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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맡길 수 있나"…美, K-조선에 첫 정보요청
[경제일보] 미국 정부가 한국 조선사에 함정 건조·설계 역량을 묻는 정보요청(RFI·Request for Information)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한미 조선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 논의가 투자 구상 단계를 넘어 미 국방부와 해군의 실무 검토로 옮겨가는 흐름이다. 8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미 국방부와 해군은 최근 국내 조선사들에 각각 전투함과 중형급 급유함 관련 RFI를 보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한미 조선협력 논의가 본격화한 가운데 미국 측이 RFI 형식으로 국내 조선소의 함정 역량을 공식 타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번 RFI는 최근 한미 정상 간 대화가 공개된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군함 10척을 빠르게 건조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밝힌 바 있다. 업계에서는 정상 차원의 관심 표명이 미 국방부와 해군의 실무 검토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RFI는 발주가 확정된 입찰 절차는 아니다. 미 연방조달규정(FAR)에 따르면 RFI는 정부가 당장 계약을 체결하려는 단계가 아니라 가격, 납기, 시장 정보, 수행 역량 등을 파악하기 위한 사전 절차다. 다만 미국 정부가 어떤 업체와 어떤 방식으로 협력할 수 있는지 공식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국내 특수선 양강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지난달 각사의 전투함 설계·건조 역량을 미 국방부에 회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해군의 중형급 급유함 RFI에는 두 회사에 삼성중공업까지 더해 국내 조선 3사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절차가 주목받는 것은 한미 조선협력의 무게중심이 상선과 유지·보수·정비(MRO)를 넘어 함정 건조 가능성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화오션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리조선소 인수를 통해 현지 생산 거점을 확보했다. HD현대중공업은 미국 헌팅턴 잉걸스와, 삼성중공업은 제너럴다이내믹스 나스코와 각각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조선업의 생산성과 납기 경쟁력이 필요하다. 미 회계감사원(GAO)은 미 해군 함정 건조 사업이 장기간 예산 초과와 일정 지연을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 의회예산국(CBO)도 해군과 해안경비대의 여러 조선 프로그램이 비용 증가와 납기 지연을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해군력 확대에 대응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동맹 조선소 활용 방안을 검토할 유인이 커진 셈이다. 다만 실제 수주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미국법 10 U.S.C. §8679는 미군 함정과 선체·상부구조물의 주요 구성품을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대통령이 국가안보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예외를 허용할 수 있지만, 의회 통보 등 절차가 필요하다. 업계에서는 미국 함정 협력이 당장 국내 조선소의 완성함 건조로 이어지기보다 MRO와 생산기술 협력부터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 해군 MRO는 본토로 복귀하지 않고 인도·태평양 지역에 전개된 7함대 함정을 한반도 인근에서 정비하는 개념”이라며 “한국 조선소가 일정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분야”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 조선업은 인력 부족 문제가 큰 만큼 한국의 자동화 설비와 로봇 기반 생산기술이 현지 조선소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며 “국내 조선소의 건조 슬롯도 한정돼 있어 미국 물량을 모두 한국에서 지어주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미 양국은 지난해 대미 투자 패키지 가운데 1500억 달러를 조선 협력에 투입하는 방안을 논의해왔다. 마스가 프로젝트에는 미국 조선소 신설·현대화, 조선 인력 양성, 미 해군 MRO, 공동 건조 등이 포함된다. 이번 RFI는 이 같은 협력 구상이 실제 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첫 관문이라는 점에서 국내 조선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미 양국은 지난해 대미 투자 패키지 가운데 1500억 달러를 조선 협력에 투입하는 방안을 논의해왔다. 마스가 프로젝트에는 미국 조선소 신설·현대화, 조선 인력 양성, 미 해군 MRO, 공동 건조 등이 포함된다. 이번 RFI는 이 같은 협력 구상이 실제 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첫 관문이라는 점에서 국내 조선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26-07-08 17: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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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美 안보우산…"韓, 동맹 의존 넘어 전략적 자율성 키워야"
[경제일보] 미국의 안보 역할 축소와 중·러 협력 장기화로 한국 외교·안보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미국 중심 안보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동맹에만 의존하기보다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18일 한국경제인협회 한국경제연구원과 한국사회과학회, 민주연구원이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공동 개최한 '세계질서 패러다임 변화와 한국의 과제'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 한국 외교·안보 전략의 재정립 필요성을 제기했다. 美 역할 축소에 커지는 유럽 자강론 윤성욱 충북대 교수는 미국과 유럽 간 안보 균열이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은 이란 핵합의를 외교·안보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성과 중 하나로 평가해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탈퇴하면서 갈등이 본격화됐다"고 했다. 이어 "트럼프 2기 들어서는 미국과 유럽이 디커플링(탈동조화)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기 시작했다"며 "그린란드 병합 발언과 이란 전쟁 등을 거치면서 유럽 내부에서는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안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그는 유럽의 독자 안보체제 구축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EU 조약에는 회원국이 공격받을 경우 모든 역량을 동원해 지원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실제로 누가 지휘하고 어떤 군대를 동원할지에 대한 체계는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독일의 재무장과 프랑스의 핵우산 제공 논의도 나오고 있지만 유럽 국가들 간 입장이 달라 단일한 안보 체제를 구축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폴란드와 발트 3국은 미국의 관여 확대를 원하지만 프랑스는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군사동맹 참여 자체에 부정적"이라며 "유럽 차원의 단일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라고 진단했다. 윤 교수는 향후 나토 체제가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미국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며 "미국은 재래식 무기를 중심으로 한 유럽 안보를 유럽에 맡기고 인도·태평양 지역에 역량을 집중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회원국 지위는 유지하되 실제 역할은 줄이는 '기능적 탈퇴(functional withdrawal)' 형태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앞으로 나토의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의 역할 축소와 유럽의 자강 노력"이라고 덧붙였다. 커지는 동맹 비용…"한국 역할 확대 요구 거세질 것" 이어 발표에 나선 공민석 제주대 교수는 미국의 안보전략 변화가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공 교수는 "현재 미국은 중국 견제를 최우선 과제로 둘 것인지, 아니면 미국 본토 방어를 우선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적으로 논쟁하고 있다"며 "다만 어떤 노선을 선택하더라도 동맹국들에 대한 역할과 기여 요구는 계속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능력도 있어야 하고 미국에 기여도 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 미국 편에 서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며 "중국 견제 전략 속에서 동맹국들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한미동맹은 보호는 줄어들고 비용은 커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미국의 전략 변화에 따라 한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와 안보 기여 확대 압박도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공 교수는 주한미군 역할 변화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는 "최근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활용해 주한미군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며 "중국 견제를 우선하든, 미국 본토 방어를 우선하든 한국에 대한 전략적 유연성 요구는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주한미군이 북한만을 상대하기 위한 전력인지, 아니면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를 위한 전략 자산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태평양 지역이 명시돼 있는 만큼 향후 주한미군의 역할과 범위를 둘러싼 논의가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루 위험은 커지고 편승의 이익은 줄어들고 있다"며 "한국은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 안보 협력 등에서 협상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어디까지 참여할 수 있고 어디까지는 어렵다는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 교수는 "장기적으로는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해야 한다"며 "동맹을 유지하되 군사적 의존도를 줄이고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는 방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중러 비공식 동맹 오래 간다"…한국 외교 시험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 역시 한국 외교에 새로운 변수로 제시됐다. 제성훈 한국외대 교수는 "중러 관계는 명확한 상호방위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통적 의미의 동맹으로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연루 위험을 회피하고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실질적 군사협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공식 동맹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 교수는 중러 관계에 대해 "양국은 세계 질서 변화에 대한 열망은 같지만 변화의 방식과 수단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중국은 기존 세계 질서 안에서 자신의 지분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변화에도 만족할 준비가 돼 있지만 러시아는 기존 세계 질서 자체의 해체와 재구성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은 경제력을 활용하지만 러시아는 상당 부분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다"며 "양국의 경제 협력은 상호보완성이 높지만 중국은 협력을 위한 대안이 많고 러시아는 대안이 제한돼 비대칭성이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그는 이 같은 한계에도 중러 협력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제 교수는 "러시아의 대중 의존도 심화가 양국 간 불화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방 제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대중·대러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중러 비공식 동맹은 장기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며 "러시아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더라도 중국과의 관계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고 중국도 미국과의 관계 발전을 위해 러시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 교수는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외교의 핵심 과제로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꼽았다. 그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행기의 혼란 속에서 한국에는 독자적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며 "강대국 간 관계 변화에 종속되지 않고 한국의 가치와 이익에 따라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전략적 자율성 확보가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동맹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에게 의지해야 하며, 동맹은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 교수는 외교 전략의 다변화 필요성도 제기했다. 그는 "미국 및 일본과 안보 협력을 하더라도 이념화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중국 및 러시아와 고위급·실무급 전략대화 채널을 상설화해야 한다"며 "한국의 핵심 이익을 정교하게 분리 관리하는 다각도 외교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미·이란 전쟁과 나토 변화, 한미동맹 재조정, 중러 비공식 동맹 장기화 등 서로 다른 주제가 다뤄졌지만 결론은 하나로 모였다. 기존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국이 동맹에만 기대는 방식으로는 높아지는 안보·경제 부담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되 한국의 선택지를 넓히는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방위비 분담과 주한미군 역할, 대중·대러 관계, 공급망과 경제안보 등 복합 현안이 동시에 얽히는 만큼 한국의 국익을 기준으로 사안별 대응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세미나 참석자들은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 외교가 '동맹 의존'을 넘어 '동맹 활용'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2026-06-18 15: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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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감소를 정상화라 부르기 전에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전세 감소를 두고 “정상화되는 과정”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전세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특이한 사금융이고, 사라져 가는 추세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다주택자가 집을 팔고 무주택자가 그 집을 사서 들어가면 전세 물량은 줄지만 전세 수요도 함께 줄어든다는 논리였다. 일면 맞는 말이다. 전세는 한국 주택시장의 특수한 제도다. 집주인은 보증금을 무이자로 조달하고, 세입자는 매달 월세를 내지 않는 대신 거액의 보증금을 맡긴다. 저금리 시절에는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에게 일정한 효용이 있었다. 그러나 금리가 오르고, 전세사기가 터지고, 보증금 반환 리스크가 커지면서 전세는 더 이상 예전 같은 안전한 주거 방식으로만 보기 어려워졌다. 전세 제도가 영원히 지금 형태로 유지될 것이라고 보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전세가 장기적으로 줄어드는 흐름을 인정하는 것과, 지금 세입자들이 겪는 전세난을 정상화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제도의 조용한 전환이 아니다. 전세 매물이 줄고, 월세 매물도 줄고, 전셋값은 오르고, 월세 부담은 커지고 있다. 전세가 사라지면 세입자가 자연스럽게 월세로 옮겨가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기에는 현장의 충격이 작지 않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이미 장기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학군, 역세권, 대단지 중심으로 전세 호가가 빠르게 뛰고 있다. 전세를 구하지 못한 세입자는 기존 계약을 연장하려 하고, 새로 집을 구해야 하는 사람은 더 외곽으로 밀리거나 월세 부담을 떠안는다. 이것을 정상화라고 하면 정책 당국은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세입자에게는 주거 선택지가 줄어드는 일이다. 전세가 줄어드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전세사기 이후 보증금 반환에 대한 불안이 커졌다. 집주인은 월세를 선호한다. 고금리와 대출 규제는 세입자의 전세자금 조달을 어렵게 했다. 실거주 의무와 세제 변화도 전세 공급을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서울 입주 물량 부족이 겹쳤다. 새 아파트 입주가 충분해야 전세 물량도 숨통이 트이는데, 서울의 공급 사정은 넉넉하지 않다. 공급이 부족한 곳에서 전세만 줄어들면 그 충격은 곧바로 임차인에게 간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 종료도 시장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는 세 부담을 통해 다주택자가 보유한 주택을 시장에 내놓게 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금이 무거워진다고 해서 반드시 매물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집주인은 팔고, 어떤 집주인은 버틴다. 팔린 집에 실수요자가 들어가면 전세 물량은 줄어든다. 매물이 잠기면 매매시장도 전세시장도 함께 불안해진다. 정책이 의도한 길과 시장이 실제로 움직이는 길은 자주 다르다. 전세 감소가 곧 집값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전세를 구하지 못한 세입자 중 일부는 월세로 가지 않는다. 빚을 내 집을 산다. 매달 월세를 내느니 원리금을 갚겠다는 판단을 한다. 전세난이 매수 대기 수요를 자극하면 집값 불안으로 번질 수 있다. 전세의 축소가 주거시장 안정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매매시장 과열의 또 다른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정책 언어는 시장에서 신호로 읽힌다. 대통령의 발언은 특히 그렇다. 전세 감소를 정상화라고 표현하는 순간 세입자는 정부가 전세난을 고통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집주인은 전세 축소가 정책 방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시장 참여자들은 말 한마디에도 움직인다. 부동산 시장에서 정책은 법령과 세율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표현, 장관의 설명, 정부의 분위기 자체가 가격과 심리에 영향을 준다. 전세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다. 전세대출이 집값을 밀어 올린 측면도 있었다. 보증금이 사금융처럼 주택시장에 흘러 들어가면서 갭투자를 키운 것도 사실이다. 전세가 세입자를 보호하는 제도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집값 상승기에는 집주인의 레버리지 수단으로 쓰인 경우가 많았다. 전세가 무조건 선이고 월세가 무조건 악이라는 식의 접근은 낡았다. 그러나 전세의 문제를 말하려면 대안도 함께 말해야 한다. 전세가 줄어들면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장기 공공임대인가, 안정적인 민간 장기임대인가, 월세 세액공제 확대인가, 주거급여 보완인가, 도심 공급 확대인가. 이런 장치 없이 전세 감소만 정상화라고 하면 세입자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시장의 전환은 준비된 제도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전환은 정상화가 아니라 부담의 이전이다. 월세화가 불가피하다면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는 소득·세제·금융 지원 체계가 있어야 한다. 공공임대를 늘리겠다면 입지와 품질을 함께 따져야 한다. 민간임대를 활성화하겠다면 임대료 급등을 막을 장치와 사업자가 장기간 임대주택을 공급할 유인을 같이 설계해야 한다. 공급을 늘리겠다면 인허가 숫자가 아니라 실제 입주 시점으로 말해야 한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살 집이다. 지금 서울 주택시장의 불안은 단순한 심리 문제가 아니다. 전세 물량 감소, 월세 부담 확대, 입주 물량 부족, 세제 변화, 대출 규제가 한꺼번에 얽혀 있다. 이런 때일수록 정부의 메시지는 정교해야 한다. 투기 수요를 잡겠다는 말은 필요하다. 그러나 실수요자와 세입자까지 같은 그물에 묶이면 시장의 불만은 커진다. 현금이 많은 사람은 버티고, 자금 여력이 부족한 사람은 밀려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부동산 정책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집값을 잡겠다고 대출을 조이면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도 어려워진다. 다주택자에게 세금을 높이면 일부 매물은 나오지만 일부 전세 물량은 사라진다. 전세대출을 줄이면 갭투자는 눌릴 수 있지만 세입자의 보증금 마련도 어려워진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부동산 정책은 선명한 구호보다 정밀한 조합이 중요하다. 전세가 사라져 가는 것은 긴 흐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세입자의 주거비가 급격히 늘고, 서울 외곽과 수도권으로 밀려나고, 무리한 대출 매수로 내몰린다면 그것을 정상화라고만 부를 수 없다. 정상화라면 시장 참여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여야 한다. 정상화라면 대체 제도가 있어야 한다. 정상화라면 불안이 줄어야지 커져서는 안 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전세의 퇴장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전세가 줄어드는 시장에서 세입자가 어디로 갈 수 있는지 답하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세 제도에 대한 이론적 평가가 아니라 주거 불안을 낮추는 실제 대책이다. 공급은 언제 얼마나 들어오는지, 월세 부담은 어떻게 낮출 것인지, 장기 임대시장은 어떻게 키울 것인지, 실수요자의 대출 통로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전세는 분명 완전한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전세가 사라지는 자리에 아무것도 준비돼 있지 않다면 그 공백은 고스란히 서민 주거비로 돌아간다. 전세 감소를 정상화라고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려운 일은 그 정상화의 비용을 누가 얼마나 부담하는지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은 말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정부가 시장의 불안을 정상화라는 말로 가볍게 넘긴다면, 그 대가는 정책이 아니라 국민의 주거비 고지서에 먼저 찍힐 것이다.
2026-06-12 07: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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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1년 이재명 정부, 이제 청사진은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국정 2년 차 화두는 ‘대체불가 대한민국’이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를 넘어 세계가 꼭 필요로 하는 나라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패권 경쟁, 미국발 통상 압박, 중동발 에너지 불안, 저출생과 지역소멸, 부동산 불안, 재정 부담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다. 대통령의 구호가 수사가 아니라 국정의 좌표가 되려면 이제부터는 청사진을 숫자와 실행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 1년을 민주주의 위기, 통상·안보 위기, 민생 위기를 헤쳐온 시간으로 규정했다. 국정 2년 차 목표로는 초격차 산업강국, 글로벌 외교·안보 강국, 규범과 규칙이 지켜지는 정상사회, 국민의 목숨을 살리는 정부를 제시했다.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다. 특히 경제정책의 중심을 첨단산업, 국가투자, 에너지 전환, 지역균형, 민생 안정에 두겠다는 구상은 지금 한국 경제가 피할 수 없는 과제와 맞닿아 있다. 문제는 우선순위다. 모든 것을 동시에 하겠다는 정부는 대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정부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성장의 엔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반도체, AI, 조선, 방산, 배터리, 원전, 전력망, 바이오 등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에 자본과 인재와 규제를 집중해야 한다. 초격차 산업강국은 보조금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세제, 전력과 용수, 인허가 속도, 노동 유연성, 연구개발 인력 공급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이재명 정부는 중도 실용의 길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려면 먼저 성장해야 한다. 기업을 압박해 단기 성과를 끌어내는 방식으로는 미래산업 투자가 지속될 수 없다. 반대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태도도 무책임하다. 정부는 길을 내고, 민간은 달리게 해야 한다. 국가는 전력망과 항만, 데이터센터, 첨단산단,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과감히 투자하되, 민간의 의사결정을 정치 논리로 흔들어서는 안 된다. 민생경제도 마찬가지다. 고물가와 고금리의 상흔은 아직 가계에 남아 있다. 자영업자는 매출보다 비용을 먼저 걱정하고 청년은 일자리보다 주거비에 먼저 눌린다. 이럴 때 정부가 재정을 써야 할 곳은 분명하다. 전 국민을 향한 일회성 지원보다 취약계층, 영세 자영업자, 주거 약자, 저출생 대응, 직업 전환 교육에 정밀하게 써야 한다. 재정은 따뜻해야 하지만 동시에 엄격해야 한다. 빚으로 인기를 사는 정책은 결국 다음 세대의 세금으로 돌아온다. 부동산 정책은 더 냉정해야 한다. 시장을 향해 ‘투기와 전쟁’만 외치면 공급은 얼어붙고, 공급만 외치면 불평등은 커진다. 서울과 수도권의 주거 불안, 지방의 빈집과 소멸 위기는 다른 처방을 요구한다. 핵심은 예측 가능성이다. 세제와 대출, 공급 정책이 정권의 정치 일정에 따라 흔들리면 시장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정부가 시장을 이기려 하기보다 시장이 합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규칙을 세워야 한다. 금융·자본시장 개혁도 국정 2년 차의 중요한 시험대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이려면 말뿐인 밸류업이 아니라 지배구조 개선, 주주권 보호, 불공정거래 엄단, 장기투자 세제 지원이 필요하다. 주가조작과 부동산 범죄를 뿌리 뽑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옳다. 다만 처벌 강화만으로 시장 신뢰가 생기지는 않는다. 예측 가능한 감독, 일관된 법 집행, 기업의 자율과 책임을 함께 세워야 한다. 정치의 정상화도 경제정책의 일부다. 기업은 금리와 환율만 보지 않는다. 정권의 말, 국회의 분위기, 규제기관의 태도, 노사관계의 방향을 함께 본다. 국정이 매일 전쟁처럼 흘러가면 투자는 늦춰진다. 야당과 언론을 설득하지 못하는 경제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대통령이 말한 ‘정상사회’는 법과 원칙이 상대 진영에만 적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내 편에게도 같은 잣대가 적용되는 사회여야 한다. 동양 고전 <논어>에는 “민무신불립”, 곧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취임 1년을 넘긴 정부에 필요한 것도 결국 신뢰다. 국민은 더 이상 거창한 청사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물가가 안정되는지, 집값이 예측 가능한지, 일자리가 생기는지, 기업이 투자하는지,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지를 본다. 국정의 성패는 연설문이 아니라 생활의 체감으로 결정된다. 이재명 정부는 이제 출범기의 명분을 넘어 집권 2년 차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대체불가 대한민국’은 좋은 구호다. 그러나 구호는 출발점일 뿐이다. 초격차 산업은 규제개혁과 인재정책으로, 민생 안정은 정밀한 재정과 물가 관리로, 자본시장 개혁은 공정한 룰과 주주 보호로, 정상사회는 법치와 통합의 실천으로 증명돼야 한다. 대통령에게 남은 4년은 길어 보이지만 국정 시간표로는 짧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말이 아니라 더 정확한 실행이다. 이재명 정부가 성공하려면 성장과 분배, 시장과 국가, 개혁과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대체불가의 잠재력을 이미 갖고 있다. 정부의 책무는 그 잠재력을 정치의 구호로 소비하지 않고 국민의 삶과 기업의 투자, 국가의 경쟁력으로 바꾸는 일이다.
2026-06-10 17: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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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전 국토 효율 활용"…부동산 범죄 엄단 예고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국토 활용과 부동산 시장 질서 확립을 집권 2년 차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와 반도체 초과 세수 활용 방침을 밝히면서 향후 지역 개발과 주택 공급, 부동산 시장 안정 정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예상된다. 이 대통령은 8일 오전 10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취임 1주년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세계에서 전 국토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나라”를 국가 비전 중 하나로 제시했다. 산업 대전환과 지역 소멸, 양극화 문제를 함께 언급하며 성장의 과실이 특정 기업과 특정 지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공동체 전체의 역량으로 일군 성과와 기회가 중소 벤처기업에까지 흐르고 우리 국토, 모든 분야에 골고루 퍼져 모든 국민이 삶 속에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건설부동산 업계에서는 이 발언을 향후 국토 균형발전과 지역 거점 개발, 산업 기반 확충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와 AI 등 첨단산업 투자가 특정 지역에 집중될 경우 주거 수요와 교통망, 산업단지 배후도시 조성 문제가 함께 부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조만간 ‘성장 전략의 대전환’을 이뤄낼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첨단산업 투자와 지역 개발, 국토 활용 전략이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대규모 산업 투자는 도로와 철도, 전력망, 용수, 주거단지 등 기반시설 수요를 동반한다. 건설업계가 이번 발표를 주목하는 이유다. 특히 이 대통령이 반도체로 인한 초과 세수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점도 주목된다. 반도체 산업은 경기 남부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산업벨트와 배후 주거지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다. 초과 세수가 산업 기반시설이나 지역 인프라 확충에 투입될 경우 건설·부동산 시장에도 파급효과가 예상된다. 부동산 시장 질서에 대한 강한 메시지도 나왔다. 이 대통령은 “규칙을 어기면 이득을 보고 반칙과 편법으로 성공하는 나라에서 어떤 혁신과 도전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며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주가조작, 부동산 범죄 등 민생범죄는 철저히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부동산 투기와 허위 거래, 시세 조작, 불법 전매, 전세사기 등 시장 신뢰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단속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주택 공급 확대와 시장 안정 정책을 병행하더라도 불법·편법 거래가 방치되면 정책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건설부동산 시장에서는 공급 확대와 시장 질서 확립이 동시에 추진될 가능성이 커졌다.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가 산업 거점 조성과 기반시설 확충으로 이어질 경우 건설업계에는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 반면 부동산 범죄 엄단 기조가 강화되면 분양시장과 정비사업, 임대차 시장 전반에서 거래 투명성 요구가 높아질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기준을 “국민의 삶”이라고 강조했다. 부동산은 국민 생활과 가장 밀접한 민생 영역이다. 주거비 부담과 지역 불균형, 산업단지 배후 주거 수요, 부동산 범죄 피해가 모두 국민 삶과 연결돼 있다.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나온 국토 활용과 부동산 시장 질서 메시지가 향후 구체적인 정책으로 어떻게 이어질지가 관건이다. 업계에서는 향후 공개될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의 세부 내용에 따라 건설부동산 시장의 관심이 지역별로 갈릴 것으로 보고 있다. 첨단산업 거점과 교통망 확충, 배후 주거지 조성 계획이 포함될 경우 관련 지역의 개발 기대감이 커질 수 있다. 다만 부동산 범죄 엄단 기조가 함께 제시된 만큼 투기적 수요에 대해서는 강한 관리가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대통령의 취임 1주년 부동산 메시지는 국토 활용과 시장 질서라는 두 축으로 요약된다. 산업 성장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공간 전략을 마련하되 부동산 시장의 반칙과 편법은 강하게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와 반도체 초과 세수 활용 방안이 구체화되면 건설부동산 시장도 정책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설 전망이다.
2026-06-08 10: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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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막고 세금 올리고 규제 묶고… 카드 다 꺼냈는데 서울 집값은 참여정부 이후 최대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 취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수도권 아파트 가격 오름폭은 2000년대 이후 역대 정권 집권 첫 1년 기준으로 노무현 참여정부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대출을 막았다.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규제지역으로 묶었다. 세금 중과를 재시행했다. 통상적인 부동산 정책 수단을 집권 첫해 안에 사실상 모두 꺼냈다. 그런데도 시장은 굴하지 않았다. 수치 자체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집값이 정책 변수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부동산 시장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놓는다고 해서 정책 선택의 책임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수치에는 불편한 선례가 있다. 참여정부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참여정부의 기시감 참여정부(2003~2008)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묘한 데자뷔를 느낄 것이다. 당시에도 부동산 불로소득 근절이라는 강한 이념적 지향을 가진 정권이 들어섰고, 10·29 대책(2003년)과 8·31 대책(2005년) 등 굵직한 수요 억제 패키지가 잇달았다. 종합부동산세가 도입된 것도 그 시기였다. 그 모든 조치에도 서울 강남 아파트값은 참여정부 5년 내내 상승 곡선을 그었다. 임기 종료 시점까지 서울 아파트 가격은 집권 초 대비 두 배 가까이 오른 지역이 적지 않았다. 그 정치적 상처는 2007년 대선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정치적 유산과 맥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을 차단하겠다는 소신은 취임 이전부터 공개적으로 밝혀온 것이다.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참여정부의 문법을 여러 지점에서 닮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소신이 정책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1년치 데이터와 함께 들여다보면, 어떤 카드가 어떤 순서로 소진됐는지, 그리고 시장은 그때마다 어떻게 응답했는지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물려받은 조건 카드를 꺼내기 전에 판세부터 따져야 한다. 윤석열 정부 임기 중 주택 인허가와 착공 물량이 예년에 비해 크게 부진했고, 그 여파로 2025~2026년 서울·수도권의 입주 물량 감소가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공급 절벽 우려는 정권 교체 훨씬 전부터 시장 가격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결정적 선행 변수가 더해졌다. 새 정부 출범 직전 강남3구와 용산구에 대한 토지거래허가구역이 해제됐다. 이 결정은 수요 억제의 빗장이 일부 풀린다는 신호로 시장에 읽혔고, 집값은 정권 교체와 함께 상승 기대가 더욱 커지는 방향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새 정부 입장에서는 준비 기간도, 인수위도 없는 상태에서 이 상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판은 기울어진 채로 게임이 시작됐다. 첫 번째 카드: 대출을 막다 이 대통령은 취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카드를 꺼냈다. 가계부채 관리방안이었다. 정책 기반을 다지는 데 통상 수개월이 소요되는 새 정부 초기 일정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빠른 행보였다. 다주택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을 전면 금지하고 대출 최대 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했으며, 갭투자 차단을 위해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도 봉쇄했다.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 및 관련 감독 규정을 동원한 6·27 대책은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빈틈 없이 짜인 대출 억제 패키지였다. 시장의 응답은 달랐다. 6·27 대책 이후에도 서울 주요 지역 아파트 호가는 내려오지 않았다. 이미 수억원대 현금을 보유한 고자산층의 매수를 대출 규제가 막기엔 역부족이라는 반응이 시장에서 나왔다. 강남권 일부 단지에서는 오히려 희소성이 부각되며 신고가 거래가 이어졌다. 첫 번째 카드는 시장에 긁힌 자국을 남겼지만,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다. 두 번째 카드: 공급을 내걸다 대출 규제가 시장에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자 두 달여 뒤 정부는 두 번째 카드를 꺼냈다. 9·7 주택 공급 확대방안에서 2030년까지 수도권에 총 135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수요 억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공급을 병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읽혔고, 방향성 자체는 비판받기 어려운 전환이었다. 그러나 대책의 속살을 들여다본 시장 참여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공공 주도의 고밀 개발과 도심 복합사업 중심의 공급 방식이 문재인 정부 시절 이미 내놓았다가 시장의 외면을 받은 방안들과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수요자들이 원하는 것은 강남·마포·용산 같은 선호 입지의 아파트다. 공공분양이나 도심 복합사업을 통해 공급되는 주거 상품이 그 수요를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았다. 9·7 대책 발표 이후에도 서울 주요 지역 호가는 내려오지 않았고,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은 대책 전후 수 주간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카드 역시 시장을 움직이지 못했다. 세 번째 카드: 규제로 묶다 공급 계획이 시장에 먹히지 않자 정부는 세 번째 카드를 꺼냈다. 서울 전역과 과천·광명 등 12개 인접 지역을 조정대상지역·투기과열지구·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일괄 묶는 전방위 규제 지정이었다. 이미 6억원으로 제한된 주담대 한도 위에 추가 상한까지 얹었다. 주택 가격이 25억원을 초과할 경우 대출 상한을 2억원으로, 15억~25억원 구간은 4억원으로 더 낮췄다. 고가 주택을 대출에 기대어 매수하는 경로를 사실상 봉쇄하는 설계였다. 출범 후 네 달여 만에 초강도 대출 규제, 공급 계획 발표, 규제지역 전방위 지정이라는 세 가지 카드를 모두 소진한 셈이었다. 참여정부가 집권 2~3년차에 걸쳐 순차적으로 꺼냈던 카드들을 이재명 정부는 집권 첫해 안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네 번째 카드: 세금을 올리다 수요 억제 대책들이 잇따르는 가운데 정부는 역대 정권이 번번이 미뤄온 숙제 하나를 정면으로 끌어안았다.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조치의 재시행이다. 「소득세법」 제104조에 근거한 이 조치는 윤석열 정부에서 4년 연속 1년 단위 시행령 유예라는 방식으로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 법률에 명시된 세율 조항이 행정부 시행령을 통해 해마다 유예되는 이 방식은 조세 법률주의의 원칙과 긴장 관계에 있다는 지적이 법조계 일부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추가 유예는 없다"고 못 박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 법 규정의 본래적 효력 회복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다. 역대 정권이 기득권의 저항 앞에 번번이 물러섰던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양도세 중과 시행의 시장 효과는 단방향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다주택자들이 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매도를 미루고 보유를 이어가거나 매매 대신 임대로 전환할 경우, 매매 시장의 매물 감소와 전월세 시장의 물량 축소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다. 네 번째 카드가 불러온 부작용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완: 1·29 공급 신속화 방안 9·7 대책에 대해 "공급 청사진이 추상적이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정부는 올해 1월 후속 공급 계획을 내놨다. 1·29 도심 주택 공급 신속화 방안은 용산국제업무지구, 과천 경마장 부지, 군부대 이전지, 태릉CC 등 구체적 사업지와 공급 시기를 명시해 전작의 추상성을 상당 부분 보완했다. 공급 계획으로서의 구체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실행 경로는 여전히 검증이 필요하다. 사업지 대부분이 지방자치단체의 협조와 주민 동의를 전제로 한다. 태릉CC는 과거 여러 정부에서 개발 구상이 제기됐다가 주민 반발과 환경 논란으로 번번이 제동이 걸렸던 전례가 있다. 이해당사자와의 충분한 사전 교감 없이 청사진부터 공개하는 방식이 9·7 대책에 이어 1·29 대책에서도 반복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책의 속도와 설득의 절차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결국 실행 결과로 판가름 날 것이다. 임대차 시장에 켜진 경고등 네 장의 카드가 순서대로 소진되는 동안, 압력은 엉뚱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매매 수요를 억누를수록 임대차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이다. 여기에 토지거래허가구역 내 실거주 의무 강화로 임대 매물 자체가 줄어드는 압력까지 겹쳤다. 양도세 중과 재시행으로 매물을 거둬들인 다주택자들이 임대를 통해 수익을 유지하려 할 경우에도 시장에는 반대 효과가 작용한다. 최근 서울 강남권과 마포·용산 일대에서 전세 물량이 줄고 전셋값이 가파르게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계 대부분에게 전·월세 부담은 매매 가격보다 훨씬 즉각적이고 절박한 생계 문제다. 강남 아파트 가격이 오른다는 뉴스가 체감되려면 상당한 자산이 있어야 하지만, 전세금이 수천만원 오르거나 월세로 전환되는 것은 중산층 세입자에게 당장의 위기로 작용한다. 정책이 막아선 매매 시장의 압력이 임대차 시장으로 고스란히 흘러드는 형국이다. 그리고 이 흐름의 이면에는 정책 결정 방식 자체의 문제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비판 부동산 정책의 내용 못지않게 결정 방식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전문가 집단 사이에 적지 않다. 정책의 방향이 대통령 수준에서 사실상 확정된 뒤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한 부동산 정책 전문가는 "양도세 중과 재시행이나 토지거래허가구역 보완책을 마련하는 과정을 보면 전문가 집단의 검토나 이해당사자 협의가 사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며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의사결정 방식이 누적되면 결국 시장은 정책보다 빨리 움직인다"고 말했다. 반론도 있다. 부동산 정책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충분한 협의를 거치다 보면 결국 기득권의 저항에 밀려 무력화되는 일이 역대 정부에서 반복됐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종합부동산세가 초기 설계와 달리 헌법재판소 결정과 정치적 타협 과정을 거치며 점차 약화된 사례는 이 논거를 뒷받침한다.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결국 후퇴한다는 학습 효과가 현 정부 내에 축적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쪽이 더 맞는 진단인지는 앞으로 나올 정책의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남은 변수들 네 장의 카드를 소진한 이재명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시장을 움직일 수단은 사실상 세제 개편과 공급 입법으로 좁아졌다. 올 하반기 나올 세제 개편안에서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를 어떤 방향으로 손보느냐에 따라 시장 반응이 달라질 것이다. 세율 인상이나 과세 기준 강화 쪽으로 무게가 실릴 경우 투기 억제 신호로 읽히겠지만, 동시에 매물 잠김과 임대차 시장 압박이 심화되는 부작용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 기준금리 인상이 속도를 높일 경우 가계 부채 부담 증가와 함께 매수 심리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금리 인상은 전세 대출 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임대차 시장의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을 지닌다. 1·29 대책에 포함된 공급 사업들이 현실화되려면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을 비롯한 관련 입법 과제가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국회의 정치 지형이 협력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공급 계획의 실현 속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참여정부는 가용한 카드를 모두 꺼냈지만 끝내 서울 집값을 잡지 못했고, 그 대가를 임기 말 민심으로 치렀다. 이재명 정부는 그 카드들을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강하게 썼다. 참여정부와 같은 결말을 맞을 것인지, 아니면 세제와 입법이라는 마지막 수단으로 다른 결말을 써낼 것인지 그 답을 쓸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
2026-06-05 15: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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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승 아니면 책임론…6·3 선거 뒤 여야 모두 '권력 재편' 소용돌이
[경제일보] 6·3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단순히 광역단체장과 국회의원 14명을 뽑는 선거에 그치지 않는다. 선거 결과에 따라 여야 지도부의 명운, 이재명 정부 2기 내각 구상, 차기 총리 인선, 보수 야권의 권력 질서까지 한꺼번에 흔들 수 있는 정치적 분수령이다. 특히 이번 재보선은 ‘미니 총선’ 성격을 띤다. 14개 국회의원 재·보선 지역 가운데 대구 달성을 제외한 13곳이 여당 의원 지역구였다는 점에서,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방어전 성격이 강하다. 민주당은 선거 전 자체 판세에서 9곳 우세, 5곳 경합으로 분류했고, 국민의힘은 1곳 우세, 2곳 초경합, 2곳 경합, 9곳 열세로 전망했다. 경기 평택을과 부산 북갑 등 격전지 결과가 여야 대표의 정치적 운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민주당, ‘압승’ 못 하면 정청래 책임론 불가피 민주당 입장에서 이번 선거의 기준선은 낮지 않다. 집권 초반 지방선거라는 점, 야권이 아직 재정비 국면이라는 점, 사전투표율이 역대 지방선거 최고치인 23.51%를 기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당 내부 기대치는 ‘선전’이 아니라 ‘압승’에 가깝다. 문제는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다. 전북에서 민주당 후보가 무소속 또는 야권 후보에게 밀리거나, 재보선에서 기존 의석을 상당수 지키지 못할 경우 정청래 대표 책임론은 피하기 어렵다. 전북은 민주당의 상징적 기반이고, 재보선 13곳은 사실상 여당 방어선이다. 이 두 전선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이길 선거를 못 이겼다”는 평가가 당내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정 대표에게 더 부담스러운 대목은 선거 패배의 원인이 단순한 지역 변수로만 설명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선거 기간 민주당은 지역 공약과 생활정치보다 중앙정치 이슈, 여야 대표 간 공방,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에 더 많이 묶였다. 압승이 좌절될 경우 당내 비주류와 친문·비명계는 “지도부의 강경 노선이 중도층 확장을 막았다”고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민주당은 조기 전당대회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전환론, 지도부 일부 사퇴론 등으로 빠르게 흔들릴 수 있다. 정 대표가 버티더라도 당권 경쟁은 조기에 달아오를 공산이 크다. 이미 김민석 국무총리가 지방선거 직후 사의를 표명하고 8월 전당대회 출마를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여권 안팎에서 새어나오고 있다. 민주당 내부 권력 재편은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가시권에 들어와 있음을 방증하는 셈이다. ◆전북·재보선은 ‘정청래 리더십’의 바로미터 민주당 책임론의 핵심 지점은 전북과 국회의원 재보선이다. 전북은 민주당이 가장 안정적으로 이겨야 하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접전 또는 패배가 현실화하면 단순한 지역 민심 이반을 넘어 ‘민주당 본진 균열’로 해석될 수 있다. 중앙당 공천과 지도부 선거 전략, 지역 민심 관리 실패가 한꺼번에 도마 위에 오를 전망이다. 국회의원 재보선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기존 의석을 지켜내지 못하면 국회 운영 주도권은 물론 이재명 정부의 입법 동력에도 부담이 생긴다. 재보선에서 한두 곳의 상징적 패배가 발생하면 야당은 곧바로 민심의 경고를 앞세울 것이고, 민주당 내부에서는 ‘정권 초반 경고등을 지도부가 오판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특히 부산 북갑과 경기 평택을은 여야 모두가 주목하는 지역이다. 부산 북갑에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당선될 경우, 민주당에는 부산 확장 전략 실패라는 부담이 생기고 국힘에는 한 전 대표의 정치적 복귀라는 또 다른 변수가 열린다. 평택을 역시 수도권 민심의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 선거가 될 수 있다. ◆이재명 정부, 선거 뒤 개각으로 국정 쇄신 나설 듯 선거 결과가 여당에 불리하거나 기대에 못 미칠 경우, 이재명 정부는 당 지도부와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국정 쇄신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 취임 1주년과 지방선거 직후라는 시점은 개각 명분을 만들기 쉽다. 국정 동력을 새로 확보하고, 민생·경제 중심으로 국정 메시지를 재정비하려면 내각 개편이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다. 정치권에서는 김민석 총리 후임으로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 김용범 정책라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 등 여권 핵심 인사들이 거론되고 있다. 김 총리가 지방선거 뒤 사의를 표명하고 당권 도전에 나설 경우 총리 교체와 내각 개편, 청와대 참모진 개편이 함께 맞물릴 수 있다는 관측이다. 또 여권 일각에서는 우원식 국회의장, 홍준표 전 대구시장,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 등도 ‘통합형’ 또는 ‘정무형’ 총리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총리 인선의 성격도 선거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민주당이 압승하면 친정체제 강화형 총리가 유력해진다. 반대로 압승에 실패하거나 전북·재보선에서 충격을 받을 경우에는 중도 확장형, 협치형, 지역 통합형 총리 카드가 부상할 수 있다. 국정 쇄신의 핵심은 사람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경제·민생·부동산·금융정책의 방향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조정하느냐가 관건이다. ◆국민의힘, 참패 땐 장동혁 체제 붕괴 가능성 국민의힘도 선거 뒤 후폭풍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보수 텃밭인 대구를 내주거나, 부산·울산·경남에서 기대 이하 성적표를 받을 경우 장동혁 대표 체제는 즉각적인 책임론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야당은 원래 지방선거에서 정권 견제론을 앞세워 반등의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지도부가 보수 재건의 구심점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불가피하다. 국힘의 고민은 단순히 승패가 아니다. 패배 이후 누가 당을 수습하느냐가 더 큰 문제다. 장 대표가 물러날 경우 당은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거나 조기 전당대회 국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때 친윤계, 비윤계, 개혁보수, 영남 중진, 수도권 소장파가 다시 당권을 놓고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더 복잡한 변수는 한동훈 전 대표다. 부산 북갑에서 한 전 대표가 당선될 경우, 국힘 내부 권력 지형은 단숨에 흔들릴 수 있다. 선거 전체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하면 한 전 대표는 ‘복귀 명분’을 얻는다. 반대로 당이 비교적 선전하더라도 한 전 대표가 원내에 입성하면 장동혁 체제와 차기 당권 구도를 둘러싼 긴장이 커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선전해도 내분, 참패해도 내분이라는 역설적 상황인 것이다. 국힘으로서는 대구·부산·울산·경남의 성적이 치명적이다. 대구를 내준다면 보수 정당의 뿌리가 흔들렸다는 상징성이 크다. 부산에서 한동훈 변수가 부상하고, 울산·경남에서 민주당이 선전한다면 영남 전체가 더 이상 보수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이 경우 국민의힘은 단순한 지도부 교체를 넘어 노선 재정립 논쟁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선거 뒤 정국, ‘민생’보다 ‘권력 재편’ 빨려들 수도 이번 선거의 역설은 지방선거임에도 결과 해석은 중앙정치로 빨려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유권자는 지역 일꾼을 뽑지만, 정치권은 선거 결과를 당권·대권·내각·노선 경쟁의 신호로 읽을 것이다. 민주당은 정청래 체제 유지 여부와 이재명 정부 2기 개각이 맞물리고, 국민의힘은 장동혁 체제 존속 여부와 한동훈 전 대표의 복귀가 충돌한다. 선거 뒤 정국은 세 갈래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먼저 민주당이 광역단체장과 재보선에서 뚜렷한 우위를 확보하면 정청래 대표는 리더십을 방어하고, 이재명 정부는 개각을 통해 국정 드라이브를 강화할 수 있다. 또 민주당이 이겼지만 전북·재보선에서 상처를 입으면 여당 내부 책임론과 내각 쇄신론이 동시에 분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민의힘이 대구 등 텃밭을 잃고 참패하면 보수 재편 논의가 본격화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여야의 정청래, 장동혁 대표는 선거에 이기더라도 전북, 대구, 한동훈 전 대표 승리 등 변수에 따라 대표직을 내려놔야 할 상황에 몰릴 수 있다”며 “상처뿐인 승리라는 역설이 통하는 게 이번 6·3선거다”라고 말했다.
2026-06-03 15: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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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동북아 격랑(激浪), 안동 한일회담이 전략적 공조의 이정표 되어야
[경제일보] 국제 정세의 지각변동이 가히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가파르다. 중동발(發) 전운이 짙어지며 미·이란 간의 무력 충돌이 세계 경제와 글로벌 공급망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형국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중 정상이 전격적인 회담을 통해 자국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어제의 맹방(盟방)과 동맹이라는 철석같던 신뢰마저 자국의 실리 앞에서는 언제든 형해화(形骸化)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엄중한 현실이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외교 안보 지형 속에서, 우리 정부에 요구되는 책략은 유연하면서도 국익 중심의 단단한 중심추를 잡는 일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에 맞춰 매일 새로운 외교적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할 만큼 다변화된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격랑 속에서 오늘 이재명 대통령이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머리를 맞댄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여섯 번째이자, 셔틀외교의 모멘텀을 이어가는 이번 정상회담에 국내외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안동 회담은 단순한 외교적 연례행사를 넘어, 동북아의 지정학적 위기를 관리하고 한일 간의 ‘전략적 협력 관계’를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엄중한 책무를 안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역사적 앙금으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던 양국이지만, 지금의 복합 위기 상황은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있을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미·중 패권 경쟁의 틈바구니와 중동 전쟁의 여파 속에서 한일 양국이 긴밀하게 공조하지 않는다면, 동북아의 안보 공백과 경제적 타격은 고스란히 양국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정부 발표대로 이번 회담에서 장기화하는 중동 전쟁 관련 현안과 자유 통상 질서 확립, 동북아 안전 보장 및 공급망 위기 타개책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경제와 안보가 분리될 수 없는 ‘경제 안보’의 시대에, 첨단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과 에너지 안보 확보를 위한 한일 간의 전략적 스크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나아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안보 협력의 틀을 더욱 공고히 다져야 한다. 주목할 점은 이번 회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한국의 선비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열린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 부자가 찾았던 외교적 명소에서, 양국 정상이 안동의 전통 불꽃놀이인 ‘선유줄불놀이’를 관람하고 전통 음식을 나누며 신뢰를 쌓는 장면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 양국의 화합을 상징하는 안동소주와 나라현의 사케가 만찬 테이블에 함께 오르듯, 외교적 갈등의 실타래도 이처럼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에서 풀리기 시작하는 법이다. 다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국익을 위한 냉철한 손익계산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일본 정부 역시 이번 회담을 계기로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는 데 보다 전향적이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다. 상호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는 전략적 공조는 모래 위에 세운 성과 같다. 우리 정부 또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하되, 국익의 마지노선을 확실히 지키는 균형 잡힌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전통문화의 온기가 흐르는 안동에서 열리는 이번 정상회담이, 한일 양국이 당면한 글로벌 위기를 함께 돌파하는 실질적이고 전략적인 협력의 대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거친 파고가 몰아치는 국제 사회에서 한일 관계의 안정이 곧 대한민국 안보와 경제의 강력한 방파제가 될 수 있음을, 양국 정상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
2026-05-19 09: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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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대통령 계승' 굳히기냐, 심왕섭 '생활정치' 반격이냐
[경제일보] 6·3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김남준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심왕섭 국민의힘 후보의 양강 대결로 짜였다. 김 후보는 이재명 대통령을 성남시장·경기지사·대통령 시절 가까이에서 보좌한 전 청와대 대변인이다. 심 후보는 세림조경건설 대표이사이자 환경조경발전재단 이사장으로, 국민의힘이 계양을에 단수 추천한 지역 기반형 후보로 분류된다. 이번 선거의 질문은 분명하다. 계양을 유권자가 ‘이재명 대통령의 옛 지역구를 누가 책임 있게 이어갈 것인가’에 방점을 찍을 것이냐, 아니면 ‘중앙정치의 상징보다 지역을 아는 생활 일꾼이 필요하다’는 견제론에 힘을 실을 것이냐다. 국민의힘은 지난 1일 심 후보를 계양을 후보로 단수 추천했고, 민주당은 앞서 김남준 전 청와대 대변인을 전략공천했다. 여론조사 흐름은 ‘김남준 우세, 심왕섭 추격 과제’ 현재 공개된 최신 여론조사 흐름은 김 후보에게 크게 유리하다. 여론조사꽃이 5월 4~5일 인천 계양구을 선거구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5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ARS 조사에서 김남준 후보는 58.7%, 심왕섭 후보는 19.4%를 기록했다. 두 후보 간 격차는 39.3%포인트로 오차범위 밖이다. ‘그 외 다른 인물’은 4.9%, ‘투표할 인물 없음’은 9.9%였다. 같은 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더불어민주당 61.2%, 국민의힘 22.7%로 나타났다. 이재명 대통령 국정운영 긍정 평가는 69.3%, 부정 평가는 27.2%였다. 이 조사는 통신 3사 무선 가상번호를 활용한 ARS 방식으로 진행됐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포인트, 응답률은 6.5%다. 성별·연령대별·권역별 비례할당 후 무작위 추출했으며, 2026년 4월 말 행정안전부 인구 기준 셀가중을 적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세부 지표도 김 후보 쪽으로 기울어 있다. 권역별로 김 후보는 1권역인 계양1동·계양2동·계양3동·계산2동에서 58.0%, 2권역인 계산4동·작전서운동에서 60.0%를 기록했다. 연령별로도 70세 이상 67.8%, 40대 66.1%, 50대 63.8%, 60대 59.5%로 전 연령대에서 우세했다. 중도층에서는 김 후보 63.6%, 심 후보 15.4%로 격차가 더 컸다. 다만 이 수치만으로 승부가 끝났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보궐선거는 통상 투표율이 낮고 조직 동원력과 막판 이슈의 영향이 크다. 계양을은 민주당 강세 지역으로 꼽힌다. 2024년 총선에서 이재명 당시 민주당 후보는 54.12%를 얻어 국민의힘 원희룡 후보 45.45%를 8.67%포인트 차로 눌렀다. 선관위에 따르면 계양을에서 최근 20년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8차례 가운데 민주당이 7승을 거뒀다. 김남준, 이 대통령과 연결성 ‘강점’…지역구 계승 논란 ‘과제’ 김 후보의 가장 큰 강점은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치적 연결성이다. 그는 2014년 이 대통령의 성남시장 시절 대변인, 경기도정 시절 언론비서관,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다. 김 후보는 출마 이유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의 약속을 인천 계양에서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이 연결성은 계양을에서 강력한 선거 자산이다. 계양을은 이 대통령의 전 지역구이자, 민주당 지지세가 두터운 곳이다. 김 후보가 ‘대통령의 국정 기조를 가장 잘 이해하는 후보’라는 이미지를 굳히면 지역 현안을 중앙정부 정책·국회 예산·인천시 행정과 연결하는 ‘집권 여당 프리미엄’을 앞세울 수 있다. 김 후보 캠프가 내세우는 핵심 메시지도 △계양테크노밸리 자족기능 확충 △대기업 유치 △철도 중심 광역교통망 구축 △원도심 정비 △고도제한 완화 등 지역 현안을 국정 과제와 접목하는 데 맞춰져 있다. 그러나 약점도 있다. 김 후보는 지역에서 오래 선출직을 해온 정치인은 아니다. ‘대통령 측근’, ‘전략공천’, ‘지역구 계승’이라는 이미지는 장점이자 동시에 부담이다. 김 후보 자신도 대통령의 지역구 물려받기 시각에 대해 “그런 의구심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며 “결국 실적과 성과로 극복해야 한다”고 평소 강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 후보의 기회 요인은 민주당의 조직력과 정권 초반 지지율이다. 여론조사상 민주당 지지도와 대통령 국정 긍정 평가가 높고, 김 후보 개소식에는 인천 지역 민주당 의원들과 박찬대 인천시장 후보 등이 참석하며 ‘원팀’ 구도를 부각했다. 위협 요인은 ‘큰 구도’에 갇히는 것이다. 계양을 유권자가 원하는 것은 대통령과의 친소 관계가 아니라 교통, 일자리, 주거, 교육, 상권, 노후 인프라 개선이다. 한 민주당 당원은 “김 후보가 이재명 대통령의 약속을 말하는 데서 그치면 심 후보는 “계양은 계양 주민의 삶을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공세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심왕섭, 지역 기반·환경 전문성 ‘자산’…낮은 인지도 ‘부담’ 심 후보의 강점은 지역 기반형 이미지다. 국민의힘은 심 후보를 계양을 후보로 단수 추천하면서 그를 세림조경건설 대표이사, 환경조경발전재단 이사장 출신으로 소개했다. 그는 지역구인 계양초등학교를 나왔다. 심 후보에게 가장 필요한 구도는 ‘정권 대리전’이 아니라 ‘생활정치 경쟁’이다. 계양을은 계양테크노밸리, 3기 신도시, 광역교통망, 공항 주변 규제, 원도심 정비 등 개발 현안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조경·건설·환경 분야 경험을 주거환경 개선, 공원·녹지 확충, 도시 재정비, 생활 인프라 개선 공약으로 연결한다면 차별화 여지는 있다고 지역 정가에선 조언한다. 그러나 약점은 뚜렷하다. 첫 공개 여론조사에서 20%에 미치지 못한 지지율은 심 후보에게 가장 큰 부담이다. 특히 중도층에서 김 후보에게 크게 뒤진 점은 단순한 보수 결집만으로는 승부를 뒤집기 어렵다는 신호다. 국민의힘 지지율도 같은 조사에서 22.7%에 머물렀다. 심 후보의 기회는 견제론과 지역 밀착에 있다. 계양을은 민주당 강세 지역이다. 그러나 직전 선거인 2024년 총선에서도 국민의힘 원희룡 후보가 45%대 득표율을 기록했다. 보수층이 완전히 붕괴한 지역은 아니라는 뜻이다. 심 후보 캠프에선 중앙정치 이슈보다 교통난, 낙후 이미지, 원도심 주거환경, 계양테크노밸리의 실질적 기업 유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면 “민주당 강세 지역에도 견제와 경쟁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위협 요인은 선거 구도의 비대칭성이다. 김 후보가 대통령의 약속을 잇는 후보라는 상징성을 갖는 반면, 심 후보는 상대적으로 전국적 인지도가 낮다. 선거가 이재명 대통령의 옛 지역구 수성전으로 흐르면 심 후보의 정책 메시지는 묻힐 가능성이 크다. 한 여론조사 관계자는 “심 후보는 남은 기간 선거판을 ‘누가 대통령과 가깝나’가 아니라 ‘누가 계양 주민의 불편을 더 정확히 고치나’로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남준 ‘성과 로드맵’…심왕섭은 ‘생활 체감형 반격’ 격돌 김 후보의 히든카드는 구체적인 ‘계양 발전 실행계획’이다. 계양테크노밸리에 어떤 기업을, 어떤 인센티브로, 어느 시점까지 유치할 것인지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한 정치컨설팅 업계 관계자는 “김 후보는 지역 현안인 대장홍대선 연장, 광역교통망 확충, 고도제한 완화, 노후계획도시 정비도 선언이 아니라 일정표와 예산표로 보여줘야 한다”며 “ 대통령과의 관계를 지역 예산 확보 능력으로 번역할 때 ‘측근 후보’ 이미지는 ‘일할 수 있는 후보’ 이미지로 바뀐다”고 했다. 심 후보의 히든카드는 ‘계양 토박이 생활정치’다. 여론조사 격차가 큰 상황에서 정권 심판론만으로는 부족하다. 계양의 낙후 이미지, 출퇴근 불편, 원도심 주거환경, 공원·녹지·생활체육시설 부족, 자영업 상권 침체를 주민의 언어로 파고들어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한 여론조사기관 관계자는 “심 후보의 환경·조경 전문가라는 이력을 도시환경 개선 공약으로 압축할 필요가 있다”며 “‘계양을 대통령의 상징 지역구가 아니라 주민의 생활 지역구로 되돌리겠다’는 메시지를 내세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인천 지역 정가에선 △김 후보가 큰 격차의 여론조사 우세를 실제 투표율로 연결할 수 있느냐 △심 후보가 보수층 결집을 넘어 중도층에 ‘한 번은 견제해야 한다’는 설득을 할 수 있느냐 △계양테크노밸리와 광역교통망, 원도심 정비라는 지역 현안을 풀 적임자가 누구냐 등을 마지막 변수로 보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계양을 선거는 대통령의 이름도, 정당의 간판도, 여론조사의 숫자도 투표장 앞에서는 하나의 참고 자료일 뿐”이라며 “누가 더 계양의 길을 넓히고, 일자리를 만들고, 낡은 동네의 시간을 앞으로 돌릴 것인가를 유권자들은 묻고 있다”고 말했다.
2026-05-12 16: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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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에 멈춘 워싱턴의 밤…트럼프 겨눈 총격이 드러낸 미국의 균열
[경제일보] 미국 정치와 언론의 상징적 행사인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이 총격 사건으로 중단됐다. 대통령과 언론인이 한자리에 모여 웃음과 풍자를 나누던 무대는 순식간에 긴급 대피 현장으로 바뀌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비밀경호국 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행사장을 빠져나갔고 참석자들은 식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용의자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미국 사회는 다시 정치폭력의 악몽과 마주하게 됐다. 이번 사건은 한 개인의 돌발 범행으로만 보기 어렵다. 미국이 오랜 기간 쌓아온 정치적 분열과 증오의 언어, 그리고 총기 사회의 위험성이 한순간에 폭발한 장면에 가깝다. 총성은 짧았지만 그 여파는 길게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사건은 현지시간 25일 오후 워싱턴DC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발생했다. 백악관출입기자협회가 주최한 연례 만찬이 진행되던 가운데 행사장 외곽 보안 검색 구역에서 총성이 들렸다. 용의자는 무기를 소지한 채 검색대로 돌진했고 경호 인력은 즉시 제압에 나섰다. 비밀경호국은 곧바로 대통령 신변 보호 절차를 가동해 트럼프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을 현장에서 이동시켰다. 현장 요원 1명이 피격됐으나 방탄 장비 덕분에 큰 부상은 피했다. 레이건 피격 장소서 다시 울린 총성 이번 사건이 더욱 충격을 준 이유는 장소 때문이다. 워싱턴 힐튼호텔은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피격된 곳이다. 당시 레이건은 퇴장하던 순간 총탄을 맞았고 미국은 대통령 암살 공포에 휩싸였다. 45년이 흐른 뒤 같은 장소에서 다시 대통령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 사회가 정치폭력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대통령 주변을 맴도는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 정치를 잠식한 적대의 언어 이번 사건의 배경에는 극단으로 치달은 정치 대립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정치는 오래전부터 정책 경쟁보다 진영 대결의 성격이 강해졌다. 상대 진영을 경쟁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굳어졌다. 선거 때마다 “나라가 무너진다” “민주주의가 끝난다”는 식의 자극적 구호가 난무했고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는 분노와 혐오가 빠르게 확산됐다. 이런 환경에서는 일부 과격한 개인이 자신을 시대의 행동가로 착각하기 쉽다. 총격은 방아쇠를 당긴 한 사람이 저질렀더라도 그 뒤에는 사회 전체의 독기가 쌓여 있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지지층 결집을 위해 강한 언어를 구사해 왔고 반대 진영 역시 그를 민주주의 위협으로 규정해 왔다. 정치 지도자와 시민 모두 상대를 타협의 대상이 아닌 응징의 대상으로 바라본 결과가 오늘의 미국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반복되는 정치폭력의 연대기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폭력 위협에 노출됐다. 2024년 대선 유세 도중 펜실베이니아에서 총격을 받았고 두 달 뒤에는 플로리다 골프장에서 또 다른 암살 시도가 발생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경호 위협은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트럼프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방 판사와 검사, 선거관리 공무원, 주지사, 연방의원까지 협박 대상이 됐다. 민주주의 제도를 떠받치는 인물들이 동시에 공격받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폭력이 일상이 되면 선거는 토론의 장이 아니라 생존 경쟁으로 변질된다. 유권자는 정책보다 공포에 반응하게 되고 지도자는 통합보다 적개심을 자극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경호 시스템은 어디까지 작동했나 이번 사건 이후 미국 안보 당국은 두 갈래 평가를 받고 있다. 무장한 용의자가 대통령 참석 행사장 인근까지 접근했다는 점은 분명한 경고 신호다. 사전 정보 수집과 외곽 통제, 검색 절차 전반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면 총성이 울린 직후 대통령을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용의자를 현장에서 제압한 대응은 신속했다는 평가도 있다. 미국 비밀경호국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 대응 매뉴얼을 정상 가동했다는 의미다. 앞으로 수사의 핵심은 용의자가 어떻게 접근했는지, 단독 범행인지, 사전 경고 신호는 없었는지에 맞춰질 전망이다. 트럼프에게 미칠 정치적 파장 이번 사건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복합적 정치 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지지층에는 공격받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다시 각인시킬 수 있다. 반대층에는 정치 과열이 어디까지 치달았는지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건 직후 정치 갈등은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경한 메시지에 익숙한 그가 통합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다만 미국 사회의 분열이 지도자 한 사람의 발언만으로 봉합될 단계는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흔들린 언론 자유의 상징 무대 백악관 기자단 만찬은 단순한 사교 행사가 아니다.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과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같은 공간에서 마주 앉는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서로 날카롭게 비판하더라도 제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 무대가 총성으로 멈췄다는 사실은 미국 사회에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 풍자와 토론, 비판과 반론이 오가던 자리마저 경호와 불안의 문제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됐다는 뜻이다. 미국이 답해야 할 질문 용의자의 범행 동기와 배후 여부는 수사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은 이미 드러났다. 미국 사회 내부의 분열이 제도적 경쟁을 넘어 물리적 위협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문화,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 폭력을 거부하는 시민적 합의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지금 미국이 잃어가고 있는 것도 바로 그 토대다. 워싱턴 힐튼호텔의 총성은 한밤의 돌발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미국 정치가 어디까지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준 경고음이었다.
2026-04-26 1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