정으로 과거의 형 면제 조항은 삭제됐다. 개정 형법 제328조는 피해자의 친족이 재산범죄를 저지른 경우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도 고소할 수 있도록 형사소송법상 직계존속 고소 제한을 배제했다. 친족 아닌 공범에게는 친족 특례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남겼다. 가까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형을 면제받던 시대는 끝났다. 아버지 돈을 자식이 훔쳐도, 형제의 돈을 다른 형제가 빼돌려도, 배우자가 상대방 재산을 횡령해도 이제 “가족이니까 처벌하지 않는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고소하면 수사와 재판으로 갈 수 있다. 가족 내부의 자율 해결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자의 입을 막던 낡은 문은 닫혔다. 그러나 여기서 칼럼을 끝내면 절반만 본 것이다. 형 면제가 사라졌다고 친족 특례의 문제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개정법은 친족 간 재산범죄를 원칙적으로 친고죄로 정리했다. 친고죄란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검사가 재판에 넘길 수 있는 범죄를 말한다.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장점이 있다. 가족 사이의 일률적 처벌을 피하고, 진정한 화해가 이뤄진 사건까지 국가가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 하지만 친고죄는 피해자가 자유롭게 고소하고 자유롭게 고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가족 내부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노부모가 자식에게 생활을 의존하고 있다면 어떠한가. 장애가 있는 피해자가 재산 관리를 친족에게 맡겨 왔다면 어떠한가. 배우자나 형제가 집안 여론을 동원해 “네가 가족을 감옥 보낼 셈이냐”고 몰아붙이면, 피해자의 고소 취소가 정말 자유로운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형 면제의 시대에는 법이 피해자를 밀어냈고, 친고죄의 시대에는 가족 내부 압박이 피해자를 다시 밀어낼 수 있다. 대법원의 2026년 4월 판단은 이 대목을 생각하게 한다. 부모의 집에서 금고를 들고 나와 현금, 상품권, 귀금속 등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피해자인 부모가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하자, 대법원은 개정 형법상 친족 간 절도는 친고죄에 해당하고 1심 판결 선고 전 고소가 취소된 이상 공소기각 판단을 했어야 한다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판단은 현행법 체계상 자연스럽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친고죄 사건에서 법원이 공소를 유지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사건은 개정 이후의 숙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법은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동시에 그 의사가 가족 내부의 압박, 두려움, 생계 의존, 정서적 굴레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특히 노인과 장애인 피해자는 이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보건복지부의 2024년 장애인학대 현황에 따르면 전국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접수된 장애인학대 신고는 6031건이었다. 학대로 판정된 사례는 1449건이었다. 학대 피해자 중 발달장애인의 비율은 71.1%였고, 학대 유형 중 경제적 착취는 18.6%를 차지했다. 숫자가 말하는 장면은 냉정하다. 가족 안에서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돈과 노동력을 빼앗기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노인학대도 가정 안에서 많이 발생한다. 법제처 생활법령정보는 2025년 학대피해노인이 7973명으로 전년보다 11.2% 증가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노인학대는 신체적 학대만을 뜻하지 않는다. 정서적 학대, 경제적 학대, 방임, 유기도 포함된다. 재산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통장을 가져가고, 기초연금이나 예금을 생활비라는 이름으로 빼 쓰고, 부동산 처분 권한을 넘겨받은 뒤 돌려주지 않는 일도 가족 안에서 벌어진다. 가족은 법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위험할 때 더 무섭다. 타인의 범죄는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 가족의 범죄는 신고하기 전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 많다. 왜 가족을 고소하느냐는 질문을 먼저 받는다. 피해자는 돈을 잃은 사람인데도 가족을 깨뜨린 사람처럼 몰린다. 가해자는 범행을 설명하기보다 관계를 내세운다. “부모 자식 사이”, “형제 사이”, “부부 사이”라는 말이 피해 사실 위에 덮인다. 사법정의가 어려워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형사법의 목적은 국가가 벌을 주고 끝내는 데만 있지 않다. 죄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고, 피해자의 말을 공적 절차 안으로 들여오며,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를 세우는 일도 형사사법의 역할이다. 응보라는 말도 거칠게만 볼 필요가 없다. 응보는 복수가 아니다. 범죄로 무너진 질서에 대해 공동체가 “그 일은 잘못됐다”고 말하는 절차다. 피해자는 그 선언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당한 일이 집안일이나 운명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였다는 확인을 받는다. 가족 안의 재산범죄에서도 그 확인은 필요하다. 친족 특례를 모두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가족관계에는 회복 가능성이 있고, 형사처벌이 오히려 분쟁을 키우는 사건도 있다. 부모 지갑에서 소액을 가져간 미성년 자녀 사건과, 장애가 있는 친족의 보조금과 예금을 장기간 빼돌린 사건을 같은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술김에 벌어진 일회성 절도와, 가족회사를 이용해 수년간 돈을 빼낸 횡령도 다르다. 법은 차이를 봐야 한다. 과거 친족상도례의 잘못은 그 차이를 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가까운 친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피해 규모, 범행 기간, 피해자의 처벌 의사, 피해자의 취약성, 가해자의 지배관계, 피해 회복 정도를 뒤로 밀었다. 앞으로의 과제도 그 지점에 있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친족 간 재산범죄에서 고소 취소가 접수됐다고 곧바로 “화해”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가 독립된 상태에서 의사를 밝혔는지, 가해자와 주거·생계·돌봄 관계로 묶여 있지는 않은지, 피해 회복이 실제로 이뤄졌는지, 다른 가족의 압박이 있었는지 따져야 한다. 노인, 장애인, 질병이 있는 피해자라면 진술 조력, 국선변호인, 피해자 보호명령, 후견제도, 임시 재산관리 장치까지 함께 검토해야 한다. 고소권을 법전에 적어 두는 일과 피해자가 그 권리를 실제로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일은 다르다. 입법도 한 번 더 손봐야 한다. 친고죄 일원화는 헌재 결정 이후 급한 불을 끈 절충안에 가깝다. 친족 간 재산범죄를 모두 일률적으로 친고죄로 묶는 방식이 적절한지도 계속 따져야 한다. 피해액이 크거나 범행 기간이 길거나, 피해자가 노인·장애인 등 취약한 지위에 있거나, 가해자가 재산관리 권한을 이용한 사건이라면 고소 취소만으로 절차가 끝나지 않도록 별도의 예외를 둘 필요가 있다. 가족 내부 해결을 존중하더라도, 가족 내부에서 해결될 수 없는 범죄까지 가족에게 되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 언론도 이 문제를 연예인 가족 분쟁이나 자극적인 집안싸움으로 소비해선 안 된다. 친족상도례 논란은 유명인의 불행담이 아니라 우리 형사사법이 가족 안의 피해자를 어디까지 보호할 수 있는지 묻는 사건이다. 고령화가 빨라지고 1인 가구와 재혼가정, 사실상 돌봄 가족, 가족회사, 가족 간 재산관리 관계가 복잡해지는 시대다. 예전처럼 “가족끼리 알아서 하라”는 말로 덮을 수 있는 사건은 줄어들고 있다. 가족의 형태가 달라졌는데 법의 감각만 오래된 사진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친족상도례의 형 면제 조항은 역사 속으로 물러났다. 늦었지만 필요한 변화였다. 그러나 사법정의는 조항 하나를 고쳤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고소할 수 있어야 하고, 고소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고소를 취소할 때도 그 결정이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이라는 말이 피해자의 권리를 지우는 순간, 법은 가장 가까운 곳의 약자를 놓친다. 가족의 평온은 범죄의 침묵 위에 세울 수 없다. 진짜 평온은 가해자의 책임을 덮는 데서 오지 않는다.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할 수 있고, 국가는 그 말을 절차 안에서 듣고, 법원은 관계가 아니라 행위를 기준으로 판단할 때 가족도 사회도 무너지지 않는다. 친족 특례의 시대가 남긴 교훈은 하나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사법정의보다 앞설 수는 없다.
2026-07-09 07: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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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정치, 파탄의 의회주의… '도(道)'를 잃은 국회에 고함
[경제일보] 대한민국 국회가 길을 잃었다. 갈등은 민주주의의 숙명이지만,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건강한 경쟁이 아니라 정치의 자기 파괴에 가깝다. 대화는 실종되고 타협은 조롱받으며, 상대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된다. 의회는 민의를 수렴하는 광장이 아니라 다수의 힘과 소수의 저항이 충돌하는 전쟁터로 변질되고 있다. 이는 특정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의회민주주의 전체가 맞닥뜨린 심각한 위기다. 최근 국회 원 구성 과정에서 나타난 다수당의 일방적 강행 처리와 입법 독주, 이에 맞선 소수당의 무기력한 저항은 우리 정치가 의회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대화와 절제, 타협을 잃어버렸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수는 숫자의 우위를 절대 권력으로 착각하고, 소수는 국정 운영의 동반자가 아니라 발언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협치는 사라지고 힘만 남았다. 숫자가 정의를 대신하고, 권력이 상식을 밀어내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병들기 시작한다. 특히 필리버스터마저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필리버스터는 단순한 시간 끌기가 아니다. 다수결이 놓칠 수 있는 소수의 목소리를 국민에게 끝까지 전달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마지막 안전장치다. 토론이 귀찮다고 토론을 없애고, 반대 의견이 불편하다고 침묵을 강요하는 국회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지배일 뿐이다. 효율은 행정의 가치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는 숙의와 합의에 있다. 역사는 오만한 권력이 오래가지 못했음을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성경 잠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경고한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민심은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다. 오늘 절대다수의 의석을 가진 정당도 내일은 국민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다. 민심은 배를 띄우는 물이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는 거센 파도가 되기도 한다. 노자는 『도덕경』 제9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득 채우고 또 채우는 것은 적당한 때에 멈추는 것만 못하며, 지나치게 날카롭게 갈면 오래 보존할 수 없다." 오늘의 국회는 바로 이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다수당은 의석을 끝까지 채우려 하고, 야당은 상대를 겨누는 창끝만 더욱 날카롭게 벼른다. 그러나 지나친 것은 반드시 모자람만 못하다. 힘은 절제될 때 권위가 되고, 권력은 양보할 때 존경을 얻는다. 끝없이 채우려는 욕망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민주주의는 100 대 0의 승부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를 조정하여 국민 전체의 이익을 찾는 과정이다. 51 대 49로 결정되더라도 나머지 49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다수는 소수를 품을 때 비로소 정당성을 얻는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원칙이지만, 다수의 횡포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국회의 존재 이유도 법안을 빨리 처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토론하고 설득하며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토론 없는 국회는 거수기에 불과하고, 협치 없는 의회는 민주주의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은 국회가 싸우라고 권력을 준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한을 위임했다. 오늘날 정치권이 가장 크게 잃어버린 것은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이다. 정당은 경쟁하지만 국가는 공동체다. 여야는 선거에서는 경쟁자일지라도 국정에서는 동반자여야 한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정치의 본질은 사라지고 적대만 남는다. 소수당 역시 국민이 선택한 헌법기관이다. 그들의 권한을 무력화하는 것은 그들을 지지한 국민의 목소리를 지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 국회는 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첫째, 여야가 참여하는 상설 협치협의체를 제도화해 원 구성과 주요 법안은 충분한 협의를 거친 뒤 처리하는 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 둘째, 필리버스터와 상임위원회 토론권 등 소수 의견을 보장하는 제도를 정치적 편의에 따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셋째, 다수당은 숫자의 힘보다 책임의 무게를 먼저 생각하고, 소수당 역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책임 있는 야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넷째, 국회의원 개개인은 당리당략보다 헌법과 국민을 우선하는 의회주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국회에 부여한 책무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고 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이 말은 더욱 절실하다. 국민 위에 정당이 있을 수 없고, 국민 위에 국회도 있을 수 없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것일 뿐이다.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대결보다 대화를, 독주보다 협치를, 승리보다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의회주의는 힘이 아니라 절제에서 완성되고,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꽃핀다. 지금 국회가 되찾아야 할 것은 더 많은 권력이 아니라 더 깊은 겸손이며,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넓은 포용이다. 대한민국 정치는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오만과 독선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아니면 상식과 협치의 길로 돌아갈 것인가. 역사는 언제나 힘보다 품격을 기억했고, 국민은 언제나 권력보다 책임을 선택했다. 국회는 이제라도 '도(道)'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무너져가는 의회주의를 살리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2026-07-03 16: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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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 독주 균열 노린다…'국산 AI칩' 퓨리오사AI의 승부수
[경제일보] 정부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국가 핵심 인프라로 공식화하면서 국내 AI 반도체 산업도 중대한 분기점을 맞았다. 수백조원 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이 현실화되면 이를 구동할 AI 반도체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AI 데이터센터 확대가 곧바로 국내 AI 반도체 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AI 데이터센터 시장은 엔비디아 GPU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어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이뤄지더라도 핵심 연산 반도체 수요는 해외 기업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처음으로 '국산 AI 반도체'를 메가 프로젝트의 핵심 축으로 제시하면서 퓨리오사AI와 같은 국내 팹리스 기업이 국가 AI 인프라 공급망에 진입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과거에는 거대언어모델(LLM)을 학습시키기 위한 초고성능 GPU 확보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실제 AI 서비스를 운영하는 '추론(Inference)' 경쟁력이 새로운 승부처로 떠오르고 있다. AI 에이전트와 피지컬 AI, 자율주행, 제조 AI 등이 확산될수록 AI 모델을 끊임없이 실행하는 추론 연산이 급증하고 데이터센터 운영비에서 전력 효율과 비용 경쟁력이 차지하는 비중도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는 AI 데이터센터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로 육성하면서 국산 AI 반도체(NPU)와 전력·냉각 솔루션을 함께 지원해 국내 AI 인프라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단순히 데이터센터 건물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센터 안에서 돌아가는 핵심 기술까지 국산화하겠다는 의미다. 이재명 대통령의 구상대로라면 이번 프로젝트의 성패는 데이터센터 규모보다도 AI 연산 담당자에게 달려있다. 현재 글로벌 AI 데이터센터는 엔비디아 GPU가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AI 학습에 필요한 압도적인 연산 성능은 물론 CUDA 기반 소프트웨어 생태계와 개발자 환경, 풍부한 고객 레퍼런스까지 갖추면서 후발주자가 쉽게 넘볼 수 없는 시장을 구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정부가 아무리 AI 데이터센터를 확대하더라도 핵심 반도체를 모두 해외 기업에 의존한다면 국가 AI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AI 데이터센터는 국가 전략 인프라지만 연산을 담당하는 AI 칩과 서버, 시스템 소프트웨어가 해외 기술에 의존하게 되면 공급망 리스크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AI 경쟁의 무게중심 '학습'에서 '추론'으로 정부의 AI 인프라 전략에서 가장 먼저 시험대에 오른 기업은 퓨리오사AI다. 2017년 설립된 퓨리오사AI는 AI 추론 전용 NPU를 개발하는 국내 대표 팹리스 기업이다. 회사는 범용 GPU와 정면 승부 하기보다 생성형 AI 서비스 운영에 필요한 추론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최근 공개한 2세대 AI 가속기 RNGD(레니게이드)는 거대언어모델과 멀티모달 AI 추론을 겨냥한 제품으로 높은 전력 효율과 비용 절감 효과를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회사 역시 고성능과 전력 효율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이터센터용 AI 가속기를 핵심 경쟁력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정책만으로 퓨리오사AI의 성공을 장담하기는 어렵다. AI 반도체 시장은 단순히 칩 성능만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발도구와 소프트웨어 호환성, 고객사가 기존 시스템에 쉽게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 대규모 데이터센터에서 검증된 운영 경험까지 종합적인 생태계 경쟁이 이뤄지는 시장이다. 결국 메가 프로젝트가 국내 AI 반도체 산업의 전환점이 되려면 정책 지원뿐 아니라 실제 데이터센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용 레퍼런스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성형 AI 초기 시장에서는 수천억 개의 매개변수를 가진 거대언어모델을 학습시키기 위해 막대한 연산 성능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빅테크들은 엔비디아의 GPU를 대거 확보하는 데 경쟁적으로 나섰고 GPU 확보 능력이 곧 AI 경쟁력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AI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되면서 시장의 관심은 모델 제작에서 활용으로 옮겨가고 있다. 챗봇이 질문에 답하고 AI 비서가 업무를 수행하며 자율주행차와 스마트팩토리, AI 로봇이 실시간으로 판단을 내리는 과정은 모두 추론에 해당한다. AI를 실제 서비스로 운영할수록 추론 연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시장조사업체들도 같은 전망을 내놓고 있다. AI 서비스 확산으로 향후 데이터센터 연산의 상당 부분이 추론 작업으로 차지할 것이 예상되면서 학습 중심이던 AI 반도체 시장도 점차 추론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생성형 AI 서비스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추론 수요와 토큰 사용량은 이미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며 "AI 확산이 빨라질수록 연산 효율을 높이는 기술 경쟁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의 AI 데이터센터 구축은 국내 AI 반도체 기업들에도 기술을 검증하고 시장을 확대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력 효율이 새 경쟁력…퓨리오사AI의 승부수 퓨리오사AI는 엔비디아 GPU를 전면적으로 대체하겠다는 전략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추론에 필요한 연산을 보다 적은 전력으로 처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데이터센터 운영비 가운데 전기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만큼 같은 성능이라면 전력 소비를 줄이는 것이 곧 경쟁력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AI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공장'으로 불릴 만크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최신 AI 서버 한 대에는 여러 개의 AI 가속기가 탑재되고 이를 수만 대 규모로 운영하면 전력 사용량은 도시 하나에 맞먹는 수준까지 늘어난다. 정부가 이번 메가 프로젝트에서 AI 데이터센터와 함께 전력 인프라를 핵심 과제로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향후 AI 반도체 경쟁의 기준이 '최고 성능'에서 '최고 효율'로 점차 이동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모든 AI 서비스를 최고 사양 GPU로 운영하기보다 서비스 특성에 따라 GPU와 NPU를 함께 사용하는 방식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넘어야 할 벽은 여전히 높다. 엔비디아의 경쟁력은 단순히 GPU 성능에 있지 않다. AI 개발자가 사용하는 CUDA 플랫폼을 중심으로 방대한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구축했고 주요 클라우드 사업자와 데이터센터 운영사들이 이미 엔비디아 기반 시스템을 표준처럼 사용하고 있다. AI 모델 대부분도 엔비디아 환경에서 최적화돼 있어 다른 AI 반도체를 적용하려면 소프트웨어 수정과 운영 검증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정부의 메가 프로젝트 역시 단순한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투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AI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만으로는 국내 AI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기 어렵고 국산 AI 칩이 실제 데이터센터에서 성능을 검증받고 상용화 레퍼런스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까지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퓨리오사AI는 최근 들어 연구개발(R&D) 단계를 넘어 상용화 기반을 하나씩 확보하고 있다. 회사는 올해 1월 TSMC에서 생산한 2세대 AI 추론용 NPU 'RNGD(레니게이드)' 1차 양산 물량을 공급받으며 본격적인 양산 단계에 들어갔다. 올해 총 2만장 규모 생산을 목표로 글로벌 엔터프라이즈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술 검증 사례도 늘고 있다. LG AI연구원은 자사 거대언어모델(LLM) '엑사원(EXAONE)' 추론 환경에서 RNGD를 검증한 뒤 도입을 결정했다. 퓨리오사AI에 따르면 RNGD는 실제 서비스 환경에서 기존 GPU 기반 시스템보다 와트당 성능을 2.25배 높였고, 동일한 전력 조건에서는 최대 3.75배 많은 토큰을 처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AI 데이터센터 운영에서 가장 큰 비용으로 꼽히는 전력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메가 프로젝트, 국산 AI 반도체 생태계 키울까 이처럼 기술력과 상용화 가능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정부가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 메가 프로젝트가 퓨리오사AI와 같은 국산 AI 반도체 기업의 성장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업계는 이번 메가 프로젝트가 국내 AI 반도체 산업에는 이전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한다. 정부가 AI 데이터센터를 국가 전략 인프라로 규정하면서 처음으로 AI 모델부터 반도체,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까지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연결하는 청사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가 AI 데이터센터 구축과 함께 국산 AI 반도체 기반 추론 시장 육성을 공식 정책 방향으로 제시한 만큼, 향후 국가 AI 프로젝트와 공공 AI 사업에서 국산 NPU 적용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퓨리오사AI뿐 아니라 국내 AI 서버, 클라우드, 전력·냉각 장비 기업으로까지 파급 효과가 확산될 수 있다는 의미다. AI 데이터센터가 또 하나의 '엔비디아 GPU 구매 사업'으로 끝날지 아니면 국산 AI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서버, 전력 설비까지 함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의 출발점이 될지는 앞으로 정부 정책과 민간 투자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 퓨리오사AI 역시 같은 시험대에 올랐다. 추론 특화 AI 반도체라는 기술 경쟁력을 실제 시장 경쟁력으로 연결하고 정부 프로젝트를 발판으로 대규모 상용 레퍼런스를 확보할 수 있다면 '국산 AI칩'은 상징을 넘어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반대로 정책 지원에만 의존한 채 민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이번 메가 프로젝트 역시 국산 AI 반도체 육성의 또 다른 선언에 그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AI 시대의 승자는 더 이상 반도체를 가장 많이 만드는 기업만이 아니다. AI를 가장 효율적으로 구동하는 반도체를 만들고 이를 국가 인프라 안에서 실제 활용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국가가 다음 경쟁의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점에서 퓨리오사AI를 비롯한 국내 AI 반도체 기업들의 도전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AI 데이터센터와 국산 AI 반도체를 함께 육성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은 국내 AI 반도체 기업에는 의미 있는 기회"라며 "특히 AI 데이터센터 구축은 기술력을 검증하고 실제 공급 레퍼런스를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AI 인프라가 빠르게 확산돼야 AI 서비스와 산업 혁신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 구축과 AI 인프라 확대 정책이 국내 AI 반도체 생태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2026-07-03 10: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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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동물 몸짓 읽는 AI 개발…신약·정신질환 연구 속도 낸다
[경제일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진이 동물의 움직임을 언어처럼 학습하고 행동의 의미를 해석하는 인공지능(AI)을 개발했다. 생쥐 행동을 정밀하게 읽어 신약 후보물질 평가와 자폐, 우울증, 조현병 등 정신질환 연구에 활용될 수 있는 기술이다. KAIST는 뇌인지과학과 김대수 교수 연구팀이 동물의 움직임을 언어처럼 분석하는 AI 플랫폼 ‘비헤이버트(BehaVERT)’를 개발했다고 1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컴퓨터비전 분야 국제학술지 ‘International Journal of Computer Vision(IJCV)’에 게재됐다. 비헤이버트는 생쥐의 코, 귀, 척추, 사지, 꼬리 등 골격 움직임을 자연어의 단어에 해당하는 ‘토큰’으로 변환해 학습한다. 이후 자연어 처리에 활용되는 BERT 기반 트랜스포머 모델을 적용해 시간 흐름에 따른 행동 패턴과 의미를 파악한다. 기존 AI 행동 분석은 특정 행동을 분류하는 데 머문 경우가 많았다. 비헤이버트는 행동의 순서와 맥락까지 함께 본다. 같은 움직임이라도 어떤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연구팀은 비헤이버트를 사회적 상호작용, 다개체 행동, 3차원 움직임 분석, 자폐 행동 분석 등 국제 표준 벤치마크 5종에 적용했다. 그 결과 모든 평가에서 기존 최고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설명했다. 해석 가능성도 강점이다. 비헤이버트는 어떤 행동에 주목해 판단했는지 연구자에게 보여준다. 실험에서 AI는 자폐 모델 생쥐와 정상 생쥐를 구분할 때 ‘입과 입을 맞대는 접촉’에 집중했다. 이는 자폐 모델 생쥐가 접근 행동은 보이지만 실제 사회적 상호작용에는 결함을 보인다는 기존 연구와 일치한다. AI 내부에서는 움직임, 주의, 사회성 등 행동 특성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를 동물 행동에도 언어와 유사한 의미 구조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보고 있다. 이번 연구는 생명과학 전공 연구자들이 직접 AI를 익혀 모델과 학습 전략을 설계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연구팀은 웹 기반 골격·행동 라벨링 도구와 표준화 데이터셋, 모델 코드도 공개해 다른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활용 가능성은 넓다. 신약 개발에서는 후보물질 투여 뒤 나타나는 미세한 행동 변화를 정량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정신질환 연구에서는 자폐, 우울증, 조현병 동물모델의 행동 특징을 더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다. 행동유전학과 생태학 분야에서도 개체 간 상호작용과 환경 반응을 분석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신승재 박사는 “사람이 정답을 알려주지 않아도 AI가 행동 데이터만으로 스스로 학습해 핵심 행동 특징을 찾아낼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김대수 교수는 “비헤이버트는 행동을 분류하는 수준을 넘어 행동의 의미까지 이해하는 새로운 AI 모델”이라며 “다양한 생명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을 이끄는 연구 도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동물 행동 분석은 신약과 뇌질환 연구의 중요한 관문이다. 연구자가 눈으로 관찰하고 분류하는 방식만으로는 미세한 차이와 시간적 맥락을 놓치기 쉽다. 비헤이버트의 의미는 AI가 연구자를 대신한다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보지 못한 행동의 구조를 찾아내고 과학자가 다시 검증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2026-07-01 16: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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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콘텐츠·AI·미래차에 돈 몰린다
[경제일보] 중국이 디지털 콘텐츠와 인공지능(AI), 스마트 모빌리티를 묶어 신성장 산업을 키우고 있다. 라이브 방송과 숏폼 콘텐츠 시장은 2200억위안을 넘어섰고, 지방정부는 AI 에이전트 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업계는 전동화와 첨단 운전자 보조 기능을 앞세워 소비자 취향 변화에 맞춘 신차를 내놓고 있다. 중국 경제가 부동산과 전통 제조업만으로 성장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콘텐츠 소비와 AI 서비스, 전기차 산업이 새로운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다. ◆ 라이브·숏폼, AI 만나 산업으로 커졌다 중국인터넷공연(라이브·숏폼)산업발전보고서(2025~2026)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온라인 공연 산업 매출은 2213억6000만위안으로 전년보다 4.1% 증가했다. 라이브 방송과 숏폼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직접 만들고 소비하는 이용자가 늘면서 시장 규모도 커졌다. 이 시장의 변화는 단순히 방송을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데 있지 않다. 콘텐츠 제작부터 광고·판매, 팬 관리, 플랫폼 운영까지 하나의 산업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개인 진행자와 중소 제작사도 짧은 영상과 라이브 방송을 통해 소비자와 직접 만날 수 있다. 전통적인 방송·광고 시장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고, 판매와 홍보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점도 시장 확대의 배경이다. 생성형 AI는 이 과정에 더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영상 기획안을 만들고, 자막과 번역을 붙이며, 짧은 영상을 편집하고, 이용자 반응을 분석하는 데 AI가 활용된다. 가상 진행자와 자동 응답, 개인별 콘텐츠 추천도 늘고 있다. 콘텐츠 제작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플랫폼 입장에서는 이용자를 더 오래 붙잡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다만 AI가 콘텐츠 산업의 성장만 돕는 것은 아니다. 저작권 침해와 허위 광고, 가짜 영상, 플랫폼 의존 문제도 함께 커질 수 있다. 콘텐츠 공급이 늘어날수록 무엇이 사람이 만든 창작물이고, 무엇이 자동 생성된 영상인지 구분하는 기준도 중요해진다. ◆ 우한 광구, AI 에이전트에 3년간 10억위안 중국 지방정부도 AI 산업을 직접 키우는 데 나서고 있다. 우한 동호신기술개발구, 이른바 광구는 최근 ‘광구 AI 에이전트 유치 계획’을 발표했다. 앞으로 3년 동안 정책 지원과 컴퓨팅 자원, 펀드, 인재 육성에 10억위안 이상을 투입할 계획이다. 목표도 구체적이다. AI 에이전트 혁신기업 100개를 키우고, 관련 제품 1000개를 내놓으며, 개발자 1만명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올해 안에 가용 연산능력을 1만P 이상으로 늘리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P는 AI 학습과 추론에 쓰이는 연산능력 단위인 페타플롭스(PFLOPS)를 뜻한다. AI 에이전트는 질문에 답하는 챗봇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개념이다. 사용자의 지시를 받아 정보를 찾고, 문서를 정리하고, 예약과 주문, 일정 관리 같은 작업을 스스로 처리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고객 상담과 사내 문서 관리, 공장 운영, 판매 분석에 붙일 수 있다. 광구는 광통신과 반도체, 대학·연구기관이 밀집한 지역이다. AI 산업을 이곳의 기존 제조업과 연결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올해 1~5월 광구 AI 산업 규모는 400억위안을 넘어섰고,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5% 증가했다. 광구는 연내 AI 산업 규모가 1000억위안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자동차는 전동화 넘어 ‘생활형 고급차’ 경쟁 자동차 산업에서는 스마트 전동화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 지리자동차 계열 브랜드 링크앤코(Lynk & Co)는 최근 스포츠 왜건 ‘07GT’를 세계 최초로 공개하고 사전 판매에 들어갔다. 링크앤코 07GT는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용한 모델이다. 28.3킬로와트시(kWh) 배터리를 탑재했고, 중국 CLTC 기준 총주행거리는 1422㎞다. 장거리 이동과 주말 레저 수요를 겨냥해 적재공간을 키우고, 전자제어 서스펜션과 고급 운전자 보조 기능을 넣었다. 중국 자동차 시장은 이제 전기차를 얼마나 싸게 만드느냐만으로 승부하기 어려워졌다. 전기차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가 빠르게 늘면서 브랜드별 차별화가 필요해졌다. 링크앤코가 왜건을 앞세운 것도 세단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중심 시장에서 다른 소비층을 찾기 위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자동차 업체들은 주행거리와 충전 속도뿐 아니라 운전자 보조 시스템, 차량용 소프트웨어, 승차감, 적재공간까지 경쟁 요소로 삼고 있다. 전동화가 자동차 시장의 기본 조건이 되자, 이제는 차량을 어떻게 쓰고 즐길 것인지가 상품성을 가르는 요소가 되고 있다. ◆ 소비형 콘텐츠에서 산업형 AI로 세 분야는 겉으로 보면 서로 거리가 있어 보인다. 라이브·숏폼은 소비시장이고, AI 에이전트는 기업용 기술이며, 스마트 모빌리티는 제조업에 가깝다. 그러나 중국의 최근 투자 흐름은 이들을 따로 두지 않는다. 콘텐츠 산업은 AI를 활용해 제작과 유통 비용을 낮추고, AI 에이전트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업무 방식을 바꾸려 한다. 자동차는 배터리와 반도체, 소프트웨어, 통신기술을 한데 묶은 이동형 디지털 기기가 되고 있다. 중국이 노리는 것은 새로운 산업을 각각 키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거대한 소비시장과 제조업 기반, 지방정부의 투자 여력을 결합해 콘텐츠·AI·자동차가 서로 수요를 만들게 하는 방식이다. 물론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콘텐츠 산업은 과잉 공급과 규제 문제를 풀어야 하고, AI 에이전트는 실제 기업 현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서비스로 자리 잡아야 한다. 자동차 기업은 치열한 가격 경쟁 속에서 수익성을 확보해야 한다. 중국 경제가 어디에 투자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소비자가 시간을 쓰는 콘텐츠 시장, 기업이 비용을 줄이려는 AI 서비스, 이동 방식이 바뀌는 자동차 산업에 자금과 정책이 몰리고 있다. 이 분야들이 실제 고용과 수익, 수출로 이어질 수 있느냐가 중국의 다음 성장 단계를 가를 전망이다.
2026-06-30 17: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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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메가프로젝트, 800조보다 중요한 것은 반도체와 AI 연결
[경제일보] 800조원, 550조원, 1000조원. 이재명 대통령이 공개한 '3대 메가프로젝트'는 숫자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삼성전자와 SK그룹의 대규모 투자 계획까지 더해지면서 발표 직후 관심은 자연스럽게 투자 규모와 지역별 배치에 쏠렸다. 정치권에서는 호남 투자 비중을 둘러싼 공방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 발표를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보면 숫자보다 먼저 읽혀야 할 메시지가 있다. 정부가 발표한 것은 '3대 메가프로젝트'였지만 산업계가 받아들여야 할 키워드는 따로 있다. 바로 'AI 공급망'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반도체 팹 확충, AI데이터센터(AIDC) 구축, 피지컬AI 육성이라는 세 개의 사업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이를 각각의 투자 계획으로만 바라보면 이번 발표의 의미를 절반밖에 읽지 못한다.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개별 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 생산부터 AI 서비스 구현, 제조업 적용까지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하는 데 있다. 정부가 제시한 '3대 메가프로젝트'는 세 개의 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 AI 경쟁력을 떠받칠 산업 구조를 새롭게 설계하는 청사진에 가깝다. 반도체는 AI의 연산 능력을 결정하는 핵심 부품이다. 이렇게 생산된 반도체는 AI데이터센터에서 막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활용되고 데이터센터에서 학습한 AI는 다시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자율 제조 등 피지컬AI 산업으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피지컬AI는 각각의 산업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사슬 안에서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구조다. 어느 한 축이 흔들리면 나머지 산업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 점은 글로벌 AI 경쟁 구도와도 맞닿아 있다. 미국이 생성형 AI 플랫폼과 거대언어모델(LLM) 경쟁을 주도하고 있다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경쟁력을 기반으로 AI 공급망을 구축하는 전략을 선택한 셈이다. 반도체 생산 역량과 제조업 기반을 AI 시대의 경쟁력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는 단순한 투자 계획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가 발표될 때마다 투자 금액에만 관심이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발표의 의미는 투자 규모에만 있지 않다. 반도체와 AI데이터센터, 피지컬AI를 하나의 산업 전략으로 묶어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물론 AI 공급망은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는 대규모 전력과 초순수 등 안정적인 용수 공급이 필수고 AI데이터센터 역시 막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송전망과 전력 인프라가 갖춰져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여기에 AI와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 지역 정주 여건 개선, 인허가 절차의 신속한 추진까지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비로소 정부가 그리는 청사진도 현실이 된다. 결국 이번 프로젝트는 개별 기업의 투자만으로 완성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정부 정책, 지방자치단체의 인프라 조성, 기업의 투자 및 인재 확보가 동시에 맞물릴 때 완성형 AI 산업 생태계가 작동할 수 있다. 결국 이번 3대 메가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를 것은 투자 규모가 아니다. AI 공급망을 적기에 구축하고 산업 전반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량이 성패를 좌우한다. 이번 발표가 대한민국 AI 산업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기록될지, 또 하나의 대형 투자 계획에 머물지는 결국 추진 속도와 완성도에 달려 있다.
2026-06-30 16: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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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 가전명가서 '공간' 공급자로
[경제일보] LG전자가 냉장고와 세탁기를 팔던 회사를 넘어 집 자체를 설계하고 공급하는 기업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모듈러 주택 신제품 출시는 단순한 주거 상품 추가가 아니라, 가전회사의 사업 경계가 생활공간 전체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LG전자는 29일 모듈러 주택 ‘LG 스마트코티지’ 20평대 단층형 신제품 ‘모노 코어 72’와 ‘모노 코어 82’ 2종을 출시했다. 면적은 각각 72.9㎡, 82.1㎡로 약 22평·24평 규모다. 두 모델 모두 방 2개와 거실, 주방, 욕실로 구성된다. 이번 제품의 의미는 단순히 평수를 키운 데 있지 않다. LG전자는 스마트코티지 라인업을 8평부터 24평까지 총 8종으로 넓혔다. 특히 20평대 모델은 세컨드하우스 수요뿐 아니라 기업 연수원, 레저시설, 숙박시설 등 상업용 수요까지 겨냥했다. 가전제품을 소비자에게 한 대씩 파는 방식에서 벗어나, 주거·휴식·업무 공간 전체를 패키지로 제안하는 구조다. LG전자는 “스마트코티지는 주요 자재의 70% 이상을 공장에서 사전 제작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는 프리패브 방식”이라며 “기존 철근콘크리트 공법보다 공사 기간을 최대 50% 이상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내부에는 AI 홈 허브 ‘씽큐 온’, 스마트 도어록, 스마트 스위치, 시스템에어컨, 콘덴싱 보일러 등이 기본 적용된다. AI 가전, 환기 솔루션, 태양광 패널 등은 옵션으로 추가할 수 있다. LG전자가 실제로 팔려는 것은 가전·공조·IoT·에너지 관리가 결합된 생활 인프라다. 이와 같은 흐름은 LG전자의 최근 사업구조 변화와 맞닿아 있다. LG전자는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매출 23조7272억원, 영업이익 1조6737억원을 기록하며 역대 1분기 기준 최대 매출을 냈다. 전통 가전 수요가 성숙기에 들어선 상황에서 LG전자가 전장, 냉난방공조, 구독, B2B 사업을 키우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에 가깝다. 스마트코티지는 그 전략의 축소판이다. LG전자는 가전에서 출발했지만, 이미 공조와 에너지 관리, 차량용 전장, 플랫폼 서비스로 수익원을 넓히고 있다. 스마트코티지는 이 가운데 소비자가 가장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상품이다. 냉장고와 에어컨을 따로 파는 것이 아니라, 냉난방이 되고 가전이 연결되고 에너지 효율을 관리하는 ‘완성된 공간’을 파는 방식이다. 결국 스마트코티지는 LG전자가 ‘가전회사’라는 오래된 이름표를 떼어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사업이다. 제품 한 대의 성능 경쟁을 넘어 공간 전체의 경험을 설계하는 기업으로 갈 수 있느냐의 문제다. 업계 관계자는 “LG전자는 가전 브랜드 신뢰도, 공조 기술, 사후관리망 등을 확보하며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며 “기업 고객 입장에서 연수원이나 숙박시설을 지을 때 설계·시공·가전·관리 서비스를 따로 조달하는 것보다 통합 솔루션을 선호할 여지가 있다”고 했다. [아주경제 2026년 06월 30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6-30 09: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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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악 선관위, 홍명보호보다 더 위험한 실패
[경제일보] 홍명보 감독은 월드컵 32강 진출이 좌절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표팀은 결과로 평가받는 조직이고, 감독은 그 결과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한국 축구는 또 한 번의 실패를 기록으로 남겼다. 아프지만 대표팀에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전술과 선수 구성을 다시 손 볼 시간이 남아 있다. 노태악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선관위 역시 결과로 평가받아야 하는 조직이다. 다만 선관위가 책임져야 할 결과는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국민이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제대로 보장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물러났다. 그러나 사퇴가 남기는 무게까지 같을 수는 없다. 축구대표팀의 실패는 국민에게 실망을 남기지만, 다음 대회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다. 반면 투표용지가 없어 발길을 돌렸거나 언제 투표할 수 있을지 모른 채 투표소 앞에서 기다려야 했던 유권자에게는 다음 경기가 없다. 그 한 표는 선거 당일, 그 투표소에서 보장됐어야 했다. 이번 사태는 몇몇 투표소의 우발적 혼선으로 정리할 수 없다.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전국 1만4288개 투표소 가운데 140곳이 부족 가능성 때문에 추가 투표용지를 받았다. 이 가운데 실제 추가 용지를 사용한 곳은 91곳이었고, 26곳에서는 투표가 잠시라도 중단됐다. 선관위가 처음 파악한 범위를 넘어 피해 실태가 계속 드러난 것도 국민 불안을 키웠다. 사태의 시간표는 더욱 답답하다. 송파구선관위는 선거 당일 오전 11시 40~50분께 이미 무번호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을 예상해 서울시선관위에 일련번호 부여 방안을 문의했다. 그러나 서울시선관위와 중앙선관위가 함께 대응에 나선 것은 약 5시간 뒤였다. 오후 4시 46분이 되어서야 송파구선관위가 일련번호를 기재하지 않은 투표용지를 투표소에 내보내겠다고 알렸고, 중앙선관위는 오후 5시가 넘어 민원을 계기로 서울시선관위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했다. 선거를 총괄하는 기관이 현장의 경고를 제때 받아내지 못하고, 민원과 혼란이 번진 뒤에야 대응에 나섰다면 이는 단순한 전달 실수의 문제가 아니다. 투표소별 투표율과 남은 용지를 누가 점검했는지, 어느 단계에서 위험 신호가 끊겼는지, 중앙 상황실은 왜 먼저 움직이지 못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말은 중앙의 책임을 덜어주는 근거가 아니라, 보고와 지휘 체계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를 묻게 하는 출발점이다. 진상규명위원회도 결론을 흐리지 않았다. 상급위원회에 대한 신속한 보고 체계가 작동하지 않았고, 상급위원회의 지휘권도 발동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서울시선관위는 중앙선관위와 논의하지 않은 채 투표시간 연장을 결정했고, 송파구선관위에서는 투표가 끝나기 전 개표가 시작되는 일도 있었다. 전국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 선거일 하루 동안 같은 지휘선 아래 움직이지 못한 셈이다. 투표용지 인쇄 하한을 유권자 수의 60%에서 50%로 낮춘 결정도 비켜갈 수 없다. 해당 지침은 사무총장 전결로 처리됐다. 노태악 전 위원장은 국정조사에서 이를 알고 있었다고 답했고, 사전 보고에 대해서는 짧은 보고가 있었을 수 있으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인쇄 비율은 서류철 안의 작은 행정 항목이 아니다. 본투표일에 유권자가 몰릴 경우를 대비하는 최소 안전장치다. 보관 공간과 관리 비용을 고려할 수는 있어도, 그 판단이 투표소의 용지 부족으로 이어졌다면 선관위는 그 우선순위를 설명해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선거관리의 기준과 지휘 체계를 책임지는 자리다. 투표용지 인쇄 기준이 낮아졌다면 그 위험을 점검했어야 하고, 선거일 현장에서 부족 징후가 나타났다면 보고와 대응이 지체되지 않도록 조직을 움직였어야 한다. 최고 책임자의 역할은 현장의 숫자를 대신 세는 데 있지 않다. 현장이 흔들릴 때 조직 전체가 즉시 움직이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노태악 개인의 사퇴로만 마무리될 일이 아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노태악 전 위원장을 비롯한 선관위 수뇌부 12명에 대한 수사의뢰를 권고했고, 관련 실무자 6명에 대한 징계도 권고했다. 이는 유죄 판단이 아니다. 다만 이번 사태를 일선 직원 몇 명의 과실로 돌려 봉합할 수 없다는 뜻은 분명하다. 홍명보 감독의 사퇴는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의 표현이었다. 노태악 전 위원장의 사퇴는 참정권 보장에 실패한 국가기관 수장의 책임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 뒤에 따라야 할 절차도 달라야 한다. 누가 인쇄 기준을 낮췄는지, 현장의 경고가 어디에서 멈췄는지, 중앙은 왜 위험을 먼저 감지하지 못했는지, 그 판단과 지연에 책임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선관위의 독립성은 외부 권력이 선거 관리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독립기관이라는 지위가 내부 실패에 대한 설명 의무까지 덜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일수록 더 높은 수준의 준비와 책임이 요구된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개혁 구호가 아니다. 투표소에 가면 투표용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사고가 나면 국가기관이 즉시 수습할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이다. 홍명보호의 탈락은 한국 축구에 숙제를 남겼다. 노태악 선관위의 실패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다시 묻게 한다. 축구는 다음 대회를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는 다르다. 그날 투표소에서 행사되지 못한 한 표는 다음 선거가 아니라, 바로 그날 국가가 지켜냈어야 할 권리였다.
2026-06-30 07: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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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물류는 제조업이 끌고, 유럽 폭염은 냉방가전을 불렀다
[경제일보] 중국 물류시장이 제조업과 수출을 바탕으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고급 제조업과 자동차, 전자부품 관련 물류가 늘어난 데다 유럽의 이른 폭염까지 겹치면서 냉방가전 주문도 증가하고 있다. 대형 설비와 자동차를 실어 나르는 산업 물류, 작은 생활가전을 해외 소비자에게 곧장 보내는 전자상거래 물류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다. ◆ 고급 제조업이 물류 수요 이끌어 29일 중국물류구매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1~5월 중국 사회물류 총액은 146조6000억위안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2% 증가했다. 사회물류 총액은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이동한 상품의 가치 규모를 뜻한다. 중국 경제에서 실제 물동량이 어느 분야에서 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산업재 물류는 5.4% 증가했다. 전자부품 제조와 특수장비, 자동차 수출이 물류 수요를 끌어올렸다. 반면 광업과 비금속 광물 제품처럼 전통 산업에 가까운 분야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중국 제조업 안에서도 물류 수요의 중심이 고부가가치 제품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재생자원 물류도 5.4% 늘었다. 폐금속과 폐가전, 재활용 원료가 산업 현장으로 다시 들어가는 흐름이 커지고 있다. 중국이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산업을 키우면서 원료 확보와 재활용 체계도 함께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을 한 번 쓰고 버리는 방식으로는 배터리와 신에너지 산업의 원가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 유럽 폭염이 만든 냉방가전 주문 유럽의 고온 현상은 중국 제조업에 예상 밖의 수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독일과 체코 등 일부 국가에서는 고온 기록이 새로 쓰였고, 중부·동유럽 여러 나라가 폭염 경보를 내렸다. 냉방기기가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지 않은 지역까지 에어컨과 선풍기, 이동식 냉방기기, 제빙기 수요가 번지고 있다. 중국 제조업체들은 이 수요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저장성 이우 국제상무시장에서는 선풍기와 분사 기능을 결합한 양산, 휴대용 냉방용품, 야외용 제빙기 등이 해외 구매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닝보의 한 제빙기 수출기업은 올해 1~5월 유럽으로 나간 제품 출고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0% 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이우의 크로스보더 전자상거래 거래액은 같은 기간 811억7500만위안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23% 증가한 수치다. 전통적인 수출은 해외 바이어가 대량 주문하고, 선적과 통관을 거쳐 현지 유통망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지금은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 수요가 곧바로 제조업체와 판매자에게 전달된다. 폭염처럼 시기를 놓치면 수요가 사라지는 상품일수록 이런 속도가 중요하다. ◆ ‘싸게 만드는 힘’에서 ‘빨리 보내는 힘’으로 중국산 냉방가전의 경쟁력은 낮은 가격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우의 소상품 공급망, 저장성과 광둥성의 가전 생산기지, 항공·해운 물류망,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한데 연결돼 있다. 주문이 몰리면 생산라인을 돌리고, 포장과 통관, 해외 배송까지 이어지는 시간이 짧다. 유럽 폭염은 계절적 변수다. 날씨가 정상화되면 냉방가전 주문도 줄어들 수 있다. 다만 기후 변화로 극단적 고온 현상이 잦아질수록 냉방기기는 일부 유럽 국가에서 더 이상 선택 소비재로만 보기 어려워질 수 있다. 중국 기업에는 단기 특수일 수 있지만, 동시에 시장을 넓힐 계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수요가 늘었다고 수출 환경이 마냥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은 에너지 효율 기준과 안전 규제, 환경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 제조업체가 단순히 저렴한 제품을 빨리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에너지 효율과 품질, 애프터서비스까지 갖춰야 장기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 물류가 보여주는 중국 경제의 변화 최근 물류 지표는 중국 경제의 온도차를 보여준다. 전통 산업 물류는 힘이 약하지만, 전자부품과 장비, 자동차 수출, 재활용 자원, 크로스보더 전자상거래는 늘고 있다. 중국 경제가 부동산과 철강, 시멘트 같은 기존 산업에만 기대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제조업 고도화와 수출, 디지털 유통망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셈이다. 유럽 폭염에 따른 냉방가전 수출 증가는 그 흐름을 압축해 보여준다. 해외의 갑작스러운 수요 변화가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거쳐 이우와 닝보의 생산·물류망으로 전달되고, 중국 공장과 항만이 곧바로 움직인다. 중국 제조업의 힘은 생산 규모에만 있지 않다. 수요를 감지하고 제품을 만들고 해외 소비자에게 보내는 과정이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는 데 있다. 다만 이런 수출 증가가 중국 경제 전체의 회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냉방가전 주문은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제조업 수출이 늘어도 부동산 침체와 내수 부진, 지방정부 재정 부담까지 한꺼번에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물류는 중국 경제가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먼저 보여주는 지표다. 고급 제조업과 자동차, 전자부품은 물류 수요를 만들고, 크로스보더 전자상거래는 해외 소비자와 중국 공장을 직접 연결한다. 유럽의 폭염은 그 연결망이 얼마나 빠르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 한 장면이다.
2026-06-29 16: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