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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악은 그 자리에 무엇을 하러 갔나
[경제일보] 대법관까지 지낸 전직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출국금지됐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수사하는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전 사무총장 등 선관위 관계자들을 피의자 신분으로 입건하고 출국금지 조치했다. 합수본은 중앙선관위와 서울시선관위, 송파·서초·강남·광진·동작구선관위 등 7곳을 압수수색했다. 투표용지 인쇄 계획서, 회의록, 예산서, 투표록 등 선거 준비와 당일 대응을 보여줄 자료들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 출국금지는 유죄 판단이 아니다. 압수수색 역시 혐의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다. 그러나 이 사태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선관위의 공적 권위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선거관리의 최종 책임자였던 인물이 대법관 출신 노태악이라는 점은 이 사안을 더 무겁게 만든다. 국민이 묻는 것은 단순하다. 노태악은 그 자리에 무엇을 하러 갔나. 투표용지가 모자랐다는 말은 사소한 행정 실수가 아니다. 유권자가 투표소에 갔는데 국가가 표를 줄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선거관리에서 가장 기초적인 물적 준비가 무너진 것이다. 선거는 추상적인 민주주의 의식이 아니다. 유권자 명부, 투표소, 기표대, 투표함, 투표용지가 있어야 작동하는 국가 절차다. 그중 투표용지는 선거의 시작점이다. 그것이 부족했다면 선거관리 기관은 가장 낮은 문턱도 넘지 못한 셈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규모다. 처음에는 일부 투표소의 돌발 상황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선관위 자체 조사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전국 50곳으로 늘어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가 중단됐다가 재개됐다. 유권자는 줄을 서서 기다렸고, 선거관리 직원들은 현장에서 혼란을 수습했다. 투표소 현장의 실무자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런 사태가 선거 당일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다면 중앙선관위의 준비, 점검, 보고, 대응 체계 전반이 허술했다는 뜻이다. 공직선거법은 투표용지와 투표함 작성·송부의 실무 주체를 구·시·군선관위로 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중앙선관위원장이 지역 실무 뒤에 숨을 수는 없다. 중앙선관위는 전국 선거관리 기준을 세우고, 위험 요인을 점검하고, 선거 당일 돌발 상황에 대응할 체계를 갖춰야 하는 기관이다. 선거관리의 독립성은 책임을 피하라는 방패가 아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해 공정한 선거를 관리하라는 헌법적 신뢰다. 그 신뢰가 투표소 앞에서 무너졌다. 노 전 위원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법원 주요 보직을 거쳤고, 법원장을 지냈고, 대법관까지 올랐다. 이후 중앙선관위원장에 취임했다. 사법부 엘리트가 밟을 수 있는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마지막 공직의 장면으로 남긴 것이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출국금지라면, 국민은 그의 공직 생활 전체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는 법정에서, 법원에서, 선관위에서 어떤 긴장감으로 일했는가. 물론 이번 사태만으로 과거 판결까지 싸잡아 의심할 수는 없다. 판결은 기록과 법리에 따라 평가돼야 한다. 그러나 최고 법관 출신에게 기대했던 공적 자세와 관리 능력이 이번 사태에서 너무 초라하게 드러난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법관이라는 이력은 단순한 명예가 아니다. 국가 의사결정의 최상층에서 법과 절차의 무게를 다뤄본 경력이다. 그런 사람이 선거관리 기관의 수장이 됐다면 적어도 선거의 기본 절차만큼은 누구보다 엄격하게 챙겼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선관위는 유권자가 투표소에 온 뒤에야 투표용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선거 전에 예상 투표율을 어떻게 계산했는지, 인쇄 매수를 어떻게 정했는지, 지역 선관위의 준비 상황을 중앙선관위가 어떻게 점검했는지, 부족 가능성을 보고받고도 묵살한 정황은 없었는지 수사가 밝혀야 한다. 그러나 법적 책임과 별개로 행정적 책임은 이미 분명하다. 선거 당일 투표용지가 모자랐다. 중앙선관위원장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노 전 위원장에게 이번 일이 처음 맞은 위기는 아니었다. 그는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 이후 중앙선관위원장에 취임했다. 사전투표 부실 관리로 선관위 신뢰가 흔들린 뒤 조직을 바로 세우라는 요구 속에서 자리에 올랐다. 그 뒤 선관위 고위직 자녀 특혜채용 의혹이 터졌고, 선관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다. 사과는 반복됐고 쇄신 약속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이 본 것은 바뀐 선관위가 아니라 또 무너진 선관위였다. 이쯤 되면 문제는 한 번의 실수가 아니다. 책임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지지 않는 조직 문화, 독립성을 말하면서 내부 통제를 미루는 관행, 선거가 끝나면 논란도 지나간다는 안이함이 누적된 결과로 봐야 한다. 중앙선관위는 헌법기관이라는 지위에 기대어 외부 감시에는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그러나 독립성은 무능을 덮어주는 명분이 될 수 없다. 헌법기관일수록 책임의 기준은 더 높아야 한다. 노 전 위원장의 사퇴도 충분하지 않다. 물러나는 것은 정치적·도의적 책임의 시작일 뿐이다. 사퇴했다고 해서 선거 당일 투표권 행사에 차질을 빚은 유권자의 문제 제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선관위 내부에서 어떤 판단이 있었는지, 누가 보고했고 누가 승인했는지, 어떤 지침이 내려갔는지, 예산과 인쇄 물량 산정에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 끝까지 확인해야 한다. 책임선이 실무자 몇 명에서 끊겨서도 안 된다. 실무자는 지시와 기준에 따라 움직인다. 기준을 세운 사람, 점검하지 않은 사람, 위험 신호를 놓친 사람이 함께 드러나야 한다. 대법관 출신이라는 경력은 이번 사태에서 오히려 더 무거운 질문을 부른다. 법관은 절차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직업이다. 작은 송달 하자 하나, 증거조사 절차 하나, 기일 통지 하나가 재판 전체의 적법성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 다루는 사람이 법관이다. 그런 법관 출신이 선거관리 기관의 정점에 있었다면 투표 절차의 작은 허점이 얼마나 큰 불신으로 번지는지 몰랐다고 할 수 없다. 몰랐다면 무능이고,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면 더 큰 책임이다. 국민은 선관위원장에게 선거 당일 투표소마다 서 있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 선거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점검하고, 실패 가능성을 줄이라고 요구한다. 그 자리는 명예직이 아니다. 선거가 끝난 뒤 사과문을 읽는 자리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 절차가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책임지는 자리다. 노 전 위원장은 그 책임을 다했는가. 이번 사태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수사는 차분하게 진행돼야 한다. 정치권도 이 사안을 정파적 공방으로만 소비해서는 안 된다. 선거관리 실패를 이유로 근거 없는 음모론을 키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정쟁화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책임 규명을 흐려서도 안 된다. 투표용지 부족은 실제로 발생했다. 선관위가 자체 조사로도 전국 50곳의 문제를 확인했다. 이 정도 사안이라면 조직 내부 감사나 위원장 사퇴만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노태악 개인의 불명예로만 볼 사안도 아니다. 이번 사태는 우리 공직사회 엘리트 시스템의 취약한 단면을 보여준다. 높은 자리에 오른 경력과 실제 관리 능력은 같지 않다. 법복의 권위가 행정 능력을 보증하지 않는다. 요직을 두루 거쳤다는 사실이 현장의 위험을 읽는 감각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높이 올라간 사람일수록 조직의 보고서와 의전 뒤에 숨어 현장의 균열을 놓치기 쉽다. 그 균열이 선거 당일 투표소 앞에서 터졌다. 국민이 느끼는 허탈감은 여기에 있다. 선관위는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다. 도로 포장도, 재난 구조도, 산업 정책도 아니다. 선거가 본업이다. 그런데 본업의 가장 기본인 투표용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국가기관이 자신의 존재 이유에 해당하는 일을 실패한 것이다. 그 실패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 대법관 출신 중앙선관위원장이었다. 이것이 이번 사태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노 전 위원장은 사과했고 물러났다. 그러나 사과와 사퇴만으로 끝낼 수 없는 공적 실패가 있다. 이번 일이 그렇다. 합수본 수사는 누가 어떤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가려야 한다. 동시에 중앙선관위는 선거관리 시스템을 처음부터 다시 열어야 한다. 투표율 예측, 투표용지 인쇄 기준, 예비 물량 관리, 지역 선관위 보고 체계, 선거 당일 비상 대응, 중앙의 지휘 권한과 책임 구조를 모두 공개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거창한 구호로만 지켜지지 않는다. 투표소 문이 열리고, 유권자가 신분을 확인받고,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하고, 투표함에 넣는 절차가 차질 없이 이어질 때 지켜진다. 그 기본 절차가 멈추면 국민은 선거 결과 이전에 선거관리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선관위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은 특정 정당의 비판이 아니라 유권자의 신뢰 상실이다. 노태악은 그 자리에 무엇을 하러 갔나. 이 질문은 한 사람을 겨냥한 분노에 그치지 않는다. 헌법기관의 독립성이 책임 공백으로 변질되지 않았는지, 사법 엘리트의 권위가 실제 행정 실패를 가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선관위가 국민 앞에 충분히 낮은 자세로 일해왔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투표용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선관위라면 국민에게 신뢰를 요구할 자격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이번 사태의 결론은 수사기관의 판단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법적 처벌 여부와 별개로 노태악이라는 이름은 선거관리 실패의 책임자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대법관에서 중앙선관위원장으로 이어진 화려한 경력의 끝이 왜 이런 모습이어야 했는지, 그 답은 노 전 위원장과 선관위가 스스로 내놓아야 한다. 국민은 이미 묻고 있다. 그 자리가 그렇게 가벼운 자리였느냐고.
2026-06-13 12: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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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끝났지만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경제일보] 판결문은 남았지만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휴일에도 밀린 업무를 처리하러 법원으로 향했던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다음 날 새벽 법원 청사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맡았던 사건은 사회적 관심이 컸고 판결 전후로 정치적 해석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재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가장 먼저 멈춰야 할 것은 단정이다. 고 신종오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마지막 선택을 특정 재판이나 특정 판결과 곧바로 연결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유서에는 김건희 여사 재판과 관련한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가까운 동료들조차 사정을 알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사망 원인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죽음의 이유는 남은 사람들이 편한 언어로 재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을 정치적 해석의 재료로 삼는 순간 고인의 마지막은 다시 진영의 소음 속에 묻힌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는 없다. 사망 원인을 특정할 수 없더라도, 그가 마지막까지 놓여 있던 업무 환경이 적정했는지는 별개의 검토 대상이다. 원인을 단정하지 않는 태도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따져보는 일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고인은 서울고법 형사15-2부 재판장으로 사회적 관심이 큰 사건들을 맡았다.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 항소심도 그중 하나였다. 서울고법 형사1부가 내란 사건 전담 재판부로 지정되면서 기존 주요 사건들이 다른 재판부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서 고인이 속한 재판부의 부담도 커졌다는 말이 법원 안팎에서 나왔다. 사회적 관심 사건은 사건 수 하나로 계산되지 않는다. 기록이 두껍고 쟁점이 복잡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무겁지만 부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일 하나를 잡아도 해석이 붙고 증거 판단 하나에도 정치적 의미가 덧씌워진다. 법정 안에서는 증거와 법리로 다투지만 법정 밖에서는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목소리들이 판결을 기다린다. 판사가 어느 한쪽의 기대와 다른 결론을 내리면 판결문은 사라지고 판사 이름이 먼저 불려 나온다. 항소심 재판장은 1심 결론을 다시 읽는 자리가 아니다. 사실인정의 빈틈, 증거능력의 경계, 공모관계의 추론, 양형의 균형을 다시 따져야 한다. 특히 1심 판단을 일부 뒤집는 판결은 부담이 더 크다. 판결문 한 문장은 상고심의 검증과 여론의 공격을 동시에 견뎌야 한다. 법률가에게는 충분히 다툴 수 있는 쟁점도 정치의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배신과 응징의 문제로 바뀐다. 법리 판단은 줄어들고 의도 추궁이 앞선다. 김건희 여사 사건 항소심 판결도 법률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1심과 달리 일부 혐의를 유죄로 판단한 부분은 상급심에서 다시 다퉈질 수 있다. 그것이 재판 절차다. 그러나 판결 비판은 판결문 안의 논리와 증거 판단을 향해야 한다. 판사를 향해 정치적 의도를 추정하거나 개인을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흘러가면 사법 감시는 제 기능을 잃는다. 재판의 독립은 법관이 비판받지 않을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동시에 법관이 진영 정치의 표적이 되어도 괜찮다는 뜻도 아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그러나 판결을 쓰는 사람의 고통까지 판결문에 적히지는 않는다. 선고가 끝나면 사람들은 결론만 본다. 유죄냐 무죄냐, 1심을 유지했느냐 뒤집었느냐, 형이 무겁냐 가볍냐만 남는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재판부가 어떤 기록을 읽고 어떤 문장을 고치고 어떤 부담을 견뎠는지는 법정 밖 관심사가 되기 어렵다. 법관의 직업적 숙명이라고 넘겨온 그 지점에 한국 사법의 오래된 문제가 있다. 법원은 오랫동안 성실한 법관의 밤샘 노동을 제도의 여력처럼 써왔다. 기록을 집으로 가져가고 주말에 법원에 나오고 판결문을 몇 번이고 고치는 일은 법관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몫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성실한 법관이 많다는 사실은 제도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제도가 업무 처리 능력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 한계는 무너진다. 법관의 독립은 고립과 다르다. 외부 권력과 여론에서 벗어나 판단하라는 말은 그 무게를 혼자 견디라는 뜻이 아니다. 독립된 판단을 가능하게 하려면 조직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관심 사건을 맡은 재판부에는 그에 맞는 인력과 시간과 행정 지원이 따라야 한다. 사건 배당은 균형을 가져야 하고 일정 조정은 현실을 반영해야 하며 법관의 건강 이상 신호를 확인하는 장치도 있어야 한다. 판사를 혼자 두면서 독립을 말하는 것은 독립의 의미를 좁게 읽는 것이다. 고인은 불면증 증세가 심각했지만 재판 업무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수면제를 처방받고도 복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목은 무겁다. 판사가 자신의 건강보다 재판 차질을 먼저 걱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직업윤리로 보면 책임감일 수 있다. 조직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 신호다. 재판을 책임지는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업무가 계속 굴러가야 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들여다봤어야 할 문제다. 판사들은 자신의 부담을 밖으로 잘 말하지 않는다. 판결로 말해야 한다는 직업 문화가 강하고 법원 내부 사정을 드러내는 일도 조심스러워한다. 법원 조직은 때때로 그 침묵을 안정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견딜 만한 것은 아니다. 침묵은 법관 사회의 미덕일 수 있지만 동시에 위험을 늦게 발견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판사가 무너지는 순간이 돼서야 조직이 움직인다면 이미 늦다. 서울고법이 이번 일을 계기로 법관들의 실질적인 업무 부담 경감과 제도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꾸리기로 한 것은 필요한 조치다. 다만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법원은 추상적인 업무 경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준을 내놓아야 한다. 사회적 관심 사건의 배당 원칙, 고난도 형사사건 담당 재판부의 사건 수 조정, 재판연구 인력의 보강, 판결문 작성 부담 완화, 장기 미제 사건과 긴급 사건의 우선순위 조정 기준이 필요하다. 법관의 정신건강 관리도 복지 차원을 넘어 재판 안전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정치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권은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법원을 공격하고 유리한 판결이 나오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같은 법원, 같은 절차, 같은 법관을 두고 결론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사법부 독립을 말한다. 판결 비판은 가능하다. 정치권도 판결에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법관 개인을 향해 정치적 낙인을 찍는 일은 다르다.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압박이다. 정치권의 언어가 재판을 압박한다면 언론의 보도 방식은 그 압박을 키우거나 줄인다. 사회적 관심 재판을 보도할 때 법리보다 파장을 앞세우고 쟁점보다 진영의 반응을 먼저 배치해온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판결문을 충분히 읽지 않은 채 결론만 뽑아 정치적 의미를 붙이는 보도는 재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일에 가깝다. 법원이 국민을 설득하려면 판결문이 더 친절해야 한다. 그러나 언론도 재판을 전달하려면 최소한 판결의 문맥과 법리의 뼈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법 불신이 커진 시대에 법원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판결문은 더 치밀해야 하고 절차는 더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사법 불신이 법관 개인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판사를 공격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재판부의 의도를 단정하는 문화는 결국 법원을 더 약하게 만든다. 한 판사의 죽음 앞에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사인을 추정하는 일이 아니다. 고인을 특정 정치 사건의 상징으로 만드는 일도 아니다. 이제 질문은 사망 원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제도를 향해야 한다. 주요 재판이 왜 소수 재판부에 집중되는지, 사회적 관심 사건을 맡은 판사가 왜 외부 비난과 내부 부담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지, 법관의 건강 문제가 왜 재판 차질이라는 말 앞에서 뒤로 밀려왔는지 따져야 한다. 고인의 마지막 마음은 누구도 대신 말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법관 한 사람이 주요 재판의 무게, 조직 내부의 부담, 외부의 시선, 건강의 한계 속에서 홀로 오래 서 있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사법부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해야 할 일은 추모의 말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재판을 맡은 사람을 지키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재판도 지켜진다. 재판은 국가가 시민에게 행사하는 가장 무거운 권한 중 하나다. 그래서 판사는 냉정해야 하고 독립적이어야 하며 비판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이 판사를 고립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법정의 권위는 판사의 침묵과 희생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사건 배당, 충분한 지원, 절제된 공론장, 판결 비판과 인신공격을 구별하는 사회적 감각 위에서 유지된다. 재판은 끝났다. 판결문은 남았다. 그러나 그 판결문을 쓴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 문장 앞에서 법원은 업무 부담을 말해야 하고 정치권은 판결 비판의 선을 돌아봐야 하며 언론은 재판을 소비해온 방식을 점검해야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누구의 책임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죽음 이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26-05-30 1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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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 줄폐업 현실화…하청·전문건설업체부터 무너진다
[경제일보] 건설업계의 연쇄 부실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하청과 전문건설업체를 중심으로 폐업이 빠르게 늘고 있다. 산업 생태계의 하단에서 시작된 충격이 자재 공급과 고용, 본공사 일정까지 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건설산업지식정보시스템(KISCON)에 따르면 국내 전문건설업 폐업 신고는 2020년 2187개사에서 지난해 2969개사로 35.8% 증가했다. 지난해 기준 전체 전문건설업체 6만6368개사 가운데 약 4.5%가 문을 닫은 셈이다. 전문건설업은 철근콘크리트, 전기, 설비, 도장, 방수, 토공 등 개별 공종을 맡는 업체들이 중심이다. 대형 건설사가 전체 사업을 총괄하면 전문건설업체들이 실제 시공을 담당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현장에서 공사를 움직이는 실무 축에 해당한다. 전문가들은 최근 폐업 증가를 단순한 경기 순환의 결과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진단한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은 재무적으로 취약한 업체 비중이 구조적으로 확대된 영향이 크다고 분석했다. 수주 감소와 공사비 상승, 금융 비용 부담이 동시에 누적되면서 체력이 약한 업체부터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의미다. 해외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영국에서는 올해 1월 건설업 파산이 277건으로 전체 산업 파산의 17.1%를 차지했다. 최근 1년 누적 건수는 3912건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보다 21.5% 증가했다. 특히 같은 달 영국 전문건설업종 파산은 128건으로 전체 건설업 파산의 46.2%를 차지했다. 하도급 비중이 높은 업종부터 타격을 받는 구조가 국내와 유사하다는 분석이다. 전문건설업체가 먼저 흔들리는 이유로는 낮은 협상력과 취약한 자금 여건이 꼽힌다. 이다원 대한건설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전문건설업은 대금 회수와 금융 접근성, 원가 전가 능력에서 모두 취약해 외부 충격에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분야라고 설명했다. 현장에서는 수주 규모보다 현금흐름 관리가 더 큰 문제로 지목된다. 전문건설업체는 공사를 먼저 수행한 뒤 기성금이나 준공 대금을 받는 경우가 많다. 발주처나 원도급사의 지급이 늦어지면 곧바로 운영자금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도급 거래 특성상 미수금 위험도 크다. 공사비 정산이 늦어지거나 추가 공사비 협의가 장기화되면 자금 압박은 더 심해진다. 규모가 작은 업체일수록 몇 건의 대금 지연만으로도 경영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자금 조달 환경도 녹록지 않다. 중소 전문건설업체 상당수는 은행권 대출보다 개인 자금이나 고금리 차입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다. 금리 상승기에는 같은 충격에도 부실이 더 빠르게 확대될 수밖에 없다. 전문건설업 부실은 개별 기업에 그치지 않는다. 협력업체와 자재·장비 공급업체, 현장 근로자 고용, 공정 일정까지 연쇄 영향을 줄 수 있다. 특정 공종 업체가 현장에서 이탈하면 전체 사업 일정이 지연되는 사례도 발생할 수 있다. 업계에서는 당분간 공사대금이 제때 지급되느냐가 생존의 핵심 변수라고 보고 있다. 하도급 대금 지급 기일 준수, 지연 지급 모니터링, 미수금 관리 강화가 우선 과제로 거론된다. 부실 징후를 조기에 파악하는 체계 필요성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레버리지와 유동성, 수익성, 운영 효율성 등 재무 지표를 활용해 전문건설업 특성에 맞는 조기경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구조조정 속도 역시 중요 변수다. 회생 절차가 길어질수록 신용과 거래 관계가 빠르게 무너지는 업종 특성상 부실 기업 정리와 인수합병(M&A)이 신속하게 진행돼야 산업 전반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건설산업의 위기는 가장 약한 고리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다. 현장의 하단을 지탱하는 전문건설업체가 버티지 못하면 그 충격은 결국 산업 전체로 번질 수밖에 없다.
2026-04-23 16:28:14