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74건
-
평균으로 수렴하는 세계
우리는 정보의 과잉 시대를 산다. 손안의 스마트폰만 열면 뉴스와 영상, 음악과 지식이 끝없이 쏟아진다. 유튜브와 틱톡은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추천하고, 생성형 인공지능은 질문 하나에 그럴듯한 답변을 즉시 내놓는다. 겉으로 보면 인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정보 환경을 손에 넣은 듯하다. 그러나 이 편리함의 이면에는 되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는 정말 더 넓은 세계를 만나고 있는가. 추천 알고리즘은 본래 사용자 편의를 높이기 위해 설계됐다. 이용자가 선호하는 콘텐츠를 빠르게 제시하고, 불필요한 탐색의 시간을 줄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실제 작동 방식은 다르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오래 본 영상, 멈춘 장면, 반복 시청한 주제를 바탕으로 취향을 추정하고, 그 취향을 다시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문제는 아직 접하지 못한 관심사, 아직 좋아해본 적 없는 분야, 아직 열어보지 않은 가능성이 점점 배제된다는 점이다. 낯선 것과의 우연한 조우는 줄어들고, 익숙한 것의 반복만 남는다. "우연한 발견과 낯선 충격은 비효율로 취급되고, 대신 익숙함과 반복이 화면을 채운다." 생성형 인공지능도 이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AI는 방대한 언어 데이터를 학습해 가장 개연성 높은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답변은 대체로 매끄럽고 안정적이며 평균적이다. 물론 이것은 장점이기도 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평균 바깥의 문장, 비정형의 통찰, 낯설지만 강한 사유는 밀려난다. 원래 새로운 생각은 다수가 이미 동의한 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대를 흔드는 관점은 대개 평균의 바깥, 익숙함의 바깥에서 출현한다. 결국 오늘의 기술은 두 방향에서 같은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인간의 취향을 평균으로 묶고, 생성형 AI는 인간의 언어를 평균으로 다듬는다. 취향은 예측 가능한 패턴이 되고, 문장은 무난한 결론으로 수렴한다. 안전하고 효율적이라는 점에서 기업과 플랫폼에는 이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성장과 창조성까지 그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래 효율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 무심코 넘기다 멈춘 기사 한 줄, 전혀 관심 없던 분야에서 느닷없이 마주한 충격이 한 사람의 세계를 바꾸기도 한다. 발견은 언제나 비효율의 영역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오늘의 플랫폼은 그 비효율을 제거하는 데 능숙하다. 사용자가 헤매지 않도록 돕는 대신, 사용자가 스스로의 바깥으로 나갈 기회까지 줄여버린다. 문제는 단지 비슷한 콘텐츠만 보게 된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이 점점 과거의 데이터로 규정되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점이다. 플랫폼은 “당신은 이런 것을 좋아할 사람”이라고 말하고, AI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고 답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빠르게 만족하지만, 덜 놀라고 덜 방황하며 덜 발견하게 된다. 세상을 좁게 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새롭게 갱신할 가능성마저 줄어드는 것이다. 기술은 인간을 확장할 때 진보가 된다. 그러나 편의를 높이는 과정에서 가능성까지 축소한다면, 그것은 진보라기보다 정교한 관리에 가깝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확한 추천만이 아니다. 평균 밖의 문장, 예측 밖의 만남, 그리고 나를 내가 아는 범위 밖으로 이끄는 우연의 복원이다. 인간은 원래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 아직 열려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26-04-11 19:54:46
-
사드 갈등 속 지연된 한중 FTA, 균형 속 매듭 지어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후속 협상이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서비스·투자·금융을 중심으로 한 제14차 협상에서 “긍정적 진전”이 있었다는 양측의 평가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지연된 경제 협력의 복원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로 읽힌다. 한중 FTA는 2015년 체결 이후 양국 교역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지만, 2016년 사드(THAAD) 배치 이후 정치·안보 갈등이 경제 협력에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그 잠재력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그 지체된 시간을 넘어, 보다 성숙한 상호균형의 틀 속에서 협정을 완결해야 할 시점이다. 한중 FTA의 본질은 단순한 관세 인하에 있지 않다. 그것은 동아시아 경제 질서를 재편하는 하나의 축이며, 한국과 중국이라는 두 경제 대국이 협력과 경쟁을 동시에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다. 특히 이번 후속 협상에서 논의되는 서비스 무역과 투자,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은 과거 제조업 중심의 협정을 넘어 미래 산업과 금융, 디지털 경제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양국 경제가 이미 깊이 얽혀 있는 현실을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중 경제 협력은 언제나 정치의 영향을 받아왔다. 사드 사태는 그 대표적 사례다. 경제는 상호의존을 향해 나아가지만, 안보는 때로 갈등을 불러온다. 이 괴리를 관리하지 못할 때 협력은 쉽게 흔들린다. 따라서 이번 협상은 단순한 통상 문제를 넘어, 경제와 안보의 균형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협정의 완성은 곧 신뢰의 회복이며, 신뢰 없는 협정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방과 산업 현장에서 이미 축적된 협력의 경험이다. 중국의 혜주, 염성, 연대 등은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 온 대표적 도시들이다. 이들 지역은 전자, 자동차, 화학 등 다양한 산업에서 한국과 긴밀한 분업 구조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협력은 단순한 투자 유치나 생산 기지의 이전을 넘어, 기술과 인력, 공급망이 결합된 실질적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는 단계로 발전해 왔다. 한국 측에서도 새만금 산업단지는 이러한 협력의 미래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새만금은 단순한 산업단지를 넘어 동북아 경제 협력의 거점으로 설계된 프로젝트다. 중국의 연해 도시들과 연결될 때, 이곳은 생산과 물류, 에너지와 관광이 결합된 복합 경제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미 일부 기업과 지방정부 간 협력은 시작되었으며, 이는 국가 간 협정이 뒷받침될 때 더욱 확장될 수 있다. 결국 한중 FTA는 중앙정부의 협상 테이블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방과 기업, 산업과 시장이 함께 만들어가는 ‘살아 있는 협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할 때, 협정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실제 경제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는 상호균형이다. 시장 개방은 일방의 이익이 아니라 상호 호혜의 원칙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서비스와 금융 분야에서의 개방은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게 추진하되,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함께 강화하는 전략이 병행되어야 한다. 둘째는 제도적 신뢰다. 기업 활동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좌우되지 않도록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는 미래 지향성이다. 디지털 경제, 친환경 산업, 첨단 기술 분야에서의 협력을 확대함으로써 FTA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진화시켜야 한다. 동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동시에 갈등의 가능성도 상존하는 지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중 FTA는 단순한 경제 협정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지탱하는 구조적 장치가 될 수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은 갈등을 완화하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며, 협력의 경험은 신뢰를 축적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사드로 인해 멈추었던 시간은 이미 과거가 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회복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갈 것인가다. 한중 FTA는 그 출발점이자 시험대다. 양국이 상호존중과 균형의 원칙 위에서 이 협정을 완결할 때, 그것은 단순한 무역 협정을 넘어 동아시아의 미래를 지탱하는 주춧돌로 자리 잡을 것이다.
2026-04-11 12:48:45
-
-
-
위기의 시대, 답은 오래된 곳에 있다
[경제일보] 세계는 지금 불확실성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다. 중동에서는 이란 전쟁의 긴장이 끊이지 않고, 동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며 국제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여기에 종교와 민족의 갈등, 그리고 심화되는 빈부 격차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불안을 축적시키고 있다. 세계는 지금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문명적 전환기의 복합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정부는 정책의 방향을 잡기 어려워하고, 기업은 생존과 혁신 사이에서 갈등하며, 골목의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들 역시 하루하루의 매출과 비용 사이에서 치열한 균형을 고민한다. 누구도 예외 없이 흔들리는 시대, 그야말로 ‘확실한 것이 없는 시대’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정보나 더 빠른 기술만을 좇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가장 단순하고 가장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조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의 물음이다. 동양의 고전은 이미 오래전 이러한 질문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시해 왔다. 도덕경은 “지족자부(知足者富)”라 하여 만족을 아는 자가 진정한 부자임을 일깨웠고, 주역은 변화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중정(中正)’의 길을 가르쳤으며, 논어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곧 나라와 조직을 세우는 길임을 강조했다. 서양의 성서 또한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말하며 신뢰와 책임의 가치를 일깨운다. 이 모든 가르침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를 던진다. 경영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며, 숫자가 아니라 도(道)라는 사실이다. ‘경전으로 읽는 경영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눈앞의 이익과 단기 성과에 매몰되기 쉬운 오늘의 경영 환경 속에서, 우리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화려한 전략이나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과 조직을 지탱해 온 가장 오래된 지혜를 통해 오늘의 위기를 읽고 내일의 길을 찾고자 한다. 이 시리즈는 일주일에 서너번 이상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각각의 글은 고전의 한 구절에서 출발하되, 현실의 경영과 삶에 깊이 닿는 이야기로 풀어낼 것이다. 정부의 정책, 기업의 전략, 그리고 골목의 작은 가게까지 아우르며 모든 경제 주체가 공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경영 이야기’를 지향한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길은 멀리 있지 않다. 길은 언제나 기본과 원칙,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 속에 있다. 이 연재가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작지만 단단한 나침반이 되기를 바란다.
2026-04-08 09:47:06
-
-
-
-
감편·요금 인상에도 역부족…항공사 '제2의 코로나' 국면 진입하나
[경제일보] 중동 공역 제한과 고유가가 겹치면서 항공업계 수익 구조가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수요 급감이 중심이었던 코로나19와 달리 이번에는 연료비와 환율, 보험료 등 비용 요인이 먼저 손익을 압박하는 양상이다. 항공사들은 감편과 운임 인상을 병행하며 대응에 나섰지만 상승한 비용을 흡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쟁 이후에도 비용 조정이 지연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이번 상황이 단기 변수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30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국내 항공사들은 고유가 부담을 반영해 국제선 중심으로 감편에 나섰다. 진에어, 에어부산, 이스타항공, 에어프레미아, 에어로케이 등은 4월 이후 일부 노선 비운항을 확정했으며, 다른 항공사들도 추가 조정을 검토 중이다. 진에어는 4월 4일부터 30일까지 인천발 괌·클라크·냐짱, 부산발 세부 등 8개 노선에서 왕복 기준 45편을 줄인다. 에어프레미아는 4월 이후 로스앤젤레스 26편, 샌프란시스코 8편, 호놀룰루·방콕 각 6편, 뉴욕·워싱턴 각 2편 등 총 50편 감편을 결정했다. 이스타항공 역시 5월 인천∼푸꾸옥 노선 약 50편 운항을 중단할 계획이다. 운임 인상도 빠르게 반영되고 있다. 4월 국제선 유류할증료 기준이 되는 2월 16일∼3월 15일 싱가포르 항공유 평균값(MOPS)은 33단계 중 18단계로 산정됐다. 전달 6단계에서 한 달 만에 12단계 상승한 것으로, 현행 체계 도입 이후 최대 폭이다. 이에 따라 아시아나항공의 4월 국제선 유류할증료는 편도 최소 4만3900원에서 최대 25만1900원으로 책정됐다. 전달 대비 약 3배 수준이다. 티웨이항공도 3만800원에서 21만3900원 수준으로 올렸고, 제주항공 역시 29달러에서 68달러 범위로 인상했다. 문제는 요금 인상만으로 비용 상승을 상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시아·오세아니아 항공유 가격은 3월 27일 기준 갤런당 533.32센트로, 전쟁 직전인 2월 27일 223.75센트 대비 138% 급등했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 상승이 더해지면서 연료비뿐 아니라 항공기 리스, 정비, 보험 등 달러 결제 비용 전반이 동시에 확대됐다. 전쟁위험보험료 상승까지 겹치면서 비용 부담은 복합적으로 확대되는 구조다. 항공사별 대응 전략은 사업 구조에 따라 엇갈리고 있다. 대한항공은 현재까지 비운항을 검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반면, 저비용항공사(LCC)는 감편과 비용 절감 중심으로 대응하는 흐름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지난 25일부터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해 비용 절감과 투자 우선순위 조정에 착수했고, 일부 항공사들도 유사한 조치를 시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장거리 노선의 성격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장거리가 항공사 수익을 견인하는 핵심 노선으로 평가됐지만, 최근에는 연료 소모와 공역 우회, 보험 부담이 동시에 작용하는 구간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대한항공이 인천∼두바이 노선 운항 중단을 다음 달 19일까지 연장한 것도 이러한 환경 변화를 반영한 조치로 해석된다. 장거리 노선은 여전히 높은 운임을 확보할 수 있는 구간이지만 비용 변동성이 크게 확대된 상태다. 정책 요구도 다시 확대되는 흐름이다. 항공업계는 국토교통부에 비축유 활용과 운수권·슬롯 회수 유예 등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감편을 선택할 경우 향후 노선 권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부 재무구조 개선 명령 이행 기한을 연장했으며, 추가적인 지원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전쟁 종료 이후에도 비용 부담이 빠르게 해소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3월 기준 아시아-유럽 일부 노선 항공권 가격은 전달 대비 최대 560% 상승한 사례도 나타났다. 항공업계에서는 이번 상황이 단기 충격을 넘어 구조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감편이 장기화될 경우 공급 축소가 고착화되고, 항공권 가격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슬롯 유지 부담과 노선 권리 문제까지 겹치며 항공사 간 시장 점유율 재편 가능성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고유가와 환율 상승이 운임 인상으로 이어지면서 항공 수요가 가격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며 “항공사들이 수익 노선 중심으로 공급을 유지할 경우 노선 편중이 고착되면서 소비자 선택권 축소가 일시적 흐름이 아닌 장기적인 구조로 굳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2026-03-30 16:17:46
-
-
-
'망나니 칼춤'과 '밥그릇 싸움'… 이럴 바에 국민의 힘은 간판을 내려라
[경제일보]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국민의힘이 보여주는 작금의 행태는 역사의 반복이 아니라 '퇴행의 끝판'을 보는 듯하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이른바 ‘컷오프 파동’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잔인한 숙청이자, 민주주의의 기본 상식조차 망각한 권력 암투의 결정판이다. 정치현장을 10여년 취재한 경험이 있는 필자의 눈에 비친 이 광경은 공당(公黨)의 공천 과정이라기보다, 몰락해가는 봉건 왕조의 뒤안길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 가깝다. 이정현 공관위원장이 휘두르는 ‘전기 충격기’는 환자를 살리는 기구가 아니라 멀쩡한 사람을 잡는 흉기가 되었다. 현역인 박형준 부산시장을 명확한 기준도 없이 잘라내려 하고, 대구의 중진들을 싸잡아 컷오프하겠다는 발상은 ‘혁신’이 아니라 ‘오만’이다. 박 시장이 일갈했듯 이는 “망나니 칼춤”일 뿐이다. 정치의 본질은 설득과 합의에 있거늘, 이 위원장은 컷 오프 시킬때에는 객관적이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상식선에서 이뤄저야하는데도 아직 이런점에서 미약한 것으로 보인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천하의 나쁜 골짜기가 되지 말라(爲天下谷)”고 경고했다. 모든 오물과 탐욕이 모여드는 골짜기가 되면 결국 그 스스로 썩어 문드러진다는 뜻이다. 지금 국민의힘이 바로 그 ‘천하의 나쁜 골짜기’가 되어버렸다. 권력을 잃은 상실감에 함몰되어,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누가 더 큰 밥그릇을 차지할 것인가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지지율 20% 안팎에서 신음하는 지지자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당내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가련하다 못해 추하다. 인류결정(Human Destiny)』은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집단적 이기주의’를 꼽았다. 국민의힘 내에서 벌어지는 파행은 이 집단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공관위 내부에서 고성이 오가고 위원들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풍경은 이 당에 ‘시스템’도 ‘상식’도 없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꼴이다. 이른바 ‘충격 요법’을 써야 국민의 관심을 받는다는 발상 자체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국민은 정당의 ‘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유능하게 내 삶을 바꿀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란 바로잡는 것(政者正也)”이라 했다. 스스로를 바로잡지 못한 자가 어찌 남을, 하물며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국민의힘은 지난 패배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왜 국민에게 버림받았는지에 대한 처절한 고백도 없었다.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도 믿음이 갈까 말까 한 판국에, 또다시 ‘내 사람 심기’와 ‘현역 죽이기’라는 구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는 국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요, 민주공화국의 정당으로서 가질 최소한의 도리도 아니다. 야당의 존재 이유는 여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건전한 야당이 있어야 정부도 긴장하고 바로 선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자 상식이다. 그러나 지금의 국민의힘은 그 귀중한 야당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부산과 대구라는 텃밭에서조차 자중지란에 빠져 “더불어민주당에 승리를 헌납하겠다”는 비명이 당내에서 터져 나오는 지경이라면, 이 정당의 생명력은 이미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전통 지지층인 TK와 PK 민심조차 이반 시키는 ‘내려꽂기’ 식 공천과 명분 없는 ‘중진 숙청’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혁신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 든 것이 추악한 권력욕뿐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동지를 베고 국민을 속이는 행태를 멈추지 않는다면, 국민의힘에 미래는 없다. 더 이상의 혼란은 국민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지금처럼 자해적인 밥그릇 싸움을 계속할 바에는 차라리 당을 해체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다. 껍데기만 남은 ‘혁신’의 구호를 집어던지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라.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 용기가 없다면, 정치라는 신성한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 마땅하다. 국민은 더 이상 당신들의 ‘칼춤’을 볼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다.
2026-03-17 11:30:0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