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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조 '수퍼 재정', 미래를 위한 투자인가 미래를 담보 잡는 도박인가
[경제일보] 국가 예산은 한 해의 살림살이를 넘어 국가의 철학과 미래를 담는 설계도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을 올해보다 10% 이상 늘어난 800조 원 안팎의 '수퍼 재정'으로 편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경기 회복에 따른 세수 증가를 바탕으로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하고 인공지능(AI), 바이오, 양자기술 등 첨단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구상이다.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미래 산업에 대한 선제적 투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세계가 기술 패권 경쟁에 사활을 거는 시대에 정부가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방향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재정은 의지만으로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흐름과 재정 원칙 속에서 집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시기를 놓치면 독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 경제는 긴 고물가와 고금리의 터널을 겨우 벗어나 거시경제의 안정을 회복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물가는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고, 시중 유동성은 여전히 풍부하다. 수도권 부동산 시장 역시 언제든 다시 과열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정부가 10%를 넘는 초확장 재정을 집행할 경우 물가와 자산 가격을 다시 자극할 가능성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정부의 재정 확대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과도 충돌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긴축을 유지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대규모 재정을 풀면 정책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재정과 통화정책은 경제라는 수레의 두 바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결국 국민 경제가 그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재정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명확하다. 경기가 좋을 때는 재정을 비축하고 국가채무를 줄이며, 어려울 때 과감히 사용하는 것이다. 최근 세수 여건이 개선된 것은 반도체 산업의 호조에 힘입은 측면이 크다. 이를 구조적인 세수 증가로 착각해 지출을 대폭 늘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이다. 일시적인 호황을 영구적인 성장으로 오인하는 순간 재정 건전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늘어난 세수는 무엇보다 국가채무를 줄이는 데 우선 활용해야 한다. 국가 부채는 미래 세대가 반드시 갚아야 할 부담이다. 지금 곳간이 조금 채워졌다고 해서 소비부터 늘리는 것은 가계든 국가든 바람직한 재정 운용이 아니다. 미래의 경기 침체가 닥쳤을 때 사용할 재정 여력을 미리 소진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더 큰 우려는 막대한 예산이 정치적 논리에 휘둘릴 가능성이다. 선거를 앞두고 지역 민원성 사업이나 현금성 지원이 확대된다면 재정은 성장의 마중물이 아니라 포퓰리즘의 연료가 된다. 과거에도 선심성 재정은 단기적인 인기만 남겼을 뿐 국가 경쟁력을 높이지 못했다. 특히 경직성 복지와 현금성 지원은 한 번 시작되면 줄이기 어려워 국가 재정을 장기간 압박하는 구조적 부담으로 남는다. 정부가 신설하려는 미래대응기금은 반드시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높이는 분야에 집중되어야 한다. AI와 반도체, 바이오, 양자컴퓨터, 차세대 에너지 등 미래 산업은 물론, 기술 인재 양성과 연구개발 생태계 구축에도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동시에 사업 선정부터 집행, 성과 평가까지 전 과정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철저한 사후 검증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예산은 규모보다 효율이, 속도보다 성과가 더욱 중요하다. 아울러 저출생과 고령화, 노동시장 구조개혁, 지역 균형발전 등 대한민국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재정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단순한 경기부양보다 국가 체질을 개선하는 데 쓰이는 예산만이 미래 세대의 부담을 줄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오늘의 인기와 정치적 성과를 위해 미래의 부담을 키우는 재정 운용은 결코 책임 있는 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정부는 800조 원이라는 숫자의 화려함보다 그 예산이 가져올 거시경제적 파급 효과를 더욱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재정 건전성을 지키면서 미래 산업에는 과감히 투자하는 균형 감각, 그것이 지금 정부가 보여야 할 진정한 국가 운영의 지혜다. 풍년일수록 흉년을 준비하라는 경제의 기본 원칙을 잊지 않을 때만이 대한민국의 재정은 미래 세대에게 희망이라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2026-07-14 12: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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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안정에 안주할 때 아니다…외환 방어력 키울 골든 타임이다
[경제일보] 반도체 수출 호조가 한국 경제에 모처럼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이 급증하면서 외화 유입이 늘었고, 한동안 금융시장을 짓눌렀던 원·달러 환율도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고환율과 고물가, 고금리의 삼중고에 시달려 온 우리 경제에는 분명 반가운 변화다. 그러나 지금의 환율 안정이 구조적 체질 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부 충격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더욱 냉정한 대응이 요구된다.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개방경제다. 수출이 성장의 버팀목인 만큼 국제 금융시장과 지정학적 변수에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미국의 금리 정책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미·중 전략 경쟁은 장기화하고 있다. 중동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험도 해소되지 않았다. 글로벌 공급망 역시 정치와 안보 논리에 따라 언제든 재편될 수 있다. 반도체 호황이 이어진다고 해서 대외 리스크까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환율 안정기에 외환 방어력을 한층 높여야 한다. 외환보유액은 국가 경제의 최후 안전판이다. 시장이 불안할 때는 국가 신용을 지키는 버팀목이고, 외환시장의 과도한 변동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다. 외화가 충분히 유입되는 지금이야말로 외환보유액을 확충할 적기다. 시장 왜곡을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외화를 흡수하고, 유동성이 높은 안전자산 비중을 확대하는 등 보유 자산의 질도 함께 높여야 한다. 거시경제 체질 개선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환율이 안정됐다고 가계부채 위험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기업의 생산성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한계기업 구조조정은 여전히 더디고, 부동산 중심의 자금 쏠림도 지속되고 있다. 재정 건전성 역시 안심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경기 부양에 치우친 단기 처방이 아니라 경제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구조개혁이다. 노동과 연금, 규제 개혁을 비롯한 생산성 제고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 외환시장의 안정은 정부 정책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장의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재정 규율을 확립하며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독립성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기적인 환율 수준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을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외국인 자금을 붙잡는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다. 우리 경제는 이미 여러 차례 방심의 대가를 치렀다. 1997년 외환위기는 외환 유동성 관리 실패가 얼마나 큰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역시 충분한 대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위기는 늘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고, 준비된 나라만이 충격을 최소화했다. 반도체 호황과 환율 안정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것이 경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면허증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외환보유액을 확충하고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며 구조개혁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이다. 경제는 호황기에 미래를 준비한 나라가 위기에서도 살아남는다. 오늘의 환율 안정을 내일의 국가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것, 그것이 정부와 경제 당국이 놓쳐서는 안 될 시대적 책무다.
2026-07-13 09: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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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는 웃는데 장바구니는 운다… 체감물가부터 잡아야 민생이 산다
[경제일보] 정부는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주요 선진국에 비해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전체 물가상승률만 놓고 보면 한국은 OECD 평균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숫자만 보면 물가 관리가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국민이 시장과 마트에서 느끼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 통계는 안정이라 말하지만, 장바구니는 연일 비명을 지르고 있다. 국민이 매일 사 먹는 우유와 빵, 육류를 비롯한 식음료 가격은 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높다는 조사 결과는 이러한 괴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부가 말하는 지표물가와 국민이 체감하는 생활물가 사이에 깊은 골이 존재하는 것이다. 경제에서 물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국민의 삶을 직접 규정하는 생활의 척도다. 아무리 전체 물가가 안정됐다고 발표해도 식탁에 오르는 기본 식재료 가격이 오르면 국민은 물가가 안정됐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루 세끼를 해결해야 하는 서민에게는 국제유가보다 계란값이 중요하고, 소비자물가지수보다 우유와 빵값이 더 절실하다. 물가정책의 성패는 통계청의 그래프가 아니라 국민의 장바구니에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정부는 잊어서는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공급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식품산업과 유통 구조 전반에 누적된 구조적 모순이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생산자는 제값을 받지 못한다고 호소하지만 소비자는 지나치게 비싼 값을 지불한다. 그 사이에는 복잡한 유통 단계와 높은 물류비, 비효율적인 거래 구조, 과도한 마진이 자리하고 있다. 생산자도 웃지 못하고 소비자도 울상인 기형적인 시장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우유 가격만 보더라도 낙농 원유 가격 인상은 소비자가격에 즉각 반영되지만 원가가 하락할 때는 가격 인하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빵 역시 국제 밀 가격이 하락했음에도 소비자가격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육류도 사료 가격이 안정되고 국제 곡물가격이 떨어졌지만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격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가격은 오를 때는 빠르고 내릴 때는 느린 이른바 '로켓 인상·깃털 인하'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시장의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구조다. 정부의 대응도 미흡하다. 농축산물 할인쿠폰을 지급하거나 일시적으로 수입을 확대하는 대책은 단기 처방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명절이나 특정 시기에 할인행사를 확대하는 방식은 잠시 체감물가를 낮출 수는 있지만 시장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결국 할인행사가 끝나면 소비자는 다시 높은 가격을 감당해야 한다. 물가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가리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다. 이제는 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생산에서 소비까지 이어지는 유통 구조를 전면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중간 유통 단계의 비효율을 줄이고, 물류 시스템을 현대화하며, 가격 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독과점적 시장 구조가 존재하는 분야는 공정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원가가 하락하면 소비자가격에도 신속히 반영되는 합리적인 가격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책무다. 동시에 국내 농축산업의 경쟁력 강화도 병행해야 한다. 생산비 절감과 스마트 농업 확대, 물류 혁신, 계약재배 활성화 등을 통해 안정적인 공급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해외 공급망 변화에 지나치게 흔들리는 구조를 개선하고 식량안보 차원의 장기 전략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식품산업을 단순한 소비재 산업이 아니라 국가 경제와 민생을 떠받치는 핵심 기반 산업으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물가정책 역시 소비자물가지수 중심에서 생활밀착형 체감물가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민이 자주 구매하는 식료품과 생필품의 가격 흐름을 정책의 핵심 지표로 삼고, 생활물가 안정 성과를 정부 정책의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물가 안정은 절반의 성공도 아니다. 경제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 통계가 아무리 안정적이라도 국민이 장을 보며 한숨을 쉬고, 식탁 앞에서 부담을 느낀다면 그것은 결코 성공한 물가정책이라 할 수 없다. 정부가 진정 민생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통계가 아니라 장바구니를 가볍게 만드는 실질적인 대책이다. 국민은 더 이상 지표 속의 안정이 아니라 식탁 위의 안정을 원하고 있다. 민생경제의 출발점은 바로 체감물가를 잡는 데 있으며, 그 책임은 결국 정부와 시장 모두에게 있다.
2026-07-10 14: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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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조 원의 국민연금 대체투자, 이젠 수익보다 책임을 묻는다
[경제일보] 국민연금의 대체투자 규모가 248조 원을 넘어섰다. 이는 국민연금기금 전체 자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규모로, 세계적 수준의 연기금으로 성장한 국민연금의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저금리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속에서 부동산과 인프라, 사모펀드, 사모대출 등 대체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안정적인 장기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외형의 성장에 걸맞은 책임과 투명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거대한 기금은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은 일반 금융회사의 투자자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민이 평생 성실히 납부한 보험료를 바탕으로 조성된 공적 자산이며, 노후를 지탱하는 사회안전망이다. 따라서 기금 운용의 목표는 단순한 수익률 경쟁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장기적 안정성과 공공성, 그리고 사회적 책임이 함께 구현될 때 비로소 국민연금의 존재 이유가 완성된다. 단기 성과를 위해 미래 세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외면하는 투자는 공적 연기금이 지향해야 할 길이 아니다. 문제는 대체투자의 특성상 투자 구조가 복잡하고 정보 공개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장내 주식이나 채권과 달리 사모펀드와 해외 인프라, 부동산 투자 등은 계약 내용과 투자 대상이 외부에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특성은 투자 판단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책임 있는 감시를 어렵게 만든다. 특히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 대한 검증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사후 관리가 미흡할 경우 공적 기금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업이나 기업에 간접적으로 투자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수익만을 기준으로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세계 주요 연기금들은 이미 ESG를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라 장기 투자 위험을 관리하는 핵심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과 노동권 보호, 건전한 지배구조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요소이며, 장기적으로는 투자 수익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결국 책임 투자는 수익성과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안정적인 장기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전략인 셈이다. 국민연금 역시 이제 대체투자 분야에 특화된 ESG 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투자 대상을 선정하는 단계부터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의 건전성을 면밀히 평가하고, 투자 이후에도 정기적인 점검과 사후 평가를 의무화해야 한다. 민간 위탁운용사를 선정할 때에도 ESG 이행 실적과 내부 통제 수준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반영해야 한다. 운용사의 수익률뿐 아니라 책임투자 역량까지 평가하는 체계가 정착될 때 시장 전체의 건전성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투명성이 강화되어야 한다. 투자 기밀을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까지 차단해서는 안 된다. 외부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감시체계를 확대하고, 대체투자의 ESG 위험과 관리 현황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공적 기금일수록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으며, 설명할 수 없는 투자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248조 원이라는 막대한 자산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노후와 미래 세대의 삶이 담긴 소중한 자산이다. 국민연금이 세계적인 연기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규모보다 신뢰가 먼저다. 공공성을 잃은 수익은 오래가지 못하며, 책임 없는 투자는 결국 더 큰 손실로 되돌아온다. 국민연금과 정부는 지금이야말로 대체투자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책임투자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노후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투자이며, 공적 연기금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6-07-09 09: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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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선거 신뢰, 선관위는 환골탈태해야 한다
[경제일보] 민주주의의 생명은 선거이고, 선거의 생명은 국민의 신뢰다. 그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가 빈틈없이 지켜질 때 비로소 쌓인다. 그런데 지난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믿기 어려운 장면들이 잇달아 드러났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장시간 대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투표함 보관시설에는 CCTV 사각지대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투표지가 쇼핑백에 담겨 이동하는 모습까지 공개되면서 국민은 충격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적인 수준의 선거 관리 시스템을 자부해 온 대한민국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참담함을 넘어 국가적 수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이 보장한 독립기관이다. 그러나 독립성은 특권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책임이다. 아무리 독립된 기관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선거 관리조차 허술했다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투표용지 수급은 선거 관리의 가장 기초적인 업무이며, 투표함 보관과 운송은 공정성을 담보하는 핵심 절차다. 이러한 기본조차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면 이는 단순한 실무 착오나 현장 직원의 과실만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조직 전체의 기강과 관리 체계, 위기 대응 시스템을 근본부터 되돌아봐야 할 사안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민의 신뢰가 크게 흔들렸다는 점이다. 선거는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유권자가 결과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절차가 공정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표용지가 부족하고, 보관 절차에 허점이 드러나며, 관리 과정이 허술하게 비쳐지는 순간 선거의 권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이해관계를 넘어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동안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라는 독립성을 이유로 외부의 비판과 견제를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 논란 등 조직 운영과 관련한 여러 문제가 제기됐을 때도 국민이 납득할 만한 쇄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번 선거 관리 부실은 그러한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조직은 견제와 감시가 작동할 때 건강해진다. 스스로를 성역으로 여기고 책임보다 권한을 앞세우는 조직은 결국 국민의 신뢰를 잃게 마련이다. 감사원과 수사기관은 이번 사태의 원인과 경위를 철저하고 객관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투표용지 부족은 왜 발생했는지, 관리 체계는 적절하게 작동했는지, 법령과 규정 위반이나 관리상 중대한 과실이 있었는지를 국민 앞에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사실관계가 확인된다면 관련자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헌법기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아울러 선관위는 이번 사태를 조직 존립을 좌우하는 마지막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거 관리 전 과정을 디지털 기술과 국제적 기준에 맞게 전면 재설계하고, 투표용지 관리, 보관 및 운송 체계, CCTV 감시 시스템, 내부 감사 기능까지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독립성은 책임성과 투명성이 함께할 때 비로소 존중받는다. 책임을 외면한 독립성은 독선으로 비칠 뿐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국민의 신뢰이며, 그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철저한 진상 규명과 과감한 개혁 외에는 없다. 선관위가 스스로 환골탈태하지 못한다면 국민은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요구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2026-07-08 14: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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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K-방산, 외교와 동맹까지 수출해야 산다
[경제일보] 노자는 『도덕경』에서 "큰 나라는 낮은 곳에 처해 모든 물을 받아들인다(大國者下流)"고 했다. 진정한 강국은 힘만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연대를 통해 영향력을 넓혀 간다는 뜻이다. 이번 캐나다 차세대 잠수함 사업 결과는 이 오래된 진리를 대한민국 방위산업에 다시 일깨워 주었다. 세계 방산시장에서 거침없이 영토를 넓혀 오던 K-방산이 중요한 고비를 맞았다. 캐나다 정부가 추진한 약 60조 원 규모의 차세대 잠수함 도입사업(CPSP)에서 한화오션은 막판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독일 티센크루프 마린 시스템즈(TKMS)에 우선협상대상자 자리를 내주었다. 독자 설계와 건조 능력, 세계 최고 수준의 가성비, 철저한 납기 준수와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도 넘지 못한 벽이 있었다. 그것은 가격도, 성능도 아닌 '나토(NATO) 동맹'이라는 국제정치의 현실이었다. 이번 결과를 단순한 수주 실패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K-방산이 글로벌 초일류 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값진 예방주사라 할 만하다. 방산은 자동차나 반도체처럼 품질과 가격만으로 승부하는 산업이 아니다. 무기 거래는 군사적 상호운용성, 국가 간 신뢰, 외교 관계,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가장 정치적인 국가 전략사업이다. 결국 무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안보 동반자를 선택하는 일이며, 방산 계약은 기업이 아닌 국가가 치르는 총력전이다. 캐나다의 선택도 이런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국 대선 이후 국제질서는 급속히 재편되고 있고, 유럽은 러시아의 위협 속에서 나토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방위비 증액 압박을 받고 있는 캐나다로서는 같은 나토 회원국인 독일과 협력하는 것이 안보적·외교적으로 더 큰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한국의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이 결코 뒤지지 않았음에도 지정학적 연대가 최종 승부를 갈랐다. 냉혹한 국제정치 앞에서는 기업의 노력과 경제적 제안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이번 수주전이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이제 K-방산은 기술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하이브리드 외교·금융 총력전' 체제로 진화해야 한다. 대통령실과 외교부, 국방부, 산업통상자원부, 방위사업청, 국가정보기관, 그리고 기업이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는 상시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정상외교와 국방외교를 연계하고, 정보 자산 공유와 연합훈련 확대, 군수지원 협력, 기술협력, 포괄적 안보 파트너십을 결합한 '안보 패키지'를 무기 제안서와 함께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무기를 파는 나라가 아니라 함께 안보를 책임지는 동반자라는 신뢰를 심어줄 때 비로소 승률은 높아질 것이다. 정책금융 경쟁력 강화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최근 방산 프로젝트는 수십조 원 규모가 일반화되고 있으며, 구매국은 가격보다 장기 저리 금융과 안정적인 자금 조달 능력을 더욱 중요하게 평가한다.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의 지원 한도를 현실에 맞게 확대하고, 방산 특화 금융 프로그램을 과감히 정비해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무기를 보유하고도 금융 지원에서 밀려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기업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의 한계다. 동시에 전략적 외교의 지평도 넓혀야 한다. 한국은 나토의 아시아·태평양 파트너국(AP4)이지만, 나토 회원국들이 누리는 상호 방위체제와 정치적 신뢰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유럽과 북미 시장의 높은 방산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나토 표준과의 완벽한 호환성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공동 연구개발과 연합훈련, 군수지원 협력 등을 통해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와 기여도를 꾸준히 높여야 한다. 안보 동맹의 깊이가 곧 방산 수출의 깊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不戰而屈人之兵)"라고 했다. 현대 방산시장에서도 승패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이 아니라 그 이전에 형성된 외교와 신뢰, 동맹의 축적에서 이미 결정된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독자 잠수함 설계 능력과 첨단 무기체계를 보유한 방산 강국이다. 이번 좌절을 패배주의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실패 이후의 변화다. 기술력이라는 한 축 위에 외교력과 금융, 전략적 동맹이라는 또 다른 축을 세울 때 비로소 K-방산은 지속 가능한 세계 방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방산 수출의 패러다임을 한 단계 진화시킬 때 대한민국은 무기만 수출하는 나라가 아니라 신뢰와 안보를 함께 수출하는 진정한 글로벌 방산 리더로 우뚝 설 것이다.
2026-07-07 08: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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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 국회가 된 7월 임시국회, 국민은 또다시 뒷전인가
[경제일보] 7월 임시국회가 또다시 '반쪽 국회'라는 오명을 안은 채 막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 거대 여당은 민생 개혁 입법을 신속히 처리하겠다며 속도전을 예고했고, 제1야당은 원 구성 강행에 반발하며 국회 보이콧을 이어가고 있다. 입법부의 양 축인 여야가 출발부터 등을 돌린 채 대치하는 모습은 대한민국 의회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은 민생을 해결하는 국회를 원했지만, 정치권은 또다시 힘겨루기와 감정싸움으로 응답하고 있다. 의회민주주의는 다수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수의 결정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수 의견을 경청하고 설득하는 절차가 전제될 때 비로소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최근 국회의 모습은 다수의 힘으로 모든 것을 밀어붙이려는 오만과, 이에 맞서 국회 자체를 거부하는 무책임이 맞부딪치는 최악의 정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거대 여당은 국민이 부여한 의석을 국정 운영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책임보다 힘을 앞세운 일방통행식 국회 운영은 결코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니다. 원 구성부터 주요 법안 처리까지 협의와 조정 대신 숫자의 우위를 앞세워 밀어붙이는 방식은 국회의 존재 이유인 토론과 합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다. 절차적 정당성을 경시한 입법은 법률의 생명력마저 약화시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집히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만든다. 야당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의회민주주의에서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조직이 아니라 권력을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임 있는 정치세력이다. 그러나 국회 보이콧을 상시적인 정치투쟁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국민이 부여한 책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회의원이 국회를 떠나는 순간 손해를 보는 것은 여당이 아니라 국민이다. 민생 현안은 방치되고, 경제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야 모두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국회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승자독식의 제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는 정치 시스템이다. 다수는 힘을 절제해야 하고, 소수는 책임 있게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 민주주의를 말해서는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경제는 어느 때보다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다. 고물가와 고금리의 여파는 여전히 서민의 삶을 짓누르고 있고, 자영업자의 폐업은 이어지고 있으며, 청년들의 취업난과 기업들의 투자 위축도 심화되고 있다. 미국발 관세 정책 변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저성장 고착화라는 대외 변수까지 겹쳐 민생은 한순간도 지체할 여유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가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다뤄야 할 법안들은 대부분 국민의 삶과 직결된 사안들이다. 추가경정예산 후속 입법과 경제 활성화 대책, 소상공인 지원,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 노동시장과 연금 개혁 등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과제들이다. 그러나 여당은 독주하고 야당은 퇴장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법안은 졸속 처리되거나 아예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피해는 정치권이 아니라 국민에게 돌아간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 군자의 정치라는 뜻이다. 노자 역시 『도덕경』에서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이 오래간다"고 가르쳤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정치보다 상대를 포용하는 정치가 오래간다는 인류의 지혜를 오늘의 정치권은 되새겨야 한다. 국회는 승패를 겨루는 경기장이 아니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헌법기관이다. 여당은 숫자의 우위를 겸손으로 다스려야 하며, 야당은 보이콧보다 정책 경쟁으로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무엇보다 원 구성과 쟁점 법안에 대해서는 여야 원내대표와 상임위원장이 참여하는 상설 협의체를 활성화하고, 일정 기간의 숙의와 공개 토론을 제도화하는 등 협치를 복원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도, 무조건 거부하는 정치도 이제는 끝내야 한다. 국민은 정치권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다. 국회를 구성하라고 표를 준 것도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갈등을 조정하라고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7월 임시국회가 또 하나의 '반쪽 국회'로 끝난다면 국민의 정치 불신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의석이 아니라 더 큰 책임감이며, 더 높은 목소리가 아니라 더 깊은 경청이다. 국회가 협치를 잃는 순간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여야는 지금이라도 정쟁의 장막을 걷어내고 국민 앞에 마주 앉아야 한다. 그것이 헌법이 부여한 의회의 책무이며, 국민이 마지막으로 정치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상식이다.
2026-07-06 09: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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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000억 달러의 착시(錯視)와 민생 재정 투입의 엄중한 원칙
[경제일보] 우리 경제가 다시 한번 대기록을 세웠다. 반도체 경기 호황과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 6월 한 달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1000억 달러 고지를 돌파한 것이다. 단일 월간 수출이 세 자릿수 빌리언(Billion) 달러를 기록한 것은 대한민국 무역사상 전례가 없는 쾌거다. 거시 경제 지표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 역시 일제히 상향 조정되며 숫자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지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리 썩 좋아할 수만 없다. 수출 전선의 승전고가 들려오는데도, 서민들이 체감하는 골목상권의 체감온도는 여전히 한겨울 한복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수출 대기업이 벌어들인 온기가 내수 시장 전체로 흘러가지 못하는 소위 ‘성장의 동조화 단절’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낙수효과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고물가와 고금리의 장기화로 신음하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그리고 실질소득 감소에 지친 평범한 가정의 한숨뿐이다. 이런 괴리를 메우겠다며 최근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민생회복’을 내걸고 대규모 재정 지원 사업을 쏟아내고 있다. 선심성 현금성 지원부터 지역 화폐 확대, 무분별한 복지성 예산 편성 등 종류도 다양하다. 서민의 어려움을 살피겠다는 취지 자체를 탓할 수는 없으나, 지금 정치권이 보여주는 재정 투입의 속도와 방식은 심각한 우려를 자아낸다. 그 동안 국가 재정과 경제 정책을 지켜보면서 얻은 불변의 상식은 하나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며, 위기일수록 ‘기본과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 지표가 좋다는 이유로, 혹은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잡겠다는 계산으로 국가 곳간을 쉽게 열어서는 안 된다. 현재 대한민국 국가 채무는 이미 경계선을 넘어섰고,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 자립도 역시 바닥을 기고 있다. 중앙정부의 세수 결손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지자체마저 빚을 내어 민생회복이라는 단기 처방에 올인한다면, 이는 미래 세대의 자산을 가로채 현재의 고통을 잠시 잊으려는 마약성 처방과 다름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인 재정 살포가 아니라, 현재의 국가 및 지방 재정 상태에 대한 냉정하고 면밀한 현황 점검이다. 가용한 재원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어디에 얼마만큼의 예산을 투입해야 가장 효율적인 정책 효과가 나타날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돈을 쓰는 일은 언제 해도 늦지 않다. 그러나 한 번 잘못 흘러간 재정은 다시 회수할 수 없으며, 불필요하게 풀린 유동성은 어렵게 잡아두고 있는 물가를 자극해 서민 경제를 더 깊은 도탄에 빠뜨리는 부메랑이 될 뿐이다. 수출 호조라는 착시 효과에 가려진 내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구조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단순히 1회성 현금을 쥐여주는 미봉책으로는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근본적으로 되살릴 수 없다. 자영업자의 한계 상황을 유예해 주는 금융 지원의 정밀화, 취약계층을 겨냥한 핀셋형 선별 복지, 그리고 기업들이 국내 소비 유통망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돕는 규제 완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의 펀더멘털을 강화하는 구조 개혁 없이 재정 만능주의에 기대는 것은 정책적 태만이자 직무유기다. 정치권과 행정부는 숫자가 주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수출 1000억 달러는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그것이 민생의 구원투수가 될 수는 없다.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지키는 것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마지노선이다. 선심성 정책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상식과 원칙에 기반한 정밀한 경제 정책을 펼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생회복의 길이 열릴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엄중한 각성과 책임 있는 결단을 촉구한다.
2026-07-02 07: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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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을 넘어 국정 협력으로, 지금은 대한민국을 재설계할 때다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오찬은 전·현직 대통령의 예우를 넘어 우리 정치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적 자리다. 여권 내부에서는 당 대표 선출을 앞두고 다양한 의견과 노선이 제기되고 있다. 집권 여당에서는 정책 방향과 국정 운영 방식을 둘러싼 토론이 이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이 마주한 현실을 생각하면 정치의 중심은 내부 경쟁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 강화에 맞춰져야 한다. 세계는 거대한 전환기에 들어섰다. 생성형 AI는 산업과 일자리, 교육과 행정, 국방과 금융까지 국가 시스템 전반을 바꾸고 있다. 여기에 미·중 전략 경쟁, 중동 정세의 불안,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공급망 재편, 저출생과 고령화, 지방 소멸 등 복합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과거의 정치 문법만으로는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기 어렵다. 이제 대한민국은 부분적인 보수나 미세한 조정보다는 국가 운영 시스템을 시대 변화에 맞게 다시 설계하는 수준의 혁신을 고민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용어가 아니라 내용이다. 국민이 체감하는 성장 전략을 마련하고, AI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육성하며, 산업과 교육, 행정과 규제를 미래 환경에 맞게 혁신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다. 집권 세력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선거를 치르는 정당과 국정을 운영하는 집권 세력은 역할이 다르다. 집권 이후에는 지지층의 기대를 존중하는 동시에 국민 전체의 삶을 책임지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국정 운영은 통합과 협력, 그리고 실용적 해법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민주개혁 진영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국정 경험을 가진 전직 대통령의 조언과 협력은 국가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 또한 전임 정부의 성과와 경험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책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적 연속성과 시대적 혁신은 상충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추구할 수 있는 목표다. 민주당 역시 내부 경쟁을 미래 비전 경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다양한 의견은 민주주의의 힘이지만, 그것이 소모적 갈등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집권당의 책무는 정권의 성공이 아니라 국민의 성공이며, 국정의 안정이 곧 국민의 안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AI 시대 국가 경쟁은 더 이상 특정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소프트웨어와 피지컬 AI, 교육 혁신과 규제 개혁, 지역 균형발전과 인재 양성은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여당은 물론 사회 각계의 협력이 절실하다. 오늘의 오찬이 단순한 정치 일정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국정 운영을 위한 신뢰를 쌓고, 미래를 위한 협력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과거를 둘러싼 논쟁보다 미래를 향한 공동의 비전이다. 정치는 갈등을 확대하는 기술이 아니라 국가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지혜여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새로운 도약의 문 앞에 서 있다. 정치가 시대의 변화를 읽고 국민을 하나로 모을 때,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도 비로소 힘을 얻게 될 것이다.
2026-07-01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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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1550원 시대, 시장은 정부의 의지가 아니라 국가의 체력을 묻고 있다
[경제일보] 외환당국이 50조원이 넘는 외환시장 안정 자금을 투입하며 방어에 나섰음에도 원·달러 환율이 끝내 1550원을 돌파했다. 정부는 "과도한 쏠림 현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시장은 이미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 환율은 정부의 의지를 반영하는 숫자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체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아무리 많은 달러를 시장에 풀어도 경제의 기초 체력이 흔들리면 환율은 결국 제 갈 길을 간다. 이번 환율 급등은 단순한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아니라 우리 경제 전반에 누적된 구조적 불안이 한꺼번에 분출되고 있다는 경고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환율 상승이 일시적인 외부 충격에만 기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의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와 국채 급증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안해지고 있으며, 달러 강세는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국내 증시는 성장 동력을 잃은 채 외국인 자금 이탈이 이어지고 있고, 수출 증가세마저 둔화되면서 원화 가치는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 외부 악재와 내부 취약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위기인 것이다. 정부는 시장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동원하고 있다. 물론 급격한 환율 변동을 완화하기 위한 시장 개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응급처치일 뿐이다. 병의 원인을 치료하지 않은 채 해열제만 반복해서 투여하는 방식으로는 경제를 정상 궤도로 되돌릴 수 없다. 시장은 외환보유액 규모보다 국가 경제의 성장성과 재정 건전성, 그리고 정책의 신뢰를 더욱 냉정하게 평가한다. 더 큰 문제는 국내 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다.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는 금리와 환율이 동시에 상승하는 상황에서 금융 시스템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시한폭탄이다. 원화 약세가 지속되면 수입 물가가 상승하고 이는 다시 소비자 물가와 금리를 자극한다. 금리가 오르면 가계의 이자 부담은 급증하고 소비는 위축된다. 소비 둔화는 기업 투자 감소로 이어지고, 결국 성장률 하락과 실업 증가라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환율 문제는 외환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생활과 국가 경제 전반을 뒤흔드는 복합 위기인 것이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시장 개입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투자자들이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신뢰할 수 있도록 경제의 기초 체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고, 생산성과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구조개혁에 속도를 내야 한다. 노동·연금·교육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첨단산업과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산업정책도 일관되게 추진되어야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장기 투자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시급하다. 가계부채 관리 역시 보다 정교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대출 억제와 규제 강화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실수요자는 보호하되 투기성 부채는 철저히 관리하고,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높이는 동시에 취약계층의 상환 능력을 지원하는 맞춤형 대책이 병행되어야 한다. 부동산 정책과 금융 정책, 통화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시장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정책 간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사는 외환위기가 하루아침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은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임시방편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더 큰 대가를 치렀다. 1997년 외환위기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의 환율 급등 역시 또 하나의 경고장일 수 있다. 시장은 정부의 발표보다 행동을, 구호보다 정책의 일관성을, 단기 처방보다 국가의 경쟁력을 보고 있다. 환율 1550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우리 경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냉정한 성적표다. 외환시장 방어라는 미봉책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 체질을 근본부터 바꾸는 개혁에 나설 것인가는 이제 정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국가 경제는 의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신뢰로 지탱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장을 향한 안심 메시지가 아니라, 국민과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다.
2026-07-01 15: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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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조 원 AI 메가프로젝트, 선언보다 실행이 국가의 운명을 가른다
[경제일보] 국가의 흥망은 시대가 요구하는 산업을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다.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이끌었고, 석유가 20세기 세계 질서를 재편했다면, 21세기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다. 정부가 호남권 반도체 기지 조성을 포함한 1600조 원 규모의 'AI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감안할 때 결코 늦지 않은 선택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사업을 챙기며 신속한 집행을 강조한 것도 국가적 절박함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거대한 숫자가 아니다. 160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투자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이 실제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행력이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수많은 국가 프로젝트를 화려하게 발표했지만, 정치 일정에 밀리고 예산 확보에 실패하거나 지역 이해관계에 발목이 잡혀 용두사미로 끝난 사례를 수도 없이 경험했다. 이번 프로젝트만큼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AI와 반도체는 더 이상 특정 산업이 아니다. 제조업은 물론 금융, 의료, 국방, 교육, 물류에 이르기까지 국가 시스템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기반이다. 미국은 국가 차원의 반도체 지원 정책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으며, 중국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AI 자립에 사활을 걸고 있다. 유럽과 일본도 첨단 산업 육성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런 국제 경쟁 속에서 대한민국이 머뭇거리는 순간 미래 산업의 주도권은 영원히 다른 나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방향이 옳다 해도 현실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국가 전략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먼저 검증되어야 할 것은 재원 조달 방안이다. 1600조 원이라는 규모는 정부 재정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민간 투자와 정책금융, 연기금, 해외 투자자본을 어떻게 유치하고 결합할 것인지 구체적인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한다. 투자 주체와 재원 조달 방식, 사업 추진 일정이 명확하지 않다면 시장은 숫자만 거창한 계획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역시 정치적 상징성보다 경제적 실효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특정 지역에 공장을 유치했다고 첨단 산업 생태계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기반시설을 요구하는 산업이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 없이는 생산이 불가능하며, 초순수 용수 확보는 생산라인의 생명줄과도 같다. 고속도로와 철도, 항만 등 물류망은 물론 연구개발 시설과 전문 인력 양성 체계도 동시에 갖춰져야 한다. 특히 전력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 과제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송전망 확충과 발전 설비 증설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공장만 지어 놓고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용수 공급 또한 마찬가지다. 기후변화로 물 부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산업용수 확보 계획은 사업 초기부터 철저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이번 프로젝트의 또 다른 성공 조건은 산업 생태계의 균형이다. 대기업 몇 곳이 공장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국가 경쟁력이 완성되지 않는다.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설계 기업, 연구기관, 대학, 스타트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혁신 생태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특히 지방 중소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술 개발과 금융 지원, 인력 양성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역경제도 살아나고 국가 산업의 경쟁력도 지속될 수 있다. 정치권에도 당부한다. 국가 미래를 좌우할 프로젝트를 정쟁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반대를 위한 반대도, 성과를 과장하기 위한 정치적 홍보도 모두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일이다. 여야는 사업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재원 조달과 실행 방안을 냉정하게 검증하는 생산적 경쟁을 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정치에 기대하는 책임 있는 모습이다. 국가의 미래는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치밀한 계획과 흔들림 없는 추진, 그리고 초당적인 협력이 있을 때 비로소 거대한 비전은 현실이 된다. AI와 반도체는 대한민국의 다음 50년을 책임질 산업이다. 이번 1600조 원 AI 메가프로젝트가 역사에 남을 국가 대도약의 출발점이 될 것인지, 또 하나의 거창한 청사진으로 끝날 것인지는 결국 실행력에 달려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2026-06-30 07:5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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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될 반도체, 국가 백년대계로 접근해야 한다
[경제일보] 대한민국 산업의 운명을 좌우할 또 하나의 중대한 선택이 시작됐다. 정부가 삼성과 SK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참여하는 이른바 '호남 반도체 공장+α'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국가 균형발전과 AI 대전환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수도권에 집중된 첨단 산업 구조를 분산하고 지역 경제에 새로운 성장축을 세우겠다는 구상 자체는 국가 미래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 할 만하다. 더욱이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자산인 반도체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국가 산업의 회복력을 높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작지 않다. 그러나 발표 직후 정치권은 또다시 본질보다 정쟁을 앞세우고 있다. 야당은 "직권남용", "선심성 정책"이라며 공세를 강화하고, 여당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맞서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라는 국가 생존 전략이 정치적 유불리의 계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국가 미래를 위한 투자조차 정권에 따라 찬성과 반대를 반복하는 정치 풍토에서는 어느 기업도 장기 투자를 결심하기 어렵다. 반도체 산업은 선거 주기에 맞춰 움직이는 산업이 아니다. 공장 하나를 건설하는 데만 수년이 걸리고, 인력 양성과 공급망 구축에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의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경쟁력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 각국이 국가 차원의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반도체 패권 경쟁에 사활을 거는 상황에서 우리만 정치적 소모전에 시간을 허비할 여유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장 유치라는 화려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반도체 산업은 공장만 세운다고 성공하는 산업이 결코 아니다. 초순수 용수 공급 체계와 안정적인 전력망, 대규모 변전시설, 광역 교통망, 연구개발 인프라, 전문 인력 양성 시스템이 동시에 갖춰져야 비로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반도체 생산은 단 1초의 정전에도 수천억 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산업이다. 용수 공급 역시 단 하루라도 차질이 생기면 생산 라인 전체가 멈춘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공장 유치 실적만 앞세운다면 또 하나의 '반쪽짜리 국가사업'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부가 무엇보다 서둘러야 할 일은 정치적 홍보가 아니라 인프라 구축이다. 전력망 확충 계획은 언제 완성되는지, 산업용 용수는 어떤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인지, 항만과 고속도로, 철도망은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국민 앞에 제시되어야 한다. 인허가 절차 역시 획기적으로 단축해 기업들이 불확실성 없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더 중요한 과제는 상생 생태계다. 정부가 대기업의 반도체 과실을 협력업체와 공유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은 늦었지만 바람직한 방향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경쟁력은 삼성과 SK 같은 대기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재·부품·장비를 공급하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할 때 비로소 산업 생태계가 완성된다. 일본이 오랜 기간 소재 기술을 축적했고 독일이 장비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도 수많은 강소기업이 산업의 뿌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 지역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한다면 단순한 생산기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연구소와 대학, 스타트업, 장비기업, 소재기업이 함께 모여 혁신을 창출하는 산업 생태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청년들이 지역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얻고 정착할 수 있는 교육과 주거, 문화 환경까지 함께 갖춰질 때 비로소 진정한 균형발전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은 이미 수도권 일극 체제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고 균형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경제 논리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국가 경쟁력과 지역 발전이라는 두 목표를 함께 달성하려면 철저한 경제성 분석과 현실적인 실행 계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반대를 위한 반대도, 성과를 위한 과장도 아니다. 국가 미래를 위한 초당적 협력이다. 반도체는 이제 특정 기업의 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이자 경제이며 미래 그 자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국가 전략, 지역과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공급망이 구축될 때 비로소 이번 호남 프로젝트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신화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가 그 길을 열어야지, 그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국가 백년대계를 정쟁의 제물로 삼는 순간, 그 피해는 결국 미래 세대 모두의 몫이 될 뿐이다.
2026-06-29 09: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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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참사, 이제는 축구협회를 수술할 때다
[경제일보]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끝내 조별리그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경우의 수마저 사라진 채 조기 탈락이 확정되는 순간, 국민이 느낀 것은 단순한 패배의 아쉬움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월드컵은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 무대다. 탈락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러나 준비 과정과 운영 시스템이 공정성과 전문성을 잃은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번 참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한국 축구의 구조적 병폐가 결국 폭발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뼈아프다. 패배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했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일정 부분 져야 한다. 그러나 선수들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가장 손쉬운 면피일 뿐이다. 진정한 책임은 대표팀을 구성하고 운영한 지도부와 이를 관리·감독해야 할 대한축구협회에 있다. 감독 선임 과정에서부터 불거졌던 절차적 논란은 아직도 국민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객관성과 투명성이 부족했던 선임 절차는 처음부터 많은 의문을 남겼고, 축구계 안팎에서는 '인맥 축구'와 '밀실 행정'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 우려가 결국 월드컵이라는 가장 큰 무대에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표팀 감독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다. 국가대표 축구의 철학과 미래를 책임지는 최고 사령탑이다. 그렇기에 감독 선임은 철저한 검증과 객관적 평가를 거쳐야 한다. 세계 축구는 이미 데이터 분석과 국제적 검증, 장기적인 육성 시스템을 기반으로 지도자를 선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학연과 지연, 축구계 내부의 폐쇄적 네트워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외부의 비판은 '축구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애써 외면했고, 협회는 국민에게 충분한 설명조차 하지 않았다. 불통은 결국 불신을 낳았고, 불신은 참사로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실패를 대하는 자세다. 패배 직후마다 반복되는 사과와 유감 표명, 그리고 '책임을 통감한다'는 상투적인 표현만으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책임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감독 한 사람을 교체한다고 한국 축구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한 착각이다. 감독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 아래에는 낡은 행정 시스템과 폐쇄적 의사결정 구조, 견제받지 않는 권한 집중, 그리고 국민과 단절된 협회 운영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대한축구협회는 근본적인 쇄신에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감독 선임 과정은 모든 절차를 공개하는 투명한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기술위원회 역시 특정 인맥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독립적 기구로 재편해야 한다. 행정 책임자와 기술 책임자의 권한을 명확히 구분하고, 모든 결정은 객관적 평가 기준과 기록을 통해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선수 선발 역시 공정성과 경쟁 원칙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국민은 결과보다 과정의 공정성을 먼저 본다. 축구협회의 지배구조 개혁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특정 세력이 장기간 권한을 독점하는 구조에서는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회장과 집행부에 대한 견제 장치를 강화하고, 외부 전문가와 팬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독립적인 평가 시스템도 마련해야 한다. 세계 축구 강국들은 이미 협회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다. 행정이 바뀌지 않으면 경기력도 결코 달라질 수 없다. 이번 탈락은 단순히 한 번의 월드컵 실패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국 축구를 새롭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영광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개혁, 전문성을 존중하는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의 실패 역시 같은 교훈을 던지고 있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결과도 바뀌지 않는다. 국민은 더 이상 변명도, 책임 떠넘기기도 원하지 않는다.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공정하고 투명한 한국 축구다. 이번 월드컵 참사가 한국 축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뼈아픈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대한축구협회는 지금이라도 국민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인맥과 불통의 낡은 운영 방식을 과감히 걷어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대수술이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며, 한국 축구가 다시 세계 무대에서 존중받는 길이다.
2026-06-28 15: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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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생계도 지키고 일자리도 지켜야 한다
[경제일보] 2027년 최저임금 논의가 막판으로 가고 있다. 노동계는 시급 1만2000원을 요구했다. 경영계는 동결을 제시했다. 한쪽은 생계를 말하고 다른 한쪽은 지불 능력을 말한다. 양쪽 모두 현실을 말한다. 그래서 더 어려운 문제다. 최저임금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저임금 노동자에게는 한 달 생계의 기준이고 영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에는 매달 감당해야 할 고정비다. 노동자에게는 너무 낮고 사업주에게는 이미 높다. 이 모순을 외면한 채 어느 한쪽의 구호만 앞세우면 최저임금 논의는 매년 같은 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우리는 먼저 노동자의 현실을 봐야 한다. 물가는 올랐고 주거비와 식비, 교통비와 공공요금은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최저임금으로 생활하는 사람에게 몇백 원의 인상은 숫자가 아니라 하루의 식비이고 월세의 일부이며 가족에게 보내는 돈이다. “최저”라는 말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생활을 의미한다. 최저임금이 생계의 최소선조차 지켜주지 못한다면 제도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그러나 또 다른 현실도 있다.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곳은 대기업만이 아니다. 편의점, 음식점, 동네 카페, 작은 제조업체, 지역 영세 사업장이 그 부담을 함께 진다. 매출은 제자리인데 인건비와 임대료, 전기요금, 원재료값이 동시에 오르면 버틸 수 있는 사업주는 많지 않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노동자의 소득은 늘 수 있지만 고용 시간이 줄고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논의가 해마다 정치 구호처럼 반복된다는 점이다. 노동계는 대폭 인상을 외치고 경영계는 동결을 말한다. 공익위원이 중간선을 그으면 양측은 불만을 말하고 다음 해 다시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방식을 되풀이할 것인가. 최저임금은 숫자 싸움이 아니라 한국 노동시장과 자영업 구조의 민낯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상식이다. 생계를 외면한 동결은 답이 아니다. 지불 능력을 무시한 급격한 인상도 답이 아니다. 최저임금은 올라야 한다. 다만 그 인상은 일자리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설계돼야 한다. 특히 소상공인과 영세 중소기업의 부담을 덜어줄 보완책 없이 숫자만 올리는 것은 책임 있는 정책이 아니다. 정부의 역할도 분명하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것으로 책임이 끝나지 않는다.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을 보완할 근로장려세제, 사회보험료 지원, 주거비 부담 완화, 직업훈련과 전직 지원이 함께 가야 한다. 영세 사업주에게는 임금 부담만 전가할 것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 디지털 전환, 임대료와 수수료 부담 완화 같은 구조 대책이 필요하다. 최저임금위원회 회의장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회의장 안 숫자 하나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플랫폼 노동과 도급제 노동 문제도 더는 미룰 수 없다. 배달라이더, 택배기사, 프리랜서 노동자는 전통적 임금 노동자의 틀 안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일한 시간은 흐릿하고 보수는 건당으로 책정되며 비용은 개인에게 떠넘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을 최저임금 제도 밖에 방치하면서 노동시장 보호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영역 역시 성급한 일괄 적용보다 직종별 실태와 소득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보호는 필요하지만 설계 없는 보호는 또 다른 혼란을 부른다. 기업도 할 말만 할 수는 없다. 최저임금 부담을 말하려면 노동자의 생활 현실도 함께 봐야 한다. 임금을 비용으로만 보면 노동시장은 메마른다. 노동자는 소비자이기도 하다.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이 지나치게 낮으면 내수도 약해진다. 최저임금은 기업의 부담인 동시에 경제 전체의 구매력을 지탱하는 장치다. 경영계가 동결만 외칠 것이 아니라 업종별 부담과 고용 여력을 근거로 정교한 대안을 내야 하는 이유다.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생계비를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사업장이 같은 지불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를 줄이고 특히 청년과 고령자, 취약계층의 근로 기회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노동의 가치를 지키는 일과 일자리의 문을 지키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최저임금은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지키는 최소 안전망이어야 한다. 동시에 일자리를 무너뜨리는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최저임금 하나에 생계, 복지, 자영업 대책, 플랫폼 노동 보호, 중소기업 생산성 문제를 모두 떠넘기는 관행부터 바꿔야 한다. 최저임금은 매년 결정되지만 그 결과는 한 해의 장사와 한 가정의 생활을 바꾼다. 숫자는 작아 보여도 파장은 크다. 정부와 노사는 이제 답해야 한다. 노동자의 생계를 지킬 것인가. 사업주의 지불 능력을 볼 것인가. 둘 중 하나만 고르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다. 생계도 지키고 일자리도 지키는 균형, 그것이 최저임금 논의의 기본 원칙이어야 한다.
2026-06-28 11:3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